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신소영
서울 내곡동에 길가에 앉아 대화록을 깎아 파는 노인이 있었다. 한 편을 만들어보려고 흥정을 했다. 값을 굉장히 비싸게 부르는 것 같았다. “좀 싸게 해줄 수 없습니까?” 부탁을 했더니, “대화록 하나 갖고 에누리하겠소? 비싸거든 다른 데 가 사우.” 대단히 무뚝뚝한 노인이었다. 건설업자들 뒤를 봐주고 돈푼깨나 만졌다더니 과연, 싶었다. 값을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깎아나 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깎고 있었다. ‘국방위원장’을 ‘국방위원장님’으로, ‘나’를 ‘저’로 바꿨다. 내가 보기엔 그만하면 다 됐는데, 날이 저물도록 낱말을 이리 꾀고 저리 맞추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달라고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대선 투표일이 빠듯해왔다.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잘 깎아야 색깔론이 되지, 없는 포기 발언을 어떻게 만들어내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 “살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노인장, 외고집이시구먼. 우리가 정권을 잡으면 까면 되고…” 했더니 “다른 데 가서 사우. 난 안 팔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갈 수도 없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깎아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색깔론이란 제대로 만들어야지. 깎다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얼마 뒤 대화록을 들고 이리저리 들춰보더니 다 됐다고 내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대화록이다.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캠프에 와서 대화록을 내놨더니 다들 예쁘게 잘 깎았다고 야단이다. 풍문으로 나돌던 소문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포기’ 발언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지도부의 설명을 들어보니, 대화록이 너무 자세하면 독해가 어려워 보수 표심이 결집하지 않으며, 너무 간단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기 쉽단다. ‘형님’ 중 한 분은 비가 오는 장터에서 대화록을 꺼내놓고 눈물을 뿌리며 열변을 토했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노인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노인을 찾아가 추탕에 탁주라도 대접하며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앉았던 내곡동 길거리에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어디 PC방을 전전하며 댓글이나 달고 있을까. 허전하고 서운했다. 여의도에 돌아갔더니 요새는 색깔론질 하는 소리도 들을 수가 없다. 대차게 뽀록이 났기 때문일 것이다. 문득 지난 대선에서 대화록을 깎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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