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에거스의 소설 ‘왕을 위한 홀로그램’의 무대는 2010년 봄 사우디아라비아 홍해 연안의 킹압둘라경제도시(KAEC)입니다. 압둘라 왕이 2005년 야심 차게 추진 계획을 발표한 6대 메가 프로젝트 중 하나인 곳입니다. 주인공 앨런 클레이는 이 도시에 미국 아이티(IT) 기업 릴라이언트사의 첨단 화상회의 시스템을 팔기 위해 왔습니다. 그가 11일간 압둘라 왕이 참여하는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지만, 소설이 겨냥한 곳과 시기는 이를 훌쩍 뛰어넘습니다. 미국인들의 삶에 녹아든 30년간의 세계화와 그 역풍이 실제 주제입니다.
54살의 앨런은 릴라이언트 직원도 아니고 IT 전문가도 아닙니다. 발표에 필요한 시스템 구축과 실제 작동은 미국에서 함께 온 릴라이언트의 젊은 테크니션들이 맡을 것입니다. 릴라이언트 경영진은 자사의 시스템이 세계 최고 수준의 홀로그램 기술을 구현하기 때문에 경쟁자가 없다고 자신하면서도 사우디에서는 기술력만으로 사업자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불안감을 갖고 있습니다. 릴라이언트의 부사장 에릭 잉볼이 사우디 왕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을 찾다가 앨런과 컨설팅 계약을 한 것입니다. 그는 과거 프로젝트를 통해 압둘라 왕의 조카 잘라위와 친하게 된 사이입니다.
사실 앨런은 여러모로 곤궁한 상태입니다. 컨설팅 회사 대표를 자처하지만 사무실도 없이 집에서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나 보면서 빈둥대는 파산 상태의 실업자와 다름없습니다. 수중의 돈은 다 떨어졌고, 여기저기에 진 빚이 많습니다. 아내와는 오래전에 이혼했고 하나밖에 없는 딸 키트는 등록금이 비싼 대학에 다니는데, 학비를 더 대줄 수 없어 휴학해야 할 처지입니다. 집이라도 팔려고 내놓았지만 낡고 냄새나는 집은 팔릴 기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번 프로젝트는 더더욱 중요합니다. 압둘라가 릴라이언트와 계약을 맺기만 하면 커미션으로 수백만달러를 챙길 수 있고, 그러면 골치 아픈 문제는 모두 해결될 것입니다.
앨런은 대학을 중퇴하고 풀러 브러시에 세일즈맨으로 입사한 뒤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취업 한 달 만에 부모 집에서 독립할 수 있었고, 여섯 달 뒤에는 새 차를 샀고,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돈을 벌었습니다. 자전거 업체 슈윈으로 옮긴 뒤에도 실력을 발휘했고 지역의 소매점에서 지역본부로 그리고 시카고 본사의 전략 부서로 빠르게 승진했습니다. 세계화의 깃발이 높게 휘날리던 1990년대였습니다. 제너럴일레트릭의 최연소 시이오(CEO) 잭 웰치의 ‘제조업은 가능한 한 가장 싼 조건을 찾아 영원히 지구를 맴돌 수밖에 없다’는 선언에 따라 모든 기업이 세계로 나가던 시절입니다. 앨런은 슈윈의 경영자로서 노동조합이 없는 지역을 물색했고, 중국과 대만에 하청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제조 기반을 옮기려고 헝가리 부다페스트 자전거 공장을 인수하기까지 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실패했고 앨런은 회사를 그만둔 뒤 컨설턴트로 변신해서 활동해왔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몇 년이 지나니 찾는 고객이 거의 없습니다.
앨런은 아버지 론과도 잘 지내지 못합니다. 론은 평생 매사추세츠의 구두 공장인 스트라이드 라이트의 노동자였고, 자신이 노동조합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 회사는 전성기 때 매일 구두 5만 켤레를 만들었고 노동자에게 훌륭한 복지를 제공했습니다. 론이 두둑한 연금을 보장받고 은퇴한 뒤 이곳에도 세계화의 파도가 덮쳤습니다. 스트라이드는 1992년 노동조합에 적대적인 켄터키로 공장을 옮겼고 5년 뒤에는 생산 기지 전체를 타이와 중국으로 이전했습니다. 이런 회사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론은 아들 앨런이 슈윈에서 했던 일도 마찬가지라 여기며 앨런에게도 분노를 감추지 않습니다.
소설에 이런 표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론과 앨런의 삶은 각각 뉴딜과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의 산물입니다. ‘삼차원 홀로그램 회의 시스템을 팔려고 압둘라 왕을 만나러 왔다’고 떠벌리는 앨런에게 론은 한심하다는 듯 비난합니다. ‘너 같은 놈들이 자기 이익 때문에 미국 내의 공장을 폐쇄해서, 장난감, 전자제품, 가구, 자전거 온갖 물건이 아시아에서 몰려오고 있다고. 그들은 실제 물건을 만든다고, 우리가 웹사이트와 홀로그램 같은 걸 만들 때.’
급기야 캘리포니아에 거대한 다리를 놓는데, 중국에서 만들고 미국에 설치합니다. 또 세계무역센터 신축 건물 전체에 설치될 특수 유리 공급에서도 미국 회사는 밀립니다. 미국 회사가 폭발에 견디는 새로운 유리를 발명했지만 그 특허 사용권을 산 중국 회사가 유리를 제작해서 납품합니다. 9·11 비극의 현장에 미국의 자부심과 회복력을 다시 세우려고 하지만 그 물건의 대부분은 중국이 만들고 있습니다.
제 소개가 너무 딱딱한 느낌이 드시겠지만 이 소설은 세계화의 역풍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경쾌하고 유머러스합니다. 똑똑하지만 별 할 일이 없는 청년들의 좌절,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개방을 선전하지만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경제도시의 현실, 술은 엄격하게 금지되지만 또 특권층 주변에 흔한 와인과 위스키와 밀주 등 사우디의 생생한 모습이 앨런의 모험을 통해 드러나는 것도 이 소설을 더 흥미롭게 합니다.
벽돌 두께의 경제학책과 역사책을 읽으며 미국 제조업의 쇠락을 경험하고 교훈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만큼 생각할 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데이브 에거스는 1970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작가, 언론인, 출판인입니다. 일리노이대학을 다니던 중 부모가 모두 사망해 학업을 중단하고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주했습니다. 1994년 ‘살롱닷컴’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마이트’ ‘맥스위니’ 등 잡지를 창간했습니다. 30살에 쓴 회고록 ‘비틀거리는 천재의 가슴 아픈 이야기’로 데뷔했습니다. 베스트셀러이자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른 ‘왕을 위한 홀로그램’으로 에거스는 유명 작가가 됐습니다. 이후 50권에 가까운 소설, 동화, 논픽션을 집필하거나 편집했고, 미국도서상 등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왕을 위한 홀로그램’은 2012년 맥스위니 출판사에서 출간돼 그해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정영목이 번역한 한국어판은 2018년 문학동네에서 출간됐습니다. 2016년에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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