크리스토퍼 라이히의 <차명계좌>는 악명 높은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와 거대한 돈세탁 음모를 파헤친 금융 스릴러 소설입니다. 혹한으로 취리히 호수가 완전히 얼어붙어버린 1998년 1월 어느 겨울날 주인공 닉 노이먼은 긴장감을 느끼며 새 직장인 유나이티드스위스뱅크(USB)에 첫 출근을 합니다. 닉은 미국 해병대 장교 출신이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했고, 무엇보다 USB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 뉴욕의 유명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에서 촉망받던 젊은 직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떤 이유로 월스트리트를 뒤로하고 취리히의 작은 은행으로 옮긴 것일까요? 심지어 사랑하는 약혼녀는 미국을 떠날 생각이 없어 닉에게 헤어지자고 통보합니다.
USB 임원들도 궁금해합니다. 특히 인사팀장 실비아 숀은 노골적으로 경계심을 표하며, ‘무엇이 당신을 뉴욕도 런던도 홍콩도 도쿄도 아닌 이곳에 오게 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따져 묻습니다. 닉은 ‘은행장 볼프강 카이저가 직접 나에게 오라고 권했다. 마침 대형 은행들이 하는 기업 금융이 싫었다.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영업하는 프라이빗뱅킹을 하고 싶었는데 USB가 그중 최고였다’고 답합니다.
속내는 다릅니다. 17년 전 로스앤젤레스에서 피살된 닉의 아버지 알렉스는 열여섯에 USB에 수습사원으로 입행해서 초고속으로 승진해 이사회 구성원인 부행장까지 이른 입지전적 인물이었습니다. 장례식 이후 카이저 행장은 물심양면으로 죽은 옛 동료의 가족을 도왔습니다. 닉은 아버지의 직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추억 때문은 아닙니다. 얼마 전 어머니의 창고에서 아버지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이 은행 업무와 관련돼 있음을 어슴푸레 알게 됐습니다. 닉은 그 비밀을 풀고 싶을 뿐입니다.
USB 주요 고객들의 계좌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예컨대 닉이 담당한 핵심 고객은 그저 ‘549.617RR’이라는 번호로만 통합니다. 책의 원제 ‘Numbered Account’는 이런 계좌를 지칭합니다. 국내 은행에는 이런 계좌가 지금은 물론 과거에도 없어서 딱 맞는 대응어가 없습니다. 직역하자면 ‘번호계좌 또는 무명계좌’라고 해야 합니다. 한국어판 제목 ‘차명계좌’는 실제 계좌 주인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 만든 계좌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의 이름을 몰래 써서 만들면 ‘도명계좌’이고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이름을 사용하면 ‘허명계좌’입니다. 국내에서는 관행적으로 실명계좌가 아닌 모든 계좌를 ‘차명계좌’로 통칭하기 때문에 괜찮은 번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은행이 고객 비밀을 보호하는 관행은 17세기에 지금의 스위스와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 걸친 도시들에서 시작됐습니다. 1934년 스위스는 은행법에 고객 정보를 유출하면 범죄로 처벌한다는 조항을 처음 도입했습니다. 이때부터 전 유럽의 자금이 스위스로 몰려들었습니다. 스위스 은행들은 1940년대에 더 나아가 아예 이름이 없는 ‘번호계좌’를 도입하면서 비밀주의를 강화했습니다. 스위스에는 사육제 축제 때 색색의 종잇조각을 퍼레이드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뿌리는 전통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한 은행원이 문서파쇄기에 있는 가루가 된 종이를 날렸다가 파면되고 징역에 처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은행법이 엄격하다고 실비아는 닉에게 경고합니다. 이 종이에 고객 거래 정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객으로서 금융 거래 내역은 민감한 사적 정보이므로 당연히 보호받아야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범죄수익이나 뇌물 같은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자금의 안전한 온상이 되는 심각한 부작용도 있습니다. 닉은 첫 출근을 하는 날 취리히 은행이 밀집한 거리에서 사람들이 시위하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이들의 피켓에는 은행을 ‘범죄자를 돕는 뻔뻔한 조직’이라거나 ‘죽음을 거래하는 마약상의 공범’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비밀은행은 스위스 경제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범죄의 협력자로서 원성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문제가 된 549.617RR의 실제 소유자는 레바논에서 암약하는 세계적인 마약상 알리 메블레비입니다. 물론 USB 직원 대부분은 그가 누구인지 모릅니다(사실,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메블레비를 추적하는 미국 마약단속국 유럽본부장 스털링 쏜은 마약 조직의 돈줄을 막기 위해 스위스에서 고군분투했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협력하겠다는 말뿐입니다. 쏜은 절박한 마음에 직접 스위스 은행도 상대합니다. USB를 방문해 ‘은행 고객의 95%는 법을 준수하고 4%는 탈세나 뇌물을 처리하는 잔챙이들이다. 여기엔 관심 없다. 은행을 통해 거액을 세탁하는 극소수 거대 마약상들은 신고해라.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위협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위스 은행들이 실제로도 그랬듯 USB 직원들은 냉소적입니다. 닉의 사수인 페터 슈프레허는 이렇게 투덜댑니다. ‘스위스 은행들은 그간 비타협적으로 고객 정보를 보호해왔어. 필리핀 독재자 마르코스의 재산을 밝히라는 라모스 대통령, 콜롬비아 마약상을 쫓던 FBI, 나치에 희생된 유대인들의 예금을 알려달라는 유가족들, 모두 다 실패했다고.’ 쏜은 USB가 메블레비와 협력한다는 의심을 갖고 있습니다. 닉을 몰래 만나 미국인으로서 애국하는 마음으로 협력하라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닉은 망설이면서 진실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은행 전산 시스템은 최신 보안장치가 걸려 있습니다. USB는 여기에 케르베로스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옥문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리 괴수입니다. 하지만 지옥의 케르베로스가 헤라클레스에게 무릎을 꿇었듯이, USB의 철통같은 장벽도 닉의 활약에 조금씩 무너집니다. 드디어 닉은 549.617RR의 실체와 음모, USB의 협력자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과의 관계를 알게 됩니다.
스위스 은행을 통해 범죄 자금이 세탁되고 은닉되는 것에 국제사회의 반발이 매우 컸습니다. 가장 크게 압력을 가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2010년 미국 의회는 미국인들의 해외금융정보 파악을 위해 ‘해외금융계좌납세협력법’(FATCA)을 제정하고 외국 금융기관들이 이를 준수하도록 했습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스위스 쪽에 ‘FATCA를 받아들이거나 그게 싫으면 미국의 모든 금융거래 시스템에서 나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간명하게 통보합니다. 어떤 은행이든 달러화 결제 시스템에서 배제되면 일상적인 업무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결국 스위스 은행들은 미국인 고객에 대해서는 비밀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본 유럽 각국도 미국과 유사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과거 국내 인사들이 스위스 은행을 통해 검은돈을 얼마나 관리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동아일보> 기자 출신 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에서 단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국 의회보고서에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 관리하는 스위스 비밀계좌가 빈번히 언급됩니다. 걸프, 칼텍스 등 외국 기업에 한국에서 사업하는 대가로 스위스 은행에 몇백만달러씩 입금하게 하고 이를 정치자금으로 관리한 것이 상세히 서술됐습니다.
과거 우리나라 은행에서 숫자로만 구성된 비밀계좌는 없었지만 광범위하게 차명계좌가 활용돼 손쉽게 검은돈을 세탁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30년 전인 1993년 8월 김영삼 대통령은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해 차명계좌를 봉쇄했습니다. 전시가 아닌 평시에 헌법 제76조 1항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사용한 드문 사례입니다. 도입 초기에는 경제가 얼어붙으리라는 우려가 컸지만 큰 부작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경제 투명성 제고에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을 돈키호테라고 좋지 않게 보는 평가가 있는데, 그의 저돌적 성격이 빛나게 성공한 사례입니다.
소설 속 USB의 휘장에는 라틴어로 ‘Pecuniat Honorarum Felicita’라고 쓰여 있습니다. ‘돈이라면 대환영입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스위스의 비밀은행은 쇠퇴하고 있지만 검은돈은 여전히 안식처를 찾아 떠돌고 있습니다. 검은돈을 대환영하는 또 다른 은행들이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들과 홍콩 등에서 스위스 은행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들 신흥 돈세탁 강자에 대한 소설을 살펴보겠습니다.
크리스토퍼 라이히는 금융인 출신의 소설가입니다. 부모는 스위스인으로 그가 태어났을 때 일본 도쿄에서 근무했습니다. 라이히는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조지타운대학을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주식과 채권을 더 공부하라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텍사스대학(오스틴) 경영대학을 마치고 월스트리트에 도전장을 냅니다. 이때 그의 꿈은 1980년대 정크본드의 왕이었던 마이클 밀켄과 칼 아이칸, <월스트리트의 늑대>의 주인공 고든 게코처럼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87년 블랙먼데이로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취업이 어려워집니다. 목표를 낮춰 스위스유니언뱅크(UBS로 소설 속 은행 이름은 이를 비튼 것입니다)에 취업해 취리히로 옮깁니다. 출근 이틀째 되던 날 미국 마약 수사관이 방문해 협조하라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책으로 쓰면 끝내주겠는걸”이라고 생각합니다. 1994년 그는 고액 연봉의 직장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돌아와 소설가로 변신합니다. 그의 첫 소설 <차명계좌>는 1998년 전세계에 번역돼 100만 권 이상 팔렸습니다. 한국어판은 서계인의 번역으로 1999년 스튜디오21에서 출간됐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소설로 읽는 경제학: 일반인은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경제와 금융 종사자는 소설에 매력을 느끼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글입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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