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 시대의 호민관은 특권층인 귀족에 맞서 평민의 권리를 대변했다. 공화정 말기인 기원전 133년 젊은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귀족이 독식한 공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재분배하기 위해 농지법을 제안했다. 10년 뒤 그의 동생인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농지법을 부활하고, 국가가 밀을 사들여 싼값으로 빈민에게 공급하도록 하는 곡물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두 형제는 모두 보수 원로원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호민인덱스 개발 막은 ‘상부 지시’
이명박 정부는 2009년 7월 중소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정부와 중소기업 간에 가교 역할을 하는 ‘기업호민관’을 신설했다. 그리고 초대 호민관으로 한국 1세대 벤처기업인의 상징인 이민화 카이스트 초빙교수를 선임했다. 하지만 이민화 호민관은 지난 11월16일 전격 사퇴했다. 정부의 부당한 간섭으로 호민관실의 독립성이 훼손돼 정상적인 업무 수행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그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형식은 자진 사퇴지만 실제로는 정부의 고사 작전에 의한 강제 퇴진과 다름없다. 개혁을 내건 로마의 호민관들이 비극적 최후를 맞은 것처럼.
그동안 호민관실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호민관은 선진국 진입을 위한 새로운 중소기업 정책 방향으로 공정거래를 주창해왔다. 특히 대·중소기업의 공정거래 질서를 정착시키기 위한 대안 제시에 적극적으로 나서, 지난 9월29일 정부가 동반성장 추진 대책을 내놓는 데 산파 역을 했다. 이 호민관은 “호민관실에서 제시한 개선 과제의 절반 정도가 정부의 9·29 대책에 반영됐다”며 큰 자부심을 보였다. 대기업이 애초 계약한 납품대금을 깎는 경우 지금까지는 중소기업이 감액의 부당성을 입증해야 했지만, 앞으로는 대기업이 감액의 정당성을 증명하도록 입증 책임을 전환한 것이 대표적이다. 또 대기업이 중소기업에서 원가 자료를 받을 때는 반드시 서면으로 요청하도록 하고, 대기업이 원가 자료 확인 명목으로 중소기업을 일방적으로 실사하는 행위를 금지한 것도 호민관실이 앞장선 내용들이다.
호민관실은 정부의 9·29 대책 발표 이전부터 대·중소기업 간 거래 관행을 글로벌 스탠더드 수준으로 높이기 위한 평가모형(호민인덱스) 개발에 착수했다. 호민인덱스는 공정시스템·공정계약·공정가격 등 3개 부문, 9개 영역에 걸친 37개 지표에 관해 하도급거래를 하는 대·중소기업을 상대로 매년 설문조사를 벌여 평가 결과를 공표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공정가격 설정’ 영역에서는 납품단가 인하 근거의 공개 여부, 과도한 부당 단가 인하 요구 정도 등 5개 지표를, ‘합리적 단가 연동’ 영역에서는 환율·원자재 가격 변동에 따른 합리적 단가 조정 여부를 각각 평가하도록 돼 있다. 대기업으로서는 부담스럽겠지만, 중소기업에는 절실히 필요한 내용들이다. 실제 호민관실이 지난 8월 중소기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응답자의 99%가 찬성할 정도로 반응은 뜨거웠다.
호민관실은 호민인덱스를 도입하기 위해 지난 10월12일 공청회를 열어 시행 방안에 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원부처인 중소기업청은 9·29 대책에서 도입하기로 한 ‘동반성장지수’(대기업의 동반성장계획 이행 실적을 평가하는 지표)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 결국 공청회는 열렸지만 외부 홍보는 못하는 기형적 행사로 전락했고, 뒤이어 추진된 전자우편을 이용한 서면 실태조사조차 무산됐다. 이 호민관은 “서면 조사를 위한 이메일 발송을 호민관실에 파견된 중소기업청 직원들에게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면서 “‘엄청난 상부 지시’가 내려져 중기청 직원들이 업무를 거부한 것”이라고 말했다. ‘엄청난 상부‘는 중기청보다도 윗선의 정부 고위 기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당황스럽다는 반응이다. 정부 관계자는 “공정위·지식경제부·중기청이 수차례 회의를 거쳐 상생지수를 동반성장지수로 일원화하기로 한 것을 호민관이 못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했다. 하지만 호민관실의 설명은 다르다. 호민인덱스를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신 동반성장 정책이 실기하지 않도록 호민인덱스의 연내 시범조사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9·29 대책의 실행은 6개월 이상 소요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모처럼 달아오른 정부의 공정사회 의지에 대한 신뢰가 의문시될 수 있다. 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단가 협상이 집중적으로 이뤄지는 11월 이후 많은 기업들로부터 불공정거래가 다시 재개되고 있다는 호소가 쏟아졌다.”
친서민 ‘쇼’가 끝나자 부담스러워졌나실제 중기청의 동반성장지수 개발을 위한 외부 용역 발주는 지난 11월 초에야 이뤄졌다. 지수개발과 기업조사, 평가를 거쳐 결과가 공표되기까지는 최소한 6개월 이상 걸릴 전망이다. 연말은 기업들이 한 해 사업을 마무리하고 내년 사업계획을 확정하는 중요한 시기다. 특히 하도급거래를 하는 중소기업들은 이 시기 대기업의 공정거래 준수 여부가 사업 실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내년 상반기 말까지도 결과가 나올지 불확실한 동반성장지수만을 기다리기보다는 호민인덱스 조사를 연내에 조기 실시해 상생경영 분위기를 고취하는 것이 중소기업을 위한 일 아닐까?
호민인덱스 무산 배경에는 대기업 입김설도 흘러나온다. 호민인덱스는 한국을 대표하는 5대 기업, 그리고 이들과 거래하는 중소기업들이 조사 대상이다. 호민관실은 진작부터 이 대기업들에 의견을 달라고 요청했다. 포스코와 현대차는 찬성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삼성전자 등 나머지 3개 대기업은 아무런 답변이 없는 상태다. 삼성전자 등은 9·29 대책 이후 계열사 사장들이 협력업체를 직접 방문하며 상생경영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상생경영 추진 실적을 점검받는 것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중기청의 호민인덱스 제동이 과연 중기청의 단독 행동이었을까? 이민화 호민관은 중기청과의 마찰 과정에서 청와대에도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이 호민관이 사퇴 의사를 밝힌 뒤에도 청와대·총리실·지식경제부·중소기업청의 그 누구도 만류하는 이가 없었다. 이 호민관은 “이번 일은 특정 부처의 문제라기보다 현 정부의 생각이 담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민화 호민관은 “9·29 대책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정부 지원이 적극적이었는데 이후 태도가 돌변했다”고 말한다. 정부가 친서민·중소기업을 전면에 내걸 때만 해도 기업호민관은 필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큰 행사가 끝나자 호민관실이 부담스러워진 것 같다. 특히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고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는 호민관은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됐다. 이 호민관은 정부가 9·29 대책에서 제외한 쟁점 사안들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필요성을 제기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납품단가 연동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중소기업 단체에 대기업과의 납품단가 단체협상권을 부여하는 방안이다. 정부는 중소기업의 카르텔(담합) 우려를 내세워 반대한다. 하지만 이 호민관은 “대·중소기업 간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균형이고, 이것을 이루려면 단체협상권을 부여해야 한다”면서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현행 공정거래법을 고치지 않고도 즉각 시행이 가능하다”고 정부의 의지 부족을 질타했다.
이 호민관은 첫 부임 때부터 물러날 시점을 고민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길어야 2년 정도 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는데, 실제 재임 기간은 1년4개월로 예상보다 더 짧았다. 이 호민관은 “그만두는 시점은 ‘호민관실이 독립성을 잃고 통제받을 때’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호민관의 독립성 훼손을 방관하는 MB이민화 호민관은 이명박 정부의 동반성장 정책 성공 가능성에 대해 “반반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다만 이번 일을 통해 (정부가) 다시 추스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통령의 동반성장 추진 의지는 분명하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호민관실의 독립성 훼손 사태를 방관하는 대통령의 의지를 무슨 근거로 믿을 것인가?
로마는 평민의 대변자인 호민관을 죽임으로써 공화정을 버리고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으로 넘어갔다.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중소기업의 대변자’로 임명한 기업호민관을 고사시킴으로써, 대·중소기업 간 공정거래 질서 구축과 동반성장 추진에 대한 국민의 믿음에 큰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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