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여곡절에 따라 엔화 역시 참으로 독특한 길을 걸어왔다. 요컨대 ‘재난이 발생한다 → 엔화가 초강세를 보인다 → 경기가 침체한다 → 국제사회의 양해를 구한다 → 엔화 가치를 억지로 떨어뜨린다’의 경로.
고베 대지진(1995년) 이후 역플라자합의(G7 국가들의 엔화 약세 용인)가 그랬다. 동일본 대지진(2011년) 이후 아베노믹스 역시 10년 가까이 엔화 약세(엔저)와 완화적 통화정책을 목표 삼았다. 엔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저금리로 유동성을 공급하면 나아질 듯했다. 무제한 양적완화 같은 극단적인 통화 완화 정책도, 원조는 일본이다. 다만 별별 통화정책으로도 일본 경제는 눈에 띄게 좋아지지 못했다.
2022년 4월21일 현재 엔은 달러당 128~129엔에 거래된다. 20년 만에 엔 가치는 가장 낮은 수준으로 하락했다. 바라 마지않던 그 엔저 앞에 일본의 표정은 어둡다.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은 “어느 쪽이냐 하면 ‘나쁜 엔저’이지 않나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완화적 통화정책의 상징 같았던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마저 “급격한 엔화 약세는 경제에 마이너스”라고 말했다. 엔저만 나쁠 순 없다. 문제는 엔저를 둘러싼 배경과 환경이다. 일본 경제다.
엔저의 배경 자체가 코로나19 이후 홀로 성장 추세를 회복하지 못하는 일본 경제에 있다. 미국이 2021년 5.7% 경제성장을 이룬 반면 일본은 0.9% 성장률을 기록했다. 세계 각국이 인플레이션을 걱정하며 금리를 올리는데, 일본에는 쉽지 않다. 가뜩이나 회복이 더딘 경제가 더 둔화할 테니까. 이런 금리 차이는 엔화 가치를 낮춘다. 엔저의 이점인 수출을 통한 경기회복마저 지지부진할 거로 본다. 일본 제조업 기업 공장 4분의 1이 해외로 이전한 상태다. 외려 엔저에서 비롯한 수입 물가 상승이 가뜩이나 값이 오른 식료품·원자재·에너지 비용을 높여 일본 내 기업의 부담을 키운다. 소비자 부담도 커진다. 10엔짜리 국민과자 ‘우마이봉’마저 45년 만에 12엔으로 값을 올렸다.
엔의 미래, 섣부른 전망은 금물이다. 세계경제가 침체하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전자산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다시 엔고를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다만 급격한 엔저를 둘러싼 2022년 봄의 혼란은 ‘낙수효과 없는 완화적인 통화정책만으로는 안정적인 경제를 만들 수 없었다’는, 아베노믹스 10년에 대한 일본 내부의 반성을 남겼다. 우리도, 세계경제도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방준호 기자 whor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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