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 9호선 요금 인상 사건을 계기로 온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맥쿼리인프라펀드’는 메트로 9호선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중요한 사회간접자본 시설에 투자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자산의 성격 또한 연리 15%, 어떤 곳에서는 무려 20%에 달하는 후순위채권이라는 점도 드러났다. 상식적으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 사업체들이 어째서 그렇게 높은 수익률의 후순위채권을 발행한단 말인가. 후순위채권의 수익률이 높은 것은 기업의 파산시 채무 변제의 순서가 일반 채권보다 뒤로 밀린다는 것인데, 지방자치단체나 정부에서 수익을 보장하게 돼 있는 이 사업체들이 파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SOC 볼모로 시민들에게서 돈 뜯어가
이렇게 단순한 상식만으로는 이 경우를 설명하기 힘들다. 이는 ‘민간 주도 투자’(PFI·Private Finance Initiative)라는 금융 행위의 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가 집권한 뒤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에 마구잡이로 행해졌던 공공부문의 사유화도 일정한 변화를 겪는다. 무작정 사기업에 넘겨주는 대신, 사업의 성격과 종류에 따라 소유·경영·통제 등 여러 부문에서 민관이 다양한 형태로 협력하는 쪽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때 큰 규모의 사회 인프라 사업의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 이 ‘민간 주도 투자’다. 사업의 시간적 길이가 길고 동원되는 자금의 크기가 크기 때문에 하나가 아닌 여러 투자자들과 사기업이 하나의 컨소시엄을 만들고 그 안에서 각자의 수익과 리스크를 다양한 형태로 분배하는 것이며, 여기에 복잡한 금융공학과 금융상품들이 동원될 때가 많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연리 20%의 후순위채권도 이런 컨소시엄 내부에서의 수익·리스크 배분의 결과물로 나타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연유가 어찌됐든, 한국의 여러 사회 인프라 기업체들은 이런 투자자들에게 매년 15~20%의 이자를 꼬박꼬박 물어야 하며 그 때문에 실제로 기업 경영 부실이 발생하고 있으며 이를 궁극적으로 메꾸어야 하는 재원은 공공의 세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름을 어떻게 붙이고 중간 과정이 어떠하든, 민간투자자들이 사회간접시설을 잡고서 시민들에게서 일정한 수익을 거두어간다는 본질은 다르지 않다.
이제 우리는 ‘공공부문의 개혁은 시장부문으로 넘기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에 근본적인 의문을 표할 때가 됐다. 근시안적이고 승진에만 관심 있으며 게으르고 부패하기까지 한 관료들이 감독하는 공공부문은, 그 사업을 자기 이익으로 받아들이는 소유권자도 없고 또 시장에서의 경쟁을 통한 효율성 제고의 동기부여도 없으므로 항상 비효율적이고 방만하게 돼 있다. 따라서 이런 사업들을 어떤 형태로든 시장 기구의 작동 원리에 따라 돌아갈 수 있도록 사기업으로 돌리거나 최대한 시장경제의 ‘이니셔티브’가 반영될 수 있도록 고쳐야만 한다는 것이 1970년대 말 이래 약 30년 동안 하나의 공리·공준처럼 자리잡아왔다. 실제 1970년대 말 선진 자본주의 각국의 경제 사정을 보면 공공부문은 숱한 문제를 노정하고 있었고 그 개혁 또한 미룰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사유화나 민영화 등이 그 화끈한 대답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목적과 수단의 전도가 벌어졌다. 공공서비스를 잘 수행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이유에서 대두된 민영화·사유화가 어느새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하나의 절대적 지상명령처럼 돼버린 것이다. 요컨대 ‘정부는 악하고 시장은 선하다’는 것이다.
국유화-사유화 비가역적 아냐
하지만 지난 몇십 년간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공공부문 민영화와 사유화의 경험은 사태가 이렇게 단순한 일도양단으로 풀리는 게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경쟁은커녕 독점기업의 손으로 넘어간 공공사업들은 대량 해고와 서비스 질의 저하 문제를 낳다가 결국 가격 앙등이라는 결말로 이어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소스타인 베블런이 그의 저서 에서 갈파한 대로, 현대의 기업들은 생산 자체를 목표로 하는 ‘산업’ 조직이라기보다는 생산 시설을 볼모로 잡고서 사회로부터 이윤이라는 이름으로 몸값을 뜯어내는 ‘영리’(business) 조직일 뿐이다. 영리 조직은 그런 특징 때문에 여러 장점과 단점, 위대함과 추악함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그 여러 측면은 공공 부문을 넘겨받아 운영할 때도 그대로 드러나왔다. 30년 전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정부와 공공부문의 축소를 주장하며 “정부는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정부 자체가 문제니까요”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제 가지가지 형태의 민영화와 사유화를 30년간 경험해온 지구적 경제 곳곳에서는 그 반대로 ‘시장은 해법이 될 수 없다. 시장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터져나오고 있다.
경제체제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간단히 둘로 나누는 20세기 이데올로기의 양분법은 여러 좋지 않은 사고의 관성을 남겼다. 그중 하나가 산업사회의 경제활동을 조직하는 방법으로 오로지 ‘국가’와 ‘시장’ 두 가지만 상상하는 고정관념이다. 더욱 나쁜 것은, 그 두 가지 방법 하나하나를 절대선으로 보아 숭배하거나 절대악으로 보아 척결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가치판단과 섞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자칭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사적 소유에 기반해 개인의 이기심으로 조직되는 시장경제는 그 자체가 악이요, 자칭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그 반대다.
그 바람에 가장 본질적인 원리 하나가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스웨덴 사회민주주의 경제체제의 건설 과정에서 반복되던 핵심 원리인 ‘나라 살림의 계획’(planhush?lling), 즉 집안 살림(hush?lling)을 돌보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국민의 행복과 안녕을 위해 나라 살림이 이루어지도록 조정·안배한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공공서비스의 제공을 국가와 공기업이 맡을 것인가, 민간기업이 맡을 것인가는 그 ‘나라 살림의 계획’이라는 판단 기준에서 볼 때 어느 쪽이 더 적합하고 효율적인가로 결정할 일이다. 그리고 해보다가 산업 및 사회의 상태와 구조가 바뀌게 되면 얼마든지 또 반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요컨대 국유화든 민영화·사유화든 절대 비가역적인 것이 될 이유가 없다. 필요와 상황에 따라 국유화했던 은행을 사유화하거나 민영화했던 공공사업을 다시 국유화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고 필연적인 일이다. 국유화나 민영화·사유화 어느 한쪽을 신비화해 무슨 천륜이나 인간의 도리쯤으로 우겨대는 일은 21세기에는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 생각의 전환을 요구
그다음에 물어보자. 과연 우리가 하고 있는 무수한 ‘민자 유치’ 사업은 별문제가 없는가? KTX는 민영화가 답인가? 의료와 교육 서비스는 ‘영리화’가 해법인가? 어린이집은 지금처럼 사설 위주로 가는 게 옳은가? 은행은 모두 일반 기업처럼 외국 자본이든 국내 자본이든 맘대로 매입해 멋대로 운영하도록 내버려두는 게 옳은가? 각종 보험은 민간 보험회사의 사업 기회 확장을 목표로 하는 것이 ‘나라 살림의 계획’에 부합되는 일인가? 2008년 이후의 세계 자본주의의 전환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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