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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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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매도로 한탕 노린 하버드 경제학 교수

개인과 집단의 비합리성 이용해 사회 개혁하려 했던 경제학자의 삶 다룬 갤브레이스 소설
등록 2024-08-30 19:01 수정 2024-09-04 11:45
소설의 주요 무대인 하버드 패컬티 클럽의 전경. 하버드대 누리집 갈무리

소설의 주요 무대인 하버드 패컬티 클럽의 전경. 하버드대 누리집 갈무리


소설 ‘하버드 경제학 교수(A Tenured Professor)’ 속 몽고메리 마빈은 1972년 하버드대학에 입학합니다. 대학가에는 1960년대 전세계에서 타오른 반전 학생운동의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고, 베트남전의 그림자는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해 11월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 후보는 공화당 소속 현직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에게 역사적 참패를 당했습니다.(매사추세츠와 워싱턴DC 단 두 곳에서만 승리했습니다.) 자유주의자로서 지역사회 활동에 양심적으로 참여했던 부모의 영향을 받은 마빈은 고등학교 때부터 학생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반감을 가졌습니다. 다른 한편 ‘인생이라는 게임의 점수가 돈으로 표시’되는 풍조에서 큰돈을 버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냉장고 가격 분석으로 명성을 얻은 젊은 학자 

마빈은 대체로 학문에 열중함으로써 불안을 억누르고 학문의 세계에서 마음의 평안을 얻었습니다. 경제학·통계학·사회심리학에 열심이었고, 학생들 사이에 악명 높던 매크리먼 교수의 정신측정학 수업까지 들었습니다. 매크리먼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아닌 개인과 집단의 광기를 전제로 사회 활동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비합리성을 평가하고 계측하는 방법을 개발하려 노력한 학자입니다.

경제학과의 그리어슨 교수는 지도학생 마빈이 경제학자가 되고 싶다고 하자 기쁜 마음으로 훌륭한 경제학자가 될 것이라고 격려합니다. 마빈은 ‘경제학의 테크니컬한 측면이 마음에 들고, 세상에 유익한 보탬이 되기 위해 경제학자가 되려 한다’는 포부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어슨 교수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학문에 전념하라고 충고합니다. 마빈은 애덤 스미스와 케인스가 모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으며, 특히 케인스는 주식시장에서 큰돈을 벌었다고 스승의 충고에 조심스레 반발합니다.

하버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마빈은 마셜 장학금을 받고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토론토대학을 마치고 ‘벌로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로 유학 온 캐나다 여학생 ‘머지’ 브래드퍼드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머지는 마빈 같은 천재 학자는 아니지만 사회의식이 투철하고 결단력과 추진력은 마빈을 압도하는 여성입니다.

마빈은 케임브리지 생활을 마치고 버클리대학에서 ‘냉장고 가격 결정에 관한 수학적 패러다임 모델’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이 논문은 냉장고 시장을 훌륭하게 분석했을 뿐 아니라, 미적분학과 대수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가격분석 이론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의 논문은 경제학계의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 ‘아메리칸 이코노믹 리뷰’에 실렸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출판부는 그의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판했습니다. 학계 스타가 된 마빈에게 하버드대학은 파격적인 영입 제안을 합니다.

하버드대학으로 옮긴 마빈은 냉장고 시장과는 별도로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으로 얼룩진 금융 공황의 역사를 분석하려고 합니다. 뛰어난 계량경제학 실력과 역사적 교훈 그리고 매크리먼에게 배운 정신측정학까지 동원해 광기의 정도를 계산하는 공식을 작성합니다. 나중에 비합리적 기대지수(IRAT)로 유명해집니다. 마빈은 18세기 미시시피 버블을 기록한 생시몽의 저작에서 ‘대부분 사람이 미시시피 회사 주가 붕괴로 전 재산을 다 날린 덕택에 유복해진 극소수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을 읽고 자신의 IRAT가 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집단 광기의 허점을 이용해 돈을 벌다

첫 분석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였습니다. 마빈의 IRAT는 이 은행에 대한 대중의 황홀감이 객관적 실체보다 몇 배나 높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마빈은 계산 결과를 머지에게 보여주며 이 은행 주식을 공매도할 경우 향후 주가가 폭락하면 큰돈을 벌 수도 있다고 얘기합니다. 머지는 이 아이디어에 끌리는데 정작 마빈은 주저합니다. 아직 검증이 부족하다는 생각과 순수 학문에 시간을 써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지는 마빈과 달랐습니다. 즉시 증권회사 메릴린치로 달려가 계좌를 만들고 자기 명의로 공매도 투자를 시작했습니다. 머지는 마빈의 아이디어로 이익을 냈고, 이것이 지렛대가 되어 이후 부부의 의사결정은 머지가 주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빈과 머지의 모험은 시작됩니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소설을 시작하면서 등장인물 대부분이 허구의 산물이라 밝히고 오해하지 말라고 당부하지만 어쩔 수 없이 실제 경제학자들의 모습이 겹쳐 보입니다. 그리어슨 교수는 사려 깊고 학문 이외의 것에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당시 모범적인 교수를 상징합니다. 매크리먼은 합리성을 무기로 경제뿐 아니라 모든 사회현상을 설명하려고 달려드는 오만한 경제학에 맞서 싸우며 비합리성을 수호하려 노력하는 소수의 사회과학자를 대표합니다.

마빈은 복잡한 인물입니다. 탁월한 수리모형(레몬 가격 이론)으로 당대 경제학자들을 놀라게 하고 동시에 인간의 비합리성을 파고든 조지 애컬로프(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를 연상시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애컬로프는 자신의 이름으로 대규모 금융투자에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오히려 거대 헤지펀드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의 공동 설립자이자 주요 파트너로 활약했던 금융경제학자 마이런 숄스와 로버트 머튼을 떠올리게 됩니다.(두 명 모두 1997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하지만 애컬로프의 비합리성 저술이나 숄스와 머튼의 LTCM 설립이 이 소설 출간 이후 일이니 직접적으로 연관 지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 갤브레이스는 여러 경제학자의 모습을 종합해 만들었을 것입니다.

또 머지는 주요 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을 계산해서 공개해 고위직 여성 비율이 낮은 기업을 압박하는 일에 열심입니다. ‘유리 천장’에 대한 현대적 논의의 출발점을 볼 수 있습니다. 또 금융시장을 통해 기업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머지의 주장은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지배구조) 운동의 초기 모습입니다. 심지어 미국 정치의 고질적 문제인 금권정치의 핵심 수단인 정치활동위원회(PAC)에 대한 개혁운동에도 선구적으로 참여합니다.(갤브레이스 예측대로 정치자금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하버드 경제학 교수의 재치 넘치는 풍자

저는 이 소설을 1992년 처음 읽었습니다. 당시 경제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아주 짧은 책이고 대단히 지적인 소설 같기는 한데 실체가 잘 안 잡히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그의 경제학 저작들에 비해 그다지 진보적이지도 않고, 금융을 악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듯한 불편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후 미국 금융시장이 요동치거나, 경제학계에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경쟁하는 모습을 볼 때 이 책을 펼치면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미국 정치에 대한 이해에도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갤브레이스의 어떤 경제학 저술보다 더 흥미롭고 유익한 작품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경제학자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유머와 매력적인 문장들로 빛나는 작품입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의 ‘하버드 경제학 교수’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존 에프 케네디 도서관 및 박물관 누리집 갈무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존 에프 케네디 도서관 및 박물관 누리집 갈무리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1908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난 저명한 경제학자입니다. 토론토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교수와 명예교수로 오랫동안 근무했습니다. 1971년에는 미국경제학회 회장으로 선출됐습니다. 여러 민주당 정부에서 공직을 맡았는데, 케네디 대통령 시절 인도 주재 대사로 근무한 것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의 책 ‘미국 자본주의’ ‘풍요로운 사회’ 등은 1950년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였고,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았습니다. ‘하버드 경제학 교수’는 1990년 미국에서 출판된 그의 세 번째 소설로 김성숙의 번역으로 1992년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출간됐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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