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갑과 을의 상생경영은 가능한가



중소기업에 원자재값·환율 변동 부담 떠안기며 ‘나 홀로 성장’하는 대기업
등록 2010-05-19 15:52 수정 2020-05-03 04:26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한 공장의 기계들이 멈춰 있다. 원자재값 상승, 높은 환율 등의 부담을 오롯이 떠안아야 하는 중소기업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인천 남동공단에 있는 한 공장의 기계들이 멈춰 있다. 원자재값 상승, 높은 환율 등의 부담을 오롯이 떠안아야 하는 중소기업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간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한국 사회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 중 하나가 갑(甲)과 을(乙)이다. ‘갑을 문화’의 공식은 냉혹하다. 갑은 을의 위에 군림하고, 을은 갑의 봉이다. 그런데 영원한 을인 중소기업이 영원한 갑인 대기업의 횡포를 참다 못해 들고일어났다. 자동차·조선·공작기계 부품을 공급하는 주물업체들은 납품단가가 인상되지 않으면 5월18일부터 생산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주물업체 중에서도 사정이 더 급한 공작기계 부품업체들은 지난 5월6일부터, 조선 부품업체들은 10일부터 이미 생산을 중단했다. 자동차·전자부품을 생산하는 단조업체들과 포장재를 공급하는 골판지업체들도 아우성치기는 마찬가지다.

원자재값 올라도 납품단가는 요지부동

경제 교과서에서는 하도급 거래를 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상호보완적 파트너로 표현한다. 대기업은 완제품 생산에 필요한 부품을 중소기업으로부터 적기에 안정적으로 공급받고, 중소기업은 미리 주문을 받아 물건을 만드니 역시 안정적이고 효율적이다. 대기업이 앞선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전수해주면 중소기업의 기술력과 생산성이 높아져 질 좋은 부품을 더 값싸게 공급할 수 있고, 이는 다시 대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상생의 선순환이 이뤄진다. 그러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원자재 가격은 급등했는데 납품단가에 제대로 반영이 안 돼 중소기업은 생산을 할수록 손해가 난다. 그렇다고 마땅히 다른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대기업과의 거래를 끊을 수도 없다. 그냥 발만 동동 구르다 속이 시꺼멓게 타버린다.

주물업체들의 경우 주원료인 고철 가격이 2008년 말부터 올해 4월 말까지 불과 1년 반 사이에 60% 이상 급등했다. 하지만 그동안 납품 가격은 전혀 안 올랐다. 골판지의 경우는 2009년 9월 이후 원지 가격이 50%나 올랐지만, 납품단가가 요지부동이기는 마찬가지다. 단조업계도 주원료인 환봉 가격이 지난해 9월 이후 25% 이상 급등한 부담을 중소기업들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주물업계 관계자는 “세계경제 회복세에 따라 원료 가격이 급등했는데도 일부 조선업체와 공작기계업체들은 원가절감을 내세워 지난해 여름과 올 1월 납품 가격을 오히려 깎았다”고 한숨을 내쉰다.

광고

중소기업들의 몸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주물업체들은 2년 전인 2008년 3월에도 생산 중단을 한 적이 있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납품 가격 인상 요인을 중소기업에 떠넘기는 잘못된 구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단조공업협동조합의 박권태 전무는 우리나라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먹여살리는 구조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주요 원자재는 대기업이 수입한다. 중소기업이 이를 사다가 부품을 만들어 납품하면, 대기업은 완제품을 수출한다. 이 과정에서 원자재값 상승이나 환율 변동에 따른 부담은 모두 중소기업에 전가된다.”

이 대목에서 지난해부터 대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두고 있는 게 묘하게 오버랩된다. 대기업들이 거둔 수조원의 이익 중에서 중소기업에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은 얼마나 될까? 또 그중 일부라도 중소기업을 위해 배려했다면 이런 소동과 고통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현실은 이런 생각을 순진하다고 비웃는다. 최근 대법원 판결에서 유죄가 확정된 삼성전자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행위는 상징적이다. 삼성전자는 2003년부터 2005년 5월까지 2년 반 동안 15조2400억원어치의 부품을 구매하면서 14.7%인 2조2300억원의 하도급 대금을 깎았다. 인하 방식도 교묘하다. 서류상으로는 납품업체와 협의를 한 것처럼 꾸며놨지만 실제로는 목표를 정해놓고 일방적으로 하달했다. 협력업체로서는 단가 인하에 협조하지 않거나 인하율이 낮으면 다음해 구매물량이 최대 15%나 줄어드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할 수밖에 없었다.

거래 끊을 각오로 정부에 도움 청하라?

이번에 원자재 가격의 납품단가 반영을 요구한 업종의 경우 이익률이 낮으면 1~2%에 그치고 높아도 3~4%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은행 정기예금 금리에 미달하고, 실제 적자 상태인 기업도 많다. 한국주물공업협동조합의 허만형 전무는 “대기업처럼 10%를 넘는 이익률은 아니어도 인상된 인건비와 전기료는 감당이 돼야 적자를 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한때 대기업들이 상생경영을 강조하며 앞다퉈 내놓던 지원대책이 무색할 지경이다.

광고

정부는 중소기업이 원자재값 상승으로 단가 인상 요인이 있으면 대기업에 협의를 요청하는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를 지난해 4월 도입했다. 만약 대기업이 요청을 외면하거나 합의에 실패하면 하도급분쟁조정협의회에 조정을 신청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신청은 단 한 건도 없었다. 기계를 멈출 정도로 심각한 현실과는 모순되지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국단조공업협동조합의 박 전무는 “중소기업으로서는 대기업과 거래를 안 할 각오가 없는 한 조정신청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털어놨다. 이런 문제는 제도 도입 과정에서도 이미 제기됐다. 중소기업들은 대신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납품단가에 자동 반영해주는 ‘납품단가 연동제’를 주장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가격 결정을 법으로 규정하는 것은 시장경제 원리에 위배된다며 반대했다. 정부는 결국 대기업 손을 들어줬고, 1년밖에 안 돼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는 사실상 뇌사 판정을 받았다.

“주물·주조·금형 산업은 제조업 경쟁력의 핵심인 국가 기반산업입니다. 기술력과 생산성을 높이는 획기적 결과를 가져오면 관련 중소기업이 발전하는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5월6일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대통령이 실정을 모르고 이런 얘기를 했다면 ‘경제 대통령’ 자격이 없는 것이고, 알고도 그랬다면 일종의 사기다. 중소기업조합의 한 임원은 “납품단가가 공정하고 적정 이윤이 보장돼야 기술개발도 하고, 좋은 인력도 뽑고, 경쟁력도 높이지 않겠느냐”면서 “대통령의 말을 들으니 더 갑갑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치 중소기업이 무능하고 노력을 하지 않아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호도한다는 것이다.

말로만 ‘중소기업 사랑’하는 정부

잘못된 진단에서 올바른 대책이 나올 리 없다. 중소기업을 살리기 위한 진정한 해법은 현 정부가 요즘 강조하는 금융·세제 지원이 아니라 공정한 시장질서를 정착시켜 대·중소기업이 공생할 수 있는 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일본 중소기업이 발전한 것은 대·중소기업 간 하도급 거래가 우리와 달리 상생관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광고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근본 처방은 외면한 채 눈 가리고 아웅 식이다. 정부는 최근 대기업들을 불러 원자재값 인상을 자제하고 중소기업의 납품단가 요구를 귀담아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공정위는 한발 더 나아가 납품단가를 부당하게 내리거나 조정 협의에 응하지 않는 기업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정권 초기 물가 안정을 위해 담합 조사에 나선 것과 똑같다. 명색이 ‘친시장’을 내건 정부가 이런 노골적 시장 개입을 하는 것도 우스꽝스럽지만, 선진국 같으면 투자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거액의 소송을 내고도 남을 사안이다.

대기업의 ‘고용 없는 성장’에 이은 ‘나 홀로 성장’, 그리고 정부의 말로만 하는 ‘중소기업 사랑’이 바뀌지 않는 한, 한국 경제 전체 기업 수의 99%와 전체 고용의 88%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의 미래는 없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광고

4월3일부터 한겨레 로그인만 지원됩니다 기존에 작성하신 소셜 댓글 삭제 및 계정 관련 궁금한 점이 있다면, 라이브리로 연락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