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지멘스는 26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세계적 기업이다. 전세계 190여 개국에서 41만 명 직원이 일한다. 지멘스는 최근 최악의 부패기업에서 최고의 반부패기업으로 거듭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주목받고 있다. 지멘스는 2006년 말부터 공금횡령, 탈세, 비자금 조성, 뇌물 제공 등 부패 스캔들이 터져나와 위기에 몰렸다. 경영진이 부당하게 빼돌린 회사 공금이 1억유로를 넘고, 스위스·그리스·오스트리아에 있는 지멘스 간부들의 계좌에서는 수천만유로의 뭉칫돈이 발견됐다. 총 332건의 프로젝트에서 4283건의 뇌물 제공 사실이 드러났고, 전체 뇌물 공여액은 14억달러로 집계됐다. 최고경영자(CEO)들이 줄줄이 사임하고, 수백 명의 직원이 해고와 징계를 받았다. 벌금과 부당이득 환수금액이 무려 16억달러에 달했다. 한때 독일의 자랑이었던 지멘스의 신뢰와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준법경영으로 재도약한 지멘스
지멘스는 기업문화 개혁에 착수했다. 오랫동안 조직 내부에 자리잡아온 부패 관행과 전면전을 선언했다. 최고준법책임자 제도를 신설하고, 독립적인 준법경영 조직을 구축했다. 전세계적으로 부패 예방 교육을 하고, 내부 시스템도 구축했다. 지멘스 직원들이 지켜야 할 행동강령은 비즈니스 파트너들과의 관계, 모든 입찰과 계약, 선물과 접대, 재무와 회계, 인사관리, 반독점, 기업 인수·합병, 투자 등 경영의 전 분야를 포괄한다.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경영활동 전반에 준법경영이 녹아들도록 한 것이다.
무엇보다 최고경영진이 강력한 의지를 보이며 솔선수범했다. 부패 스캔들 이후 새로 취임한 피터 뢰셔 CEO는 “모든 임직원들은 시간과 장소를 막론하고 오로지 청렴한 사업만을 추구할 것이며 준법이 사회적 책임의 최우선 과제”라고 강조했다. 설령 큰 이익이 될 만한 사업이라도 깨끗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2009년 말 이후 15년간 부패 근절을 위한 프로젝트에 1억달러를 투자하기로 했다.
이런 노력은 전화위복이 됐다. 준법경영을 본격화한 이후 사상 최고의 경영실적을 연이어 기록하고 있다. 2009년에는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했고, 2010년에는 사상 최고의 이익을 기록했다. 이어 2011년에도 매출과 수익이 전년 대비 각각 7%와 36% 증가해, 다시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지멘스는 기업에 윤리와 성장이 상반된 개념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임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지멘스의 준법경영 본부장인 브리짓 에라스는 지난 11월22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CSR(사회책임경영) 콘퍼런스 2011’(이하 CSR 콘퍼런스)에서 이런 지멘스의 스토리를 발표했다. 그는 반부패에 앞장서고 있는 국제투명성기구(TI)의 간부 출신으로, 스캔들 이후 영입된 인물이다.
CSR 콘퍼런스는 전세계 15개국에서 6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게오르그 켈 유엔글로벌콤팩트(UNGC) 사무총장, 위겟 라벨 TI 회장, 볼프강 엥슈버 유엔책임투자원칙(UNPRI) 회장 등 글로벌 사회에서 CSR 이슈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한국에서 CSR 관련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동안 CSR 국제행사를 많이 유치해온 싱가포르가 긴장하고 있다며 행사 관계자들도 고무된 표정이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UNGC 한국협회는 ‘한국이 CSR 및 사회책임투자(SRI)의 글로벌 허브가 되자’는 비전을 내놓았다. 이승한 UNGC 한국협회 회장(홈플러스 회장)은 “한국이 상품에서는 135개 품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이제는 CSR에서도 세계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명실상부한 경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CSR 후진국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을 깔고 있다. 주철기 UNGC 한국협회 사무총장은 “이번 행사를 정부 지원 없이 기업들의 협찬으로 개최한 것은 큰 의미”라며 “국내 기업들도 CSR가 기업에 부담이 아닌 기회이고,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하는 인식의 전환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갈 길 먼 한국 대기업들
최근 월가 시위가 상징하듯 자본주의는 중요한 변곡점에 도달해 있다. 1980년대 이후 자유방임을 추구하던 신자유주의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급격히 퇴조하며, 자본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더욱 강조되는 ‘자본주의 4.0 시대’로 급속히 진전되고 있다. 더불어 기업들의 부패·담합 등에 대한 규제가 갈수록 엄격해지는 것이 글로벌 사회의 추세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반부패에 앞장서는 UNGC의 국제이사를 맡고 있는데, 회삿돈 횡령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앞으로 이사 지위는 어떻게 되는가?” “SRI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UNPRI에는 한국의 국민연금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한국 기업의 CSR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이번 콘퍼런스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행사 첫날 합동기자회견장에서 한국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최 회장은) 아직 조사 중이고, 사법적 판단이 내려진 것은 아니지 않느냐.”(켈 사무총장) “나라마다 문화적 차이가 있다. 공개적인 발표와 선언도 중요하지만 실제 역할과 책임 인식이 더 중요하다.”(엥슈버 회장) 한국 기업들의 체면을 고려한 답변자들의 배려가 고맙지만, 한국 기업들의 CSR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UNGC는 기업의 지속 가능 경영을 위해 인권·노동·환경·반부패의 4대 원칙 준수를 추구한다. 전세계 100여 개 국가의 수천여 회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한국의 회원사는 아직 200개에도 못 미친다. 특히 세계시장을 호령하는 한국 대표기업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협회에서 얼마 전에도 삼성을 찾아가 가입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 기자들의 질문이 다시 이어졌다. “한국 대표기업들의 UNGC 가입이 저조한 이유가 뭔가?” 켈 사무총장이 잠깐 생각하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 기업들은 일종의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것 같다. UNGC의 원칙들을 실천할 준비를 다 갖춘 뒤에 가입하려는 것 같다.”
자격 미달을 완벽주의로 포장한 순발력이 대단하지만, 정말 낯 뜨거운 일이다. 진실은 가까이 있다. UNGC의 4대 원칙인 인권·노동권·환경·반부패는 CSR의 기본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 기본도 제대로 실천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가입했다가 잘못하면 애초에 가입하지 않은 것보다 못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게 현실이다. SK 최태원 회장의 사례가 본보기다. SK는 2003년 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이후 준법경영실을 설치하고 윤리경영 실천을 다짐했다. 한 행사 관계자는 “다른 기업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참 안타깝다”며 말끝을 흐렸다.
사회책임 경쟁력 지수 나올 날 머지않아”
이번 행사에선 처음으로 ‘UNGC 가치대상’이 신설돼 8개 국내 기업이 수상했다. 하지만 가장 큰 상인 종합대상은 수상자가 없었다. 또 6개 분야로 나뉜 베스트 프랙티스상 중 ‘인권통합경영상’에서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승한 UNGC 한국협회장은 “국내 기업 중에는 아직 이 상을 받을 만한 곳이 없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안타까운 얘기지만, 자격도 안 되는데 무리하게 상을 주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는 생각이다. 국내의 수많은 언론사와 단체들이 사회책임경영상·윤리경영상을 남발하는 현실에 비추어 신선한 느낌마저 든다.
CSR에 대한 글로벌 사회의 요구와 압력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또 CSR 관련 국제회의는 앞으로 더욱 쏟아질 전망이다. 국가경쟁력 지수와 마찬가지로 나라별 사회책임 경쟁력 지수가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CSR 후진국으로는 경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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