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오만과 편견’(2006) 스틸컷. 네이버 영화 갈무리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200여 년간 전세계에서 반복 출간됐고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불멸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영화와 티브이(TV) 드라마로 수없이 반복 제작돼 모든 로맨틱 스토리의 원형이 된 작품입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은 18세기 후반 이래 영국에서 유행했던 감상주의 소설에 비판적이었습니다. 오히려 인물을 일상 속에서 정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풍속극 또는 19세기 사실주의의 선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덕택에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200년 전 영국의 계급, 사회관계, 결혼과 상속 등에 대해 생생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제임스 3세가 왕위에 있고 그의 아들 섭정공(Prince Regent)이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19세기 초 영국입니다. 베넷 부부는 잉글랜드 남부 하트퍼드셔의 농장이 딸린 주택에서 다섯 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큰딸 제인은 소문난 미인으로 착한 심성의 소유자이고, 막내 리디아는 허영기 가득한 철부지입니다. 주인공인 둘째 엘리자베스는 제인만큼 미인도 아니고 리디아만큼 애교가 넘치지도 않지만 그 시대에 드문 자립적이고 자존심 강한 여인입니다. 이 마을에 북부 잉글랜드 출신의 부유한 총각 빙리가 이사를 옵니다. 이후 빙리와 제인, 빙리의 친구 다아시와 엘리자베스 사이에 오해와 갈등이 반복되면서 사랑이 싹트는 이야기입니다.
광고
소설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이런 남자가 이사 오면 다들 그를 자기네 딸 가운데 하나가 차지해야 할 재산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빙리와 다아시가 큰 부자라고 소문이 난 터라 딸만 다섯을 둔 베넷 부인은 벌써 마음이 앞서갑니다.
소설에 묘사된 빙리의 재산은 10만파운드이고 연 소득은 5천파운드입니다. 베넷과 다아시의 연 소득은 각각 2천파운드와 1만파운드입니다. 토지에서 나오는 임대수익의 비율이 미스터 빙리의 경우와 같다고 가정하면 이들의 재산은 각각 4만파운드와 20만파운드입니다. 이 금액은 현재 가치로 어느 정도일까요? 경제학자들이 시점 간 금액을 비교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을 이용해 계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2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물가지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환산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상대적 지위는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당시 상위 1% 가구의 평균 재산을 10만파운드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재산이 20만파운드인 미스터 다아시는 상위 0.025%에 속하고 그보다 더 부유한 가구는 약 5천 가구뿐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빙리는 상위 1%이고 베넷 역시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넉넉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넷의 토지와 주택은 베넷이 사망하면 아내와 딸이 아닌 먼 친척 조카인 윌리엄 콜린스 목사에게 상속되도록 ‘한정’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넷 부인은 딸들을 부유한 집안에 시집보내는 데 더 혈안이었습니다.
광고
한정상속은 장자상속과 관련되지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먼저 장자상속은 적법하게 태어난 맏아들에게 우선적으로 상속하는 것으로 중세 영국의 제도이고 ‘오만과 편견’이 쓰인 시대에는 법적 강제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관행적으로 장자상속은 널리 퍼져 있었고, 유언을 통해 딸과 아들에게 유산을 고르게 상속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이 시기 영국에서 지위와 권력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재산은 토지였습니다. 이 토지를 자손들에게 거듭해서 균등 상속하다보면 결국 작은 조각만 남게 되고, 대규모 토지 소유자의 지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한정상속은 좀더 복잡합니다. 당시에 모든 토지를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에게 물려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베넷이 소유한 토지는 그 선대에 그렇게 하도록 한정되었던 것입니다. 베넷은 살아생전에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을 마음대로 쓸 수 있지만 토지 자체는 매매하거나 상속할 수 없었습니다. 베넷 부부는 한정상속이 있더라도 아들을 낳으면 토지를 그 아들이 상속받기 때문에, 그 아들이 누이들을 돌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실제 그런 관행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 없이 딸만 낳았기 때문에 이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당시 영국의 사회 계급 구조에 대한 지식이 도움됩니다. 왕족 다음의 최상위 계급인 귀족은 공작에서 남작까지의 호칭을 부여받습니다. 호칭은 장자에게 상속됐고, 아들이 없을 경우 이 호칭은 더는 쓸 수 없고 사라지게 됩니다. 귀족 아래에 젠트리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귀족과 마찬가지로 토지로부터 나오는 임대 수익에 의존해서 살았고 상업이나 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계층이었습니다.
광고
소설 속 베넷, 빙리, 다아시 가족은 비록 재산 규모는 천차만별이지만 모두 젠트리 계층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를 못마땅해하는 다아시의 이모는 백작의 딸입니다. 빙리의 여동생은 제인과 엘리자베스의 외가가 상업과 변호사 일에 종사한다는 것을 알고 멸시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부모가 모두 젠트리 계층이었기 때문에 이 계층의 삶에 익숙했고 주인공으로 삼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제인 오스틴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갈무리

영화 ‘오만과 편견’(2006) 스틸컷. 네이버 영화 갈무리

영화 ‘오만과 편견’(2006) 스틸컷. 네이버 영화 갈무리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한국에 상호관세 26%…트럼프, 무역질서를 파괴하다
탄핵심판 안 나온다는 윤석열…파면돼도 관저서 며칠 더 버티기?
오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그림판]
윤석열 선고 전야, 마지막 광장의 염원…“전원일치 파면하라”
도이치 주가조작 유죄 확정…김건희 재수사는
‘원피스’ 감독 “지브리를 더럽히다니, 챗GPT 용서하지 않겠다”
안창호 인권위원장 ‘4·3 추념식’ 불참…“부적절” 지적 잇따라
오늘 서울 전역 비상 경계…경찰 “불법 무관용” 재차 강조
펭귄도 ‘깜짝’ 놀란 트럼프 관세…사람 없는 남극 섬에도 부과
“불체자 추방” 전광훈당, 구로서 32% 득표…극우 급부상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