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팀장(홍보팀장·부사장)이 울컥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오아무개 부장의 문화방송 내부 정보 유출 파문과 관련한 ‘기자 브리핑’ 자리에서였다. 브리핑 시간이 조금 더 길어졌으면 눈물까지 보였을지 모른다.
최소한 불법 정보 수집 묵인?
이 부사장은 왜 그랬을까? 그는 2005년 23년 기자 생활을 접고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방송 앵커로 속칭 ‘잘나가던’ 그였기에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됐다. 하지만 기업 홍보라는 새 영역과 숨막히는 삼성의 조직문화에 적응하면서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사장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본인의 좌표 설정에 깊이 고심했음을 토로했다. “기업이 홍보를 통해서 회사에 줘야 할 가치가 뭐냐. 바로 신뢰다. 신뢰를 받기 위해 할 것은 정직하고 투명하게 가는 거다. (언론사로부터) 어떤 부정적인 문의가 오더라도 충실하게 대응하라고 홍보 직원들에게 말해왔다.” 이 부사장이 굳이 이런 얘기를 꺼낸 이유는 간단하다. 오 부장의 정보 유출이 개인 차원의 일이고 삼성은 관여되지 않았다는 해명에도 의혹의 시선이 가시지 않는 것에 대한 항변이다.
문화방송 정보 유출 사건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의혹이 제기된다. 오 부장의 업무가 겉으로는 경제연구소의 방송 홍보로 돼 있지만 실제는 정보 수집이라거나, 삼성이 2007년 그를 문화방송에서 데려올 때 스카우트비가 수억원대였다는 얘기들은 그 일부다. 심지어 오 부장이 정보 수집을 주 업무로 하는 삼성 전략기획실의 기획팀 소속이라는 얘기까지 돈다. 물론 삼성은 모두 터무니없다고 부인한다.
이 부사장의 심정이 이해가 가면서도, 근본적으로 드는 의문은 삼성에 대한 불신을 언론이나 사회 탓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들만 봐도 의문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 부장이 몰래 취득한 문화방송 내부 정보를 삼성 전략기획실 임원들에게 보고했다는 게 단적인 예다. 보고 대상에는 이인용 부사장도 포함돼 있다. 익명을 요청한 삼성그룹 관계자는 “오 부장이 이메일로 보낸 정보보고 내용이 증권가 정보지 수준에 불과해 (이 부사장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보의 질이 아니라, 불법행위를 회사가 사전에 알았느냐는 것이다. 삼성이 오 부장의 정보 유출을 직접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불법적인 정보 수집을 묵인했다면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오 부장이 왜 갑자기 삼성으로 옮겼고, 삼성에서 실제 무슨 일을 했느냐도 의문이다. 삼성의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는 연구조직이다. 하지만 오 부장은 단 한 번도 연구보고서를 쓴 적이 없다. 공식 직책은 연구조정실의 커뮤니케이션팀장이다. 방송사의 인터뷰 요청이 있으면 적당한 연구원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삼성이 이런 단순 업무를 시키려고 기자 출신을 영입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삼성이 출입기자들에게 배포한 계열사별 홍보담당자 명단에도 오 부장이 아닌 다른 직원의 얼굴이 올라 있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삼성이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문화방송에 대한 인맥 관리와 취재 동향 파악을 위해 오 부장을 영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인용 부사장은 문화방송의 보도 계획을 미리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항변한다. 불리한 기사에 대해 사전 해명을 하기도 힘들고, 해명을 해도 반영이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불과 몇 달 전에도 삼성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을 준비하던 문화방송 제작진에게 삼성이 미리 전화를 걸어와 깜짝 놀란 일이 있다고 한다. 4대 그룹의 한 홍보 간부는 “언론의 취재 계획을 미리 아는 것은 마치 시험 보기 전에 답을 아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삼성 비자금 사건을 폭로한 김용철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도 자신을 포함해 삼성에 영입된 판검사의 상당수는 대외 로비용이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참여연대 회의 내용도 안다”오 부장이 삼성 전략기획실의 기획팀 소속 아니냐는 의문도 뜬금없는 얘기가 아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평상시에도 전략기획실 기획팀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을 한다. 삼성이 비자금 사건 여파로 2008년 여름 전략기획실의 간판을 내렸을 때 기획팀 소속 임직원의 상당수가 경제연구소로 책상을 옮겼다. 기획팀의 ㅇ전무도 경제연구소 출신이다. 기획팀은 신수종사업 등 기획 업무 외에도 대외정보 수집과 인맥 관리, 로비를 맡고 있는 곳이다. 삼성의 모든 임원은 누구와 만나 무슨 얘기를 했는지 의무적으로 정보보고를 해야 한다. 그것을 취합하는 곳이 기획팀이다. 삼성의 정보 수집 활동과 능력은 높은 명성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김용철 변호사는 “청와대와 참여연대의 회의 내용도 곧바로 구조본에서 알 정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삼성의 정보력이 국가 정보기관보다 더 뛰어나다는 얘기가 빈말이 아닌 것이다.
현재 삼성 전략기획실 기획홍보팀의 총책임자는 장충기 삼성 브랜드관리위원장(사장)이다. 그가 지금처럼 기획팀과 홍보팀이 합쳐지기 이전에 회의석상에서 홍보팀의 무능을 자주 공격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장 사장의 불만은 홍보팀이 돈(광고비)만 많이 쓰고 정작 하는 일은 없다는 것이었다. 평소 기자들과 술이나 먹고 골프나 치면서, 삼성에 안 좋은 기사가 나오면 뒤늦게 언론사에 쫓아가 (이건희 회장의) 이름 빼고 제목 조금 고치는 게 고작이라는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기획팀은 전략기획실 회의에서 홍보팀도 모르는 언론사들의 삼성 관련 취재 계획이나 동향을 보고해 홍보팀을 곤혹스럽게 만든 적이 자주 있었다”면서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기획팀의 광범위한 정보 수집과 인맥 관리 때문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실제 삼성 안에서는 기획팀을 ‘KGB’에 비유하기도 한다.
신뢰의 출발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다. 이인용 부사장은 언론과 사회를 탓하기 전에 삼성이 국민과의 약속을 얼마나 성실히 지켰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삼성은 2005년 고려대생들의 이건희 회장 박사학위 수여 반대 사건과 안기부 X파일 사건을 계기로 큰 위기를 맞았다. ‘삼성공화국론’이 재차 대두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개인적으로 이학수 부회장을 만났다. 이 부회장은 “세상이 변하는데 삼성만 거스를 수 있겠느냐”면서 “다만 기업의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니 언론도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달라”고 당부했다.
삼성은 다음해인 2월 대국민 사과를 통해 “그동안 기업 경영에 온 힘을 쏟아왔지만 정작 우리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고 국민들의 기대와 뜻에 부응하는 데는 소홀했다”고 반성했다. 그리고 사회 여론과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사회와 더불어 발전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년6개월 뒤에 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삼성은 사건 초기 비자금 조성과 차명계좌 운용 등 핵심 혐의를 대부분 부정했다. 그러나 특검은 4조5천억원에 달하는 차명계좌 운용을 통한 조세포탈과 불법적 경영권 세습과 관련한 배임 혐의로 이건희 회장 등을 기소했고, 결국 유죄가 확정됐다. 이 회장은 2008년 4월22일 또다시 대국민 사과를 하고 경영 퇴진을 선언했다. 이학수 부회장은 10개 항의 경영 쇄신안을 발표하며 “삼성의 쇄신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결연하게 밝혔다.
하지만 약속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불과 반년 뒤인 2009년 1월 사상 최대 규모로 이뤄진 삼성 사장단 인사에서 비자금 사건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이 대거 계열사 사장으로 임명됐다. 이어 이 회장도 이명박 정부의 단독 사면을 거쳐 지난 3월 경영에 복귀했다. 또 지난 8월 사면·복권된 이학수 부회장을 포함한 비자금 사건의 책임자들도 올 연말이면 다시 경영에 복귀하고 전략기획실도 (실제로는 해체된 것도 아니었지만) 복원될 예정이다. 4조5천억원의 차명 재산을 사회의 유익한 일에 쓰겠다는 약속은 기억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젊은 리더십 이전에 신뢰의 리더십이건희 회장은 지난 11월11일 연말 사장단 인사와 관련해 “될 수 있는 대로 넓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이 회장이 지난 10월 말 ‘21세기에 맞는 젊은 리더십’을 강조한 것과 연결돼 연말 인사에서 이재용 부사장의 승진과 대폭적인 세대교체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을 낳고 있다. 하지만 삼성에 더 절실한 것은 ‘젊은 리더십’보다 국민에게 ‘신뢰받는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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