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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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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는다

프랑코 철권통치부터 2018년 여성 총파업까지… 스페인 현대사 질곡과 얽힌 돈과 성 이야기
등록 2024-08-16 20:35 수정 2024-08-22 15:00
스페인의 여성들이 2018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성차별, 가정폭력, 성별 임금 격차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갈무리

스페인의 여성들이 2018년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성차별, 가정폭력, 성별 임금 격차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위키피디아 갈무리


스페인 마드리드 시내 편의점에서 일하는 삼십 대 여성 알리시아는 아침 일찍 출근하며 텅 빈 아토차역 광장을 바라봅니다. 멀리서 보라색 점들이 내려오고, 손팻말을 든 여성도 보입니다. 오늘 무슨 일이 있다고 티브이(TV)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하면서도 곧 잊어버립니다. 지금부터 온종일 지루하게 편의점에서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50년 시차를 두고 그리는 두 여성의 삶

이날은 2018년 세계 여성의 날입니다. 스페인 여성들은 ‘우리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성차별, 가정폭력, 성별 임금 격차에 반대하는 총파업을 벌였습니다. 여권을 상징하는 보라색 옷을 입은 수백만 명의 여성이 참여한 이날 시위는 전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마리아는 1970년대 이래 독재정부 반대, 연금개혁, 이라크 전쟁 반대, 노동 총파업 등 수많은 시위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 젊은 여자아이들이 너무 흥분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하지만 스스로도 흥분을 떨칠 수 없습니다. ‘나는 칠십 평생 오늘을 위해 살아왔어, 너희들을 만나고 너희와 함께 걸으려고 말이야.’

엘레나 메델의 소설 ‘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에는 이들이 살아온 경로가 1969년 코르도바에서 2018년 마드리드까지 시간과 공간을 지그재그로 넘나들며 배치돼 있습니다. 알리시아와 마리아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나이, 경험, 사는 방식까지 다 다르지만, 가난한 여성 노동자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사가 결국엔 돈의 문제라는 것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습니다.

1968년 스페인 남부 도시 코르도바의 십 대 소녀 마리아는 부모와 형제를, 그리고 갓 태어난 딸 카르멘을 남겨두고 마드리드로 떠납니다. 마리아가 결혼하지 않은 채 유부남인 동네 남성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자 마리아의 아버지가 마드리드에 사는 동생네로 마리아를 보내버린 것입니다. 마리아는 삼촌 집에 살며 돈을 벌어 카르멘을 데려올 생각이지만 식모 일이나 건물 청소로 먹고사는 신세라 카르멘을 위해 약간의 돈을 부쳐주는 것 이상은 하기 어렵습니다. 카르멘은 멀리 떨어져 있는 마리아에게 정을 느끼지 못하고 엄마와 함께 사는 것을 거부합니다. 심지어 1984년 결혼을 앞두고 마리아에게 자신의 결혼식에 절대 오지 말라고 통보합니다. 이후 마리아와 카르멘의 연락은 끊어지고, 마리아는 동생 치코를 통해 뜨문뜨문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알리시아는 카르멘의 큰딸입니다. 한때 아빠의 사업이 번창하면서 유복하게 살았습니다. 코르도바에 큰 레스토랑을 네 개나 열었고, 수영장이 딸린 아파트를 포함해서 집도 여러 채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빠가 갑자기 죽으면서 이들 가족의 삶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빠가 운영하던 레스토랑들은 허울만 좋은 것이었습니다. 사업이 어려우면 새로운 사업으로 덮으면 된다는 이상한 금융 논리에 따라 은행 대출을 거듭하며 확장했지만 누적된 부실을 엉망진창인 회계장부로도 가릴 수 없는 순간이 닥쳤습니다. 은행은 더는 돈을 빌려주길 거절했고 고리대금업자들은 빚을 갚으라고 아우성쳤습니다.

이 순간 아빠는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것으로 하면 보험금으로 빚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차로 나무를 들이받습니다. 그렇게 해도 죽지 않자 그 나무에 목을 맵니다. 카르멘은 레스토랑과 집을 다 팔아 빚을 갚고 가난했던 출발점으로 돌아갑니다. 알리시아는 대학에 진학하지만 마치지 못하고 카페와 상점의 알바를 전전합니다. 특별한 꿈은 없습니다. 엄마의 엄마인 마리아가 마드리드에 산다는 것을 치코 삼촌(치코는 엄마의 외삼촌이라 알리시아에게는 친척 할아버지지만, 알리시아는 엄마와 마찬가지로 그냥 치코 삼촌이라고 불렀습니다)에게 들어 알고 있지만 굳이 찾을 생각은 없습니다.

결국은 돈 때문이다

메델은 알리시아와 마리아의 입을 통해 지속해서 돈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마리아는 카르멘으로부터 결혼식에 오지 말라는 얘기를 듣던 그날 슬픔 속에서, ‘결국은 돈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있었으면 자신과 동생들이 학교를 그만두지도 않았을 것이고, 돈이 있었으면 집안일을 돕기 위해 돌아다니다 그 남성, 즉 카르멘의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돈 때문에 집과 딸을 떠나야 했고, 돈 때문에 자신의 딸이 아닌 남의 집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지금 사는 집과 가진 것들은 모두 자신의 돈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뿐이고, 해보지 못한 모든 것은 돈 때문에 하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시위하는 데도 돈이 필요하다’고 탄식합니다.

알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가난한 동네의 잡상인이건 대형 로펌의 대표 변호사이건 상관없다’거나 ‘별 볼 일 없는 인간은 돈으로도 어쩔 수 없다’ 따위의 말을 하지만, 알리시아는 이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돈만 있으면 별 볼 일 없는 걸 감출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척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살한 아빠가 보고 싶지만, 정말 그리운 것은 아빠가 아니라 ‘돈 때문에 살아보지 못한 삶, 일할 필요도 없고 냉장고는 가득 차 있고,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그런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소설의 또 한 축은 여성의 삶입니다. 마리아가 카르멘을 낳은 뒤 그 남성은 자신의 가족과 함께 멀리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직장도 바꿨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골목이 무서워 집까지 뛰어야 했습니다. 조합 모임에서 자신은 입을 다문 채 연인 페드로가 마리아의 논리와 아이디어를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것인 양 말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봐야 했습니다. 수십 년을 사귄 뒤 페드로가 결혼을 요청하지만 마리아는 끝내 거절하고 자신만의 삶을 유지합니다. 지역 여성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버텨나갑니다. 알리시아는 실직 뒤 힘든 생활 속에서 난도가 청혼하자 거절하지만, 곧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베푸는 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결혼을 받아들입니다. 이 삶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별다른 돌파구는 없습니다. 편의점에서 매일매일 일상을 반복하고 가끔 일탈하면서 자포자기한 채 살아갑니다.

소설은 마지막에 2018년 여성의 날 시위 현장으로 돌아옵니다. 알리시아가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거리와 지하철역은 시위대로 넘쳐납니다. 뭔가에 홀린 듯 손팻말과 풍선을 든 여자아이들의 행렬에 합류합니다. 인파 속에서 어지러워 쓰러지자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밉니다. 한 나이 많은 여성이 함께하자며 권하는데, 두 여인은 서로 상대의 삐뚤어진 턱에 눈길이 갑니다. 순간 ‘혹시…’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역사적인 스페인 여성의 날 총파업

이 소설은 불과 200쪽 남짓으로 짧습니다. 하지만 프랑코의 독재와 실각, 사회당의 선거 승리, 경제 위기, 그리고 여성 총파업까지 스페인의 역사적 매듭 매듭에 돈과 성의 문제를 엮어냅니다. 묵직하지만 비약도 과장도 없습니다. 시간과 장소를 달리한 2024년 한국의 독자들도 마치 우리 일인 양 읽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간 제가 소개한 많은 작품이 장르소설 성격이 강했지만 ‘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은 문예소설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돈과 소유 그리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권력관계를 어떤 장르소설보다도 더 분명하고 무겁게 담고 있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엘레나 메델. 엘레나 메델 누리집 갈무리

엘레나 메델. 엘레나 메델 누리집 갈무리


엘레나 메델의 소설 ‘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은?

엘레나 메델(Elena Medel)은 1985년 스페인 코르도바에서 태어나 마드리드에서 활동 중인 작가입니다. 2002년 16살에 시집 ‘나의 첫 비키니’로 등단한 이래 여러 편의 시집을 발표했고 2015년 ‘로에베 젊은 시인상’을 받았습니다. 2020년 첫 소설 ‘소유에 관한 아주 짧은 관심’(Las Maravillas)을 출간하고 ‘프란시스코 움브랄 상’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15개 언어로 번역됐는데, 한국어판은 성초림이 번역해 2023년 마르코폴로 출판사에서 출간됐습니다. 메델은 19살에 시 전문 출판사 라 베야 바르소비아를 설립해 스페인어 문화권의 저명한 출판사로 일궈냈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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