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훅 보내기엔 아까운 그릇

등록 2013-07-30 14:24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욕심에는 끝이 없어요. 매주 마감 압박에 시달리는 지금보다는 1년에 4번만 중간·기말 시험을 보면 됐던 대학생 시절이, 취업 준비로 각종 스펙을 따야 했던 대학생 시절보단 대학시험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됐던 중·고딩 시절이, 성적이 1~50등으로 친절하게 매겨지던 중·고딩 시절보다 수·우·미·양·가로 대충 나뉘던 초딩 시절이, 학교에서 급식 먹던 초딩 시절보다는 놀이터에서 흙 파먹던 유치원 시절이, 사회생활의 스트레스를 받는 유치원 시절보다 엄마 곁에서 먹고 자던 갓난쟁이 시절이 더 행복했던 것 같아요. 이러다 아예 엄마 뱃속으로 들어갈 기세예요.

그런데 행복은 나이순이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요.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이 17~85살 2만3천여 명의 행복도를 조사했더니, 가장 행복한 나이는 23살과 69살이었대요. 나이가 어릴수록 행복한 게 아녔어요. 행복도 수치는 20살과 70살 사이에서 U자형을 그리는데, 인생에 대한 실패로 불안감을 느끼는 50대 중반이 가장 바닥이래요. 다행히 아직 최고로 불행한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행복의 절정이 한 번은 지나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서글퍼져요. 이제 다시 행복해지려면 30년 넘게 기다려야 해요. 악.

 

역시 한국에서 행복은 핏줄 따라 가요. 로열패밀리가 되면 젊으나 늙으나 행복할 수 있어요.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7월25일 신세계 총수 일가가 운영하는 빵집 계열사에 부당 지원을 해온 혐의를 받고 있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을 검찰에 고발하지 않기로 결정했어요. 대신 월급사장인 허인철 이마트 대표와 신세계그룹 임원 2명만 검찰에 넘기기로 했어요. 지난 5월 검찰이 공정위에 고발을 요청할 때부터 정 부회장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래요. 경제개혁연대는 이에 대해 “정용진 부회장만 사법처리 못하는 이유를 밝히라”고 촉구하고 나섰어요. 그러나 모두들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어요. 그가 입에 물고 태어난 금숟가락 덕분이에요. 그런데 오늘따라 마감이 늦어져 나는 ‘스뎅’ 숟가락을 물기도 버거워요. 꺅.

 

신도 부러워하는 로열패밀리 흉내 내려다 훅 가기도 해요. 진익철 서초구청장(사진)이 딱 걸렸어요. 처남 등 측근들을 각종 도시개발 사업의 인허가를 내주는 알짜배기 도시계획위원에 앉히도록 직원들에게 압력을 넣었다가 직권남용 혐의로 7월25일 경찰에 입건된 거예요. 2010년 10월 서초구청이 도시계획위원회의 외부 민간 전문가 21명 중 17명을 교체하던 당시, 담당 직원에게 자기 사람의 명단을 써서 넘겨줬대요. 배포 한번 커요. 이렇게 구청장을 끝으로 훅 보내기엔 아까운 그릇이에요. .

 

그래도 정부가 우리의 행복을 살뜰히 챙겨주고 있어요.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들던 ‘국민행복시대’ 슬로건이 아직도 살아 있긴 한가봐요. 가장 불행한 세대인 청년에 대한 애정이 각별해요. 청년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도입을 다시 추진하기로 했대요. MB 정부에서 국민적 지탄을 받아 폐기되는 듯했던 의료 민영화가 현 정부에서 청년 일자리 대책으로 감쪽같이 부활하게 된 거예요. 저임금 일자리 하나 던져주고, 의료비 폭탄을 안길 심산인가봐요. 이런 각박한 현실을 받아들여 이제부터라도 욕심을 버리기로 했어요. 더 이상 엄마 뱃속 시절 행복에 연연하지 않을래요. 내 맘대로 시계가 있다면,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돌리고 싶어요. 4년 반 뒤로!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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