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역사소설 <뱅크>는 1876년 1월 개성상인 장훈이 자신의 집에서 한양과 인천을 대표하는 상인 홍도깨비, 서상진과 밤새워 통음하며 울분을 토하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 전해 가을 일본이 인천 영종진을 침범해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고 무기를 노획한 뒤 성을 불 지른 운요호 사건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 상인 셋은 조선을 집어삼킬 파도가 몰려온다면서, 나라 밖 장사꾼들과 제대로 맞싸움이라도 해야 억울하지 않겠다고 탄식합니다. 우선 한양·개성·인천의 상인이 합심해서 함께 돈을 모아 운용할 기관을 만들자는 결의를 다집니다. 아무도 ‘은행’이라고 부르진 않았지만(그런 단어 자체도 몰랐습니다), 그들이 꿈꾼 것은 은행이었습니다.
소설은 조선 상인들의 경쟁과 갈등을 한 축으로, 민족은행 설립을 추진하는 조선인들과 이를 봉쇄하려는 일본 은행들의 싸움을 다른 한 축으로 전개됩니다. 시간 배경은 1876~1904년 격동의 세월에 걸쳐 있습니다. 1877년 서상진 상단 박만식의 아들 진태가 제 아비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오해해 장훈의 삼밭과 집에 불을 놓아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장훈은 아들 철호와 최인향이라는 소녀를 구하고 자신은 불에 타 죽습니다. 인향은 왕실의 신임을 받는 젊은 관리 최용운의 딸로 이들 부녀는 장훈의 집을 방문 중이었습니다. 최용운은 박규수 문하로 쇄국에 반대하고 개항과 국제통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자강 없는 개항으로 외세만 이익을 챙길까 심려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조선 상인들이 일본과 서양 상인과의 경쟁에서 우위에 서도록 돕는 것이 관의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서상진, 장훈, 홍도깨비 등과 깊게 교류합니다.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습니다. 철호, 진태, 인향은 열 살의 동갑내기로 이들의 삶은 이후 고비마다 얽히게 됩니다.
고아가 된 철호는 떠돌다 동생 현주도 잃어버리고 1891년 홀로 인천으로 와서 서상진의 수하에 들어가 진태와 경쟁합니다. 서상진 상단에서 독립한 권혁필이 일본 쪽과 협력하면서 부상해 서상진과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최용운이 인천부사로 취임하면서 인향은 다시 한번 철호, 진태를 만나게 됩니다. 그간 인향은 일본 유학을 통해 세계정세와 문물에 대한 지식을 쌓아왔습니다. 현주는 서양 노래를 하는 가수가 되어 인천에 진출해 오누이가 다시 만납니다. 청년이 된 철호, 진태, 인향, 현주 사이의 복잡한 연정과 질투가 펼쳐집니다.
이 시기 인천은 개항장으로서 일본, 청, 서양인의 활동이 두드러진 공간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1876)에서 제물포조약(1882)까지 일련의 불평등 조약으로 일본 상인은 별 제약 없이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1876년 7월 조일수호조규부록이 체결돼 일본 화폐의 한국 유통이 처음 허용됐고, 일본인은 조선 동화(銅貨)를 일본에 반출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 은행들은 일본 상인의 무역 확대와 금융 지원을 위해 경쟁적으로 개항장에 지점을 설치했습니다. 인천 일본 영사관 앞에서 일본의 제일은행, 제십팔은행, 제오십팔은행 등 세 은행의 지점이 나란히 영업해 이 거리는 조선 최초의 은행가로 불렸습니다. 세 은행 옆에는 청국인 소유의 스튜어드호텔, 헝가리인이 운영하는 꼬레호텔, 그리고 일본 상인들의 거점 대불호텔이 들어서서 성황을 이뤘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로는 대불호텔이 단연 선두가 됐습니다.
진태는 서상진을 떠나 권혁필 진영으로 옮아갑니다. 경쟁이 격화하면서 서상진은 살해당하고, 인향과 철호는 상선을 구매해 운송업에 뛰어들지만 선박 사고가 발생해 철호는 죽은 것으로 알려집니다. 최용운은 인천부사를 사임하고 한양으로 상경합니다. 금광왕 이준봉과 함께 대한제국 은행 설립을 추진하라는 고종의 밀명에 따른 것입니다. 이준봉은 왕실 재정을 책임지는 내장원경 및 오늘날 조폐공사 사장에 해당하는 전환국장에 더해 여러 관직을 함께 가진 당대 최고 실력자였습니다.(실존인물 이용익에 기초해 작가가 창조한 인물입니다.)
갑오개혁에 따라 세금을 물품이 아닌 화폐로 징수하는 조세의 금납화가 은행 설립의 핵심 배경 중 하나입니다. 민간에서 화폐 사용이 보편화되고, 세금 납부로 정부에 모여든 자금이 다시 민간으로 환류돼야 하는데 은행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외국에서 차관을 도입해 국고를 관리할 은행을 설립하려고 계획했습니다. 조선은행(1896), 한성은행(1897) 등이 시도됐지만 해관 책임자였던 영국인 존 브라운이 반대하고, 러시아·프랑스 등도 차관 제공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이들 은행은 모두 미미한 존재에 그쳤습니다.
이준봉과 최용운은 몇 년간의 준비를 거쳐 1899년 1월 청계천변에 본점을 둔 대한천일은행을 설립했는데 상인들의 참여를 적극 독려했습니다. 인천과 개성의 상인을 중심으로 지점을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권혁필의 2인자 박진태는 인천지점장으로 선임됐고, 죽은 줄 알았던 장철호는 개성에서 은밀히 활동하다 개성지점장 대리로 등장했습니다. 은행 설립을 돕던 최인향은 감사로 취임해 이들 셋의 인연은 다시 이어집니다.
이준봉은 대한천일은행을 민간은행이 아닌 중앙은행으로 설립하려 하지만 이사로서 은행을 실질적으로 경영한 최용운은 일본의 방해와 자본 부족을 고려해 먼저 민간은행으로 설립하고 이를 디딤돌 삼아 중앙은행으로 나아가자는 단계론을 펴왔습니다. 왕실은 자금 지원에 더해 전국의 세금을 대한천일은행에 납부하도록 조처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천일은행은 조기에 조선인들 사이에 인지도를 높이고 안착할 수 있었습니다.
더 나아가 중앙은행을 준비하는 데 일본의 방해는 노골적입니다. 일본제일은행은 권혁필, 박진태를 통해 은밀히 대한천일은행 합병을 추진했을 뿐 아니라, 1902년에는 일본제일은행권을 발행해 사실상 한국의 발권 업무를 자임했습니다. 대한제국은 중대한 주권 침해 행위를 묵인하지 않고 곧바로 제일은행권 금지 훈령을 발표하지만 일본의 압력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한제국 중앙은행 설립과 중앙은행권 발행을 위한 마지막 싸움이 벌어집니다. 권혁필과 박진태 등 악한들은 함정에 빠져 처벌받습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중앙은행 설립도 무산됩니다. 최용운은 살해되고 이준봉은 일본에 끌려갑니다. 조선인 상인과 은행가들은 권선징악이 아니라 징선징악 되어 모두 패자가 됩니다. 우리 모두 아는 안타까운 근대사의 한 장면입니다.
인천에 가면 일본의 세 은행 건물과 대불호텔이 보존되거나 재건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청계천변의 대한천일은행 본점과 인천 지점 건물은 사라진 채 그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만 쓸쓸히 남아 있습니다. <뱅크>는 총 세 권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이지만 저자 특유의 경쾌한 구성으로 속도감 있게 즐길 수 있으니 읽어보시고, 기회가 되면 역사의 현장도 둘러보길 권합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김탁환은 1968년생 소설가입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카이스트(KAIST) 교수로 재직하다가 섬진강가에 집필실을 마련하고 전업 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다양한 형식의 소설과 산문집을 발표했고 특히 역사소설로 유명합니다. <나, 황진이> <대장 김창수> 등 작품 여러 편이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로 제작됐고, 2016년 요산김정한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일반인이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동시에 경제와 금융 종사자가 소설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연재입니다. 2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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