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르 바쉐르의 소설 ‘조직된 한패’의 시대적 배경은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등 남유럽 국가에서 벌어진 재정위기가 정점에 이른 2012년입니다. 국제 금융계는 이들 국가의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피그스(PIGS)라는 모멸적인 단어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파리 역시 어수선합니다. 소설에서 유럽 금융계의 해결사 제레미가 프랑스 경제부 장관 비서실장 베르트랑에게 쏘아붙입니다. “10년 전엔 우린 독일처럼 되고 싶었지. 근데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짝이 될 판이라고.” 여기서 10년 전이란 2002년 유로화 지폐와 동전이 통용되면서 유로존 각국의 화폐를 완전히 대체한 것을 가리킵니다.
사십 대 초반의 제레미와 베르트랑은 대학 친구입니다. 이들 외에도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 폴만팍스의 유럽지사장 세바스티앙, 글로벌 대기업의 퍼블릭 릴레이션을 대행하는 ‘퓌블릭’사의 컨설턴트 바네사, 경제지 ‘비즈니스 데이’의 고참 기자 클라라, 학창 시절의 꿈을 뒤로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가는 앨리슨, 그리고 15년간 사라졌다가 홀연히 다시 나타난 미스터리의 인물 앙투안까지 프랑스 교육계의 정점에 있는 그랑제콜 파리경영대학(HEC Paris) 동창 일곱 명의 이야기로 소설이 구성돼 있습니다. 클라라와 베르트랑, 앨리슨과 제레미는 부부이고, 바네사는 세바스티앙을 짝사랑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세바스티앙은 베르트랑의 아들 테오의 대부일 정도로 서로 가까운 사이입니다. 또 이들은 각 분야 엘리트로서 서로 도움을 주는 끈끈한 학벌 네트워크의 일원입니다.
폴만팍스의 회장 캠플린은 파리에서 근무 중인 세바스티앙을 미국 뉴욕 본사로 호출합니다. 맨해튼 남부 금융지구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로 극도로 혼잡한 상태입니다. 웃통을 벗은 남성들과 속옷만 입은 여성들이 ‘우리가 99%다’를 외치며 아프리카 타악기 음악에 맞춰 춤추고 있습니다. 경찰이 차량 진입을 막아 걸어가는데, 세바스티앙의 이탈리아산 명품 정장과 400만원이 넘는 고급 가죽 구두는 시위대와 어색한 대조를 이룹니다. 힘들여 폴만팍스에 도착한 세바스티앙에게 비밀 임무가 주어집니다.
2001년 유로존 가입을 희망하던 그리스는 넘기 힘든 난관이 있었습니다.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따르면 회원국 정부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60%를 넘지 말아야 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부채 감소 계획을 제시해야 할 뿐 아니라 상당히 강한 제재를 받게 됩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 기준을 충족할 수 없었던 그리스 정부에 폴만팍스가 다가갔습니다. 통화 스와프를 통해 부채를 은폐할 수 있다는 묘안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폴만팍스의 제안을 따랐고 한동안 아무런 일이 없던 것처럼 진행됐지만, 그리스에서 재정위기가 발생하면서 그리스의 회계분식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이 과정에서 폴만팍스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 전세계가 분노했습니다. 캠플린 회장은 세바스티앙에게 관련된 극비 자료를 넘기며, 누구와도 상의하지 말고 직보하라면서 사태를 수습하라고 지시합니다. 성공하면 폴만팍스 글로벌 대외협력 분야 대표로 승진시켜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최우수논문상을 받고 그랑제콜을 졸업한 베르트랑은 로스차일드 은행에 특채됐고, 몇 년 뒤 새로 취임한 경제부 장관이 보좌관을 찾을 때 로스차일드는 베르트랑을 추천했습니다. 은행이 추천한 보좌관을 채용하는 것은 경제부 장관의 오랜 전통입니다. 그랑제콜 인맥을 활용하고 정부와 재계의 관계를 꿰뚫어 본 베르트랑은 보수 정부와 진보 정부를 넘나들며 15년간 초고속으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장관,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재계 실력자들을 뒤치다꺼리하는 처지에 짜증이 올라오기도 합니다. 심지어 친구인 세바스티앙한테도 무시당하는 느낌입니다. 유럽 재정위기 여파가 프랑스를 덮치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는데, 정작 사고를 친 은행장들은 선거에서 지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구제하라고 큰소리칩니다.
클라라도 답답한 처지입니다. 신문사가 대기업에 인수되자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몰아쳤습니다. 정규직 기자는 비정규직이 됐고, 글의 대가는 기자 급여 대신 기고자들의 원고료로 지불됐습니다. 취재는 통신사 기사를 전재하는 것으로 대체됐고, 외신은 국외 사이트 정보를 날림으로 번역해서 썼습니다. 금융기관과 대기업 경영자들의 눈 밖에 날 만한 기사는 편집국장이 다 킬해버렸습니다. 이들이 눈살을 찌푸리면 광고는 사라지고 단체로 구독이 취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클라라에게 폴만팍스의 그리스 부채 분식회계에 대한 결정적 제보가 전달되고 고민에 빠집니다. 이렇게 프랑스의 엘리트 일곱 친구들이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 소설은 익명을 쓰고 있지만 폴만팍스는 누가 봐도 골드만삭스입니다. 골드만삭스는 현실에서 앞서 말한 그리스 국가부채를 은폐하는 통화 스와프 논란으로 전 유럽을 들끓게 했던 전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 정부는 국외에서 달러로 채권을 발행하고 이것은 당연히 그리스의 부채로 계산됩니다. 그리스 정부는 국내에서 지출하기 위해 달러 자금을 유로화로 바꿔야 하는데, 골드만삭스는 일반적인 환전 대신 통화 스와프라는 파생상품을 이용하라고 권했습니다.
이 상품은 달러로 들어온 채권과 이후의 이자 지급과 상환을 모두 유로화로 바꿔주는 구조인데, 특이하게 현실 환율이 아니라 유로화를 매우 약하게 평가한 가상의 환율을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유로 금액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상환 시점에 훨씬 더 많은 유로 금액으로 갚아야 합니다. 문제는 이 차액이 사실상의 국가부채임에도 장부 밖에서 처리되고 공식적인 국가부채에서 누락됐다는 것입니다. 유럽연합의 엄격한 부채 기준을 피해 추가로 부채를 늘리는 묘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소설에서 묘사되듯 불법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유럽통계청(Eurostat)의 전문가들은 파생상품과 관련된 자산과 부채를 실제 가치로 평가할 것을 주장했지만, 브뤼셀에 모인 유럽의 정치인들이 더욱 재량적인 정책을 펼 수 있도록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에 글로벌 거대 금융기관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골드만삭스(소설에서 폴만팍스)와 그리스 정부가 맺은 계약이 불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유사한 계약이 다른 유럽 국가와 금융기관 사이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이 국가부채의 실질을 고의로 은폐한다는 점에서 또 금융기관이 정상적인 수준 이상의 높은 수수료를 챙겼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로존 재정위기는 21세기에 벌어진 중요한 금융위기였음에도 많은 사람이 그 몇 년 전 미국에서 촉발된 서브프라임 위기의 부속물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룬 탐사물이나 소설과 영화도 거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직된 한패’는 읽어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프랑스 정계, 재계, 언론계의 모습을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플로르 바쉐르의 소설 ‘조직된 한패’
플로르 바쉐르는 1973년 프랑스 안시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영화감독입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프랑스 엘리트 학교인 그랑제콜 출신들의 탈선을 다루는데, 그 역시 그랑제콜 그르노블 정치대학과 파리 경영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이후 뉴욕과 파리에서 마케팅과 컨설팅 비즈니스에 종사하다 전업 작가로 변신했습니다. 에드워드 스노든, 에런 스워츠 등에 대한 언론 기고문과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자전적 소설 ‘도시의 소녀’(2006)로 데뷔했고 ‘조직된 한패’(2013)는 그의 세 번째 소설입니다. 한국어판은 권명희의 번역으로 2016년 밝은세상에서 출간됐습니다. 바쉐르는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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