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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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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교육, 그 남루함과 발버둥의 잔혹극

고급 아파트를 무대로 학벌 쟁탈 벌이는 군상 그린 정아은의 ‘잠실동 사람들’
등록 2025-01-03 21:29 수정 2025-01-07 17:03
서울 송파구 잠실동.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송파구 잠실동. 게티이미지뱅크


정아은의 소설 ‘잠실동 사람들’은 2015년 서울 잠실에 거주하거나 그곳에 직장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잠실주공2단지 아파트를 재건축한 리센츠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초등학교 2학년 같은 반 친구들인 해성, 지환, 태민, 경훈 네 아이의 가족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이 서로 얽혀 있습니다. 해성 엄마 장유미는 학교운영위원으로 아이 교육에 누구보다 적극적입니다. 마흔 살로 네 아이의 엄마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리더 역할을 합니다. 남편 고성민은 K대 법대를 나왔고 판사로 3년간 근무한 뒤 지금은 대형 로펌에서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담당하는 변호사입니다. 한강 뷰가 있는 리센츠 로열 라인 로열층의 48평 아파트는 부유한 처가에서 마련해준 것입니다. 판사 사위를 원했던 장모는 성민의 미국 유학 비용도 전액 지원했습니다. 유미의 고민은 영어유치원을 3년이나 다닌 해성이 유명 영어학원 로피아에서 비기너 레벨에 머무는 것입니다.

 출신은 천차만별, 자식에 투사한 욕망은 획일

지환이는 등급이 더 낮았습니다. 지환이 엄마 박수정이 로피아 상담실장에게 조심스레 입학 방법을 묻자, ‘레벨 규정이 엄격해서 입학시킬 수 없다’는 단호한 답변이 돌아옵니다. 게다가 ‘초등 2학년인데 파닉스(영어글자를 읽기 위한 패턴영어) 가 안되는 경우는 이 동네에선 드물어요’라는 아픈 얘기까지 듣고 충격을 받습니다. 수정은 남해의 작은 섬 출신입니다. 악착같이 공부해서 경상도에서 가장 좋다는 국립대학 유아교육과를 나왔습니다. 남편 허인규는 같은 대학 공대 출신입니다. 결혼 뒤 시집 근처 불광동에 살면서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유치원 교사로 일하면서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남편과 맞벌이했습니다. 당시에는 지방 국립대가 요즘보다는 훨씬 인기가 있었다는 것으로 자존심을 지키려 하지만 자식만큼은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와 의사나 판검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수정은 빌라를 팔고 은행 대출을 받아 리센츠 33평 아파트에 전세로 들어왔습니다. 서른여섯 살로 네 아이 엄마 중 가장 어리고 형편이 어려워 주눅 들어 있지만 다른 엄마들처럼 아이를 교육하려고 기를 씁니다.

태민은 영어를 잘해서 로피아 최상위 등급인 아너스 레벨입니다. 태민 엄마 심지현은 아이를 국제학교로 전학시키거나 아예 국외 유학을 보내는 것까지 고려하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태민 아빠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하지만 태민 엄마는 그냥 ‘투자자’라고 얼버무립니다. 하지만 이 동네 아이들은 서로 각 집의 차를 다 꿰고 있고 이것으로 재산을 평가합니다. 태민 아빠가 벤츠, 아우디, 베엠베(BMW), 폭스바겐과 에쿠스까지 여러 대를 취미 삼아 갖고 있는 것이 알려지자 가장 부자라고 인정합니다. 대학을 나오지 않은 태민 아빠는 도박 사이트 운영자로 큰돈을 모았습니다. 지현은 엄마들 모임에서 밥도 잘 사고 선물도 자주 하지만 이게 아픈 지점입니다. 해성 엄마와 지환 엄마가 서로 상대방 남편을 치켜세워주는 척하면서 자기 남편 자랑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송파구 잠실동. 게티이미지뱅크


성판매 내몰린 길 건너 지하방 고학생

세 아이의 엄마들은 서로 교육 정보를 교류하면서 빈번히 만나는데 공통의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 담임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담임은 학부모 면담에서 해성이가 이해가 느리다면서 문제를 외워서 푸는데 원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니 사교육을 대폭 줄이고 엄마가 직접 봐주는 게 좋다고 권합니다. 아이가 똑똑하지 못하다거나 공부를 못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이지만 불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같이 있던 지환과 태민 엄마에게도 아이들이 ‘느리지만 순수하고 사교성이 좋다’라거나 ‘사고하는 건 느리지만 재치가 있어 인기가 있으니 연예인으로 키우는 것을 고려해보라’고 해서 이들의 속을 뒤집어놓습니다. 그날 담임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은 경훈이밖에 없습니다. 경훈 엄마에게 아이의 머리가 비상하고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니 국제중 진학을 준비해보라고 합니다.

경훈이 엄마 강희진은 내과 의사입니다. 의대 시절 공부를 잘해 수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레지던트 과정은 명문 대학 병원에서 마쳤고 대한민국 빅스리라 불리는 병원에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경훈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실어증 증상을 보이고 담임이 자폐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말까지 꺼내자, 희진은 자책감에 빠져 다니던 병원을 그만두고 친구가 운영하는 작은 병원의 페이닥터로 취직해 오후 2시까지만 일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지나치게 사교육을 시키면 오히려 부작용이 많다고 생각하던 터라 학원도 보내지 않고 집에 돌아와 아이를 직접 돌보았습니다. 다행히 아이가 치유되어 말을 시작했고 성적은 좋아졌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교육 갈등이 펼쳐집니다. 아이 담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해성 엄마는 급기야 엄마들을 조직해서 담임의 사과를 요구하고 등교 거부까지 몰아갑니다. 해성이네와 지환이네에서 일하는 가사도우미의 딸 이서영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서울 소재 H대학에 진학한 뒤 리센츠 건너편 빌라의 반지하에 살면서 고군분투하지만 생활비가 떨어지자 남자에게 몸을 파는 알바에 뛰어듭니다. 지금 만나는 상대는 지환이 아빠 허인규입니다.

서영의 집 맞은편 창문조차 없는 지하방에는 김승필이 이혼한 뒤 혼자 살고 있습니다. 승필은 명문 K대의 지방 캠퍼스 영문과 출신입니다. 결혼한 뒤 부부가 같이 통역대학원을 준비하다 아내만 합격하고 승필은 포기했습니다. 빛나는 통역대학원 졸업장을 손에 쥐고 활약하는 아내와 틈이 생기면서 결국 이혼에 이른 것입니다. 승필은 분교라는 것은 감춘 채 K대만 강조하고 대치동 유명학원 강사 출신이라고 이력을 속이면서 과외시장에 뛰어듭니다. 지환이와 해성이를 가르치면서 엄마들 마음에 들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이력이 허위라는 게 드러나면서 모욕을 당한 채 쫓겨납니다.

 투기와 교육, 어느 것이 먼저인가

저는 예전 칼럼에서 1970년대 무릉동(강남구 가상의 동네)을 배경으로 한 박완서의 ‘낙토의 아이들’과 2018년 서영동(영등포구 가상의 동네)을 그린 조남주의 ‘서영동 이야기’에 대해 쓴 적이 있습니다. 이 두 소설도 서울 개발 과정에서 아파트 투기와 교육의 관련성을 그리지만 강조점은 전자였습니다. 반면 이번 소설은 투기보다는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엄마들은(소설에서 아빠들은 엄마들만큼 교육에 극성이지 않습니다) ‘힘들어도 이 기간 이 악물고 공부하면 인생이 보장된다. 벌 수 있는 돈도, 남들에게 대접받는 정도도, 인생의 여유를 만끽할 수 있는 정도도 모두 졸업한 대학의 명칭에 달려 있다’고 믿고 매진합니다.

실제 잠실에 살면서 아이를 키웠던 작가가 자신의 경험과 폭넓은 취재를 통해 교육이 위대한 평등 기제(Great equalizer)가 아니라 불평등의 원천이자 부와 지위의 세습 수단이 된 씁쓸한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 소설입니다. 게다가 이 소설의 무대인 잠실동 리센츠 아파트는 박완서가 그린 1970년대 강남의 아파트를 허물고 2000년대에 재건축된 곳입니다. 세 소설을 함께 읽으면 서울의 교육과 투기의 씨줄과 날줄이 시기별·공간별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흥미롭게 비교할 수도 있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소설가 정아은의 생애

소설가 정아은. 류우종 기자

소설가 정아은. 류우종 기자


정아은은 197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작가입니다. 세종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은행원, 통번역가, 컨설턴트, 헤드헌터 등 다양한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2013년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맨얼굴의 사랑’ 등 여러 편의 소설과 ‘전두환의 마지막 33년’을 포함한 비소설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잠실동 사람들’은 2015년 한겨레출판에서 간행됐습니다.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정아은 작가는 2024년 12월17일 49살의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습니다. 이번 칼럼은 훌륭한 작가를 떠나보낸 아쉬움을 담아 썼습니다.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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