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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이 아닌 팩트로 진보와 보수 공존 가능”

5월 창립한 금융연구센터 전성인 소장 “학자들의 외연 넓혀 사실·원칙에 기반한 정책 제안할 것”
등록 2009-05-29 19:23 수정 2020-05-03 04:25
전성인 교수

전성인 교수

진보와 보수 진영의 경제학자들이 함께 모여 연구센터를 꾸렸다. ‘한국금융연구센터’다. 지난 5월1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창립식을 열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제자들이 주축이 됐다. 것으로 10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했다. 진보 쪽 인사로는 전성인 한국금융연구센터 소장(홍익대 교수)을 비롯해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 권영준 경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 등이 참가했다. 보수 쪽에선 윤창현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서울시립대 교수)을 비롯해 이창용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오성환 서울대 교수 등이 참여하고 있다. 중도 성향의 정지만 상명대 교수, 신관호 고려대 교수, 이기영 경기대 교수 등도 가입돼 있다.

앞으로 금융연구센터는 진보와 보수의 목소리를 모아 금융정책 대안을 제시하겠다고 한다. 새로운 실험이다.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함께 경제연구센터를 만들었다면 그 센터는 잘 굴러갔을까? 대안을 만들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보수 경제학자들이 “비효율적인 국가는 효율적인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한다면, 진보 경제학자들은 미국발 금융위기를 예로 들며 “시장의 실패와 국가의 개입”을 얘기할 것이다. 성장과 분배는 어떨까? 보수 경제학자들은 성장으로 파이를 키우자는 선 성장론을 들고 나올 것이고, 진보 경제학자들은 분배에 좀더 방점을 찍을 것이다.

하지만 금융연구센터는 “경제 팩트에 충실한 연구를 통해 진보와 보수가 한목소리를 낼 것”이라고 강조한다. 과연 진보와 보수의 경제학자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5월19일 오후 회의실에서 보수와 진보의 경제학을 아우르겠다는 ‘거대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는 전성인 소장을 만났다.

-금융연구센터가 출범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정운찬 선생이 만들었던 ‘금융연구회’의 운영성과와 연구 잠재력을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죠. 순수 학술 모임만으로는 현실사회에 기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공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순수 모임이던 금융연구회를 확대·개편한 거죠. 올바른 정책 대안을 내놓는 연구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입니다.

-금융연구센터의 토대는 금융연구회라고 보면 되나요?

=좀더 거슬러 올라가 조순 선생(전 경제부총리)부터였죠. 1980년대 조순 선생이 ‘고전연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 조셉 슘페터와 같은 경제학 거장들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순 선생이 부총리로 나가시면서 연구회가 중단됐습니다. 정운찬 선생이 고전연구회를 이어받아 1990년 금융 쪽을 연구하는 연구모임을 만들었죠. 그게 금융연구회였습니다. 매달 한 번씩 모여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기도 하고 사회 현안에 대해 정책 제안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를 정리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내려왔습니다. 연구 결과를 정리해 출판도 하고 기록으로 남기자는 얘기가 간간이 나왔습니다. 그러다 지난해 여름께 금융연구센터를 만들기로 뜻을 모았죠.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센터가 정운찬 사단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외연을 더 넓혀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출범식 때도 정운찬 선생이 오셔서 “끼리끼리 하지 말고, 아웃브리딩(outbreeding·이계 교배)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좁은 분야의 몇몇 사람의 연구센터가 아니라 능력 있고 뜻있는 인재가 많이 모인 연구센터가 목표입니다.

-금융연구센터엔 진보 진영의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과 보수 진영의 윤창현 바른사회시민회의 사무총장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념 스펙트럼이 너무 넓은 게 아닌가요?

=김상조 소장과 윤창현 사무총장의 경우 다들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분들입니다. 두 분 모두 자기 신념이나 자신의 경제철학을 펼칠 공간은 이미 갖고 있죠. 금융연구센터에선 경제학자의 이념이나 철학에 기반을 둔 주장을 제시하기보다 팩트(사실)와 프린시플(원칙)에 기반을 둔 정책을 제안하려 합니다.

-금융연구센터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옛 금융연구회에선 다양한 분들이 강연도 하고 주제발표를 했는데, 그분들이 금융연구센터에 많이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처럼 현업에 있던 분들도 강연을 했습니다. 이헌재 전 재정경제부 장관, 이동걸 전 금융감독원 부위원장도 강연을 하거나 주제발표를 했죠. 서근우 전 하나금융지주 부사장은 대학원생이었을 때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순수 학문 모임이다 보니, 진보 성향이거나 보수 성향이거나 관계없이 다양한 분들이 모인 것이죠.

-그러다 보면 금융연구센터가 각종 경제 현안에 대해 단일 의견을 만들어 발표하기가 쉽지 않을 듯합니다만?

=물론 철학이나 신념이 부딪히는 경제 분야를 회피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경제학자들이 잘 안 하는 분야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금융기관과 금융시장, 통화정책과 국제금융, 금융 인프라, 규제 및 제도 등이 주된 연구 대상이 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실험인 것 같습니다.

=한 예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인수위는 감독 업무의 효율성을 높인다며 옛 재정경제부의 금융정책국을 금융감독위원회에 합쳐 금융위를 출범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 지난해 1월 경실련, 경제개혁연대, 참여연대 등 3개 시민단체가 국회에서 ‘금융분야 정부조직 개편방안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토론회에서 김 소장과 윤 사무총장이 똑같은 논리로 금융위 출범에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김 소장은 “금융정책 기능과 금융감독 기능을 분리해야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통해 금융위기 발생을 예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윤 사무총장은 “금융위 출범으로 감독의 독립성과 효율성, 책임성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결국 지난해 미국에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국내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금융위는 위기가 해외에서 시작됐다는 이유로 선제 대응을 하는 데 머뭇거렸고, 기획재정부도 관할 업무 밖이라며 국내 금융시장 개입을 꺼렸습니다. 진보와 보수를 떠나 당시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잘 반영했더라면 금융위기에 좀더 쉽게 대처하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금융 시스템 문제는 사람들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분야인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습니다. 경제 분야 가운데 따끈따끈한 현안에 대해 얘기하면 언론을 쉽게 탈 수 있고, 사람들 뇌리에 쉽게 인식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는 주제일지라도 금융 시스템은 우리나라 금융시장 발전을 위해선 상당히 중요한 분야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은 예금보험제도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금보험제도는 우리나라 금융 인프라에 상당히 중요한 제도입니다.

5월1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금융연구센터 창립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이 ‘글로벌 자본시장의 변화와 한국의 정책대응’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5월1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한국금융연구센터 창립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이 ‘글로벌 자본시장의 변화와 한국의 정책대응’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사진 한겨레 김경호 기자

-금산분리 같은 현안에서 센터가 통일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웃음) 금산분리 문제는 원래 이념적인 사안이 아닌데, 우리 사회에선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뜨거운 현안이 됐습니다. 금산분리는 진보와 보수의 경제학자들이 한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을 겁니다. 금산분리처럼 첨예한 시각차가 드러나는 것은 ‘포지션 페이퍼’를 통해 보여줄 생각입니다. 어떤 이슈에 대해 국내와 국외의 주된 논쟁거리를 분석하는 것이죠. ‘그 결과 한국 현실을 감안할 때 이쪽 포지션을 지지한다. 그 이유는 이런 식이다.’ 이렇게 정책 제언을 할 것입니다. 연구자가 공정하게 연구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이름 석 자를 걸고 나가게 할 것입니다.

-한국금융연구원 등 기존 연구소들과의 관계 설정은 어떻게 할 건가요?

=금융연구원은 현안 중심으로 발 빠르게 보고서를 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금융연구센터는 제도나 시스템 쪽에 초점을 맞춰 장기적인 연구를 하게 될 것입니다. 금융연구센터의 주축은 교수들입니다. 정책 관련 통계나 데이터에 쉽게 접근하기 힘들죠. 그래서 금융연구센터는 좀더 장기적인 과제, 그리고 비인기 주제지만 우리나라 금융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제를 다룰 것입니다. 물론 다른 연구소와 선의의 경쟁도 필요하고, 어떤 면에서는 협업이나 공생하는 측면도 있겠죠.

-창립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은 어떤 것인가요?

=외국인의 주식자금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이었죠. 지난해 미국 투자은행인 리먼브러더스 파산을 계기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되면서 한국 경제도 소용돌이쳤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특별히 더 어려웠습니다. 한국의 금융시장은 크게 출렁댔습니다. 2007년 말 900원대이던 원-달러 환율이 2008년 10월 이후 세 차례나 1500원 선을 넘었습니다. 원화는 이번 경제위기에 가장 취약한 통화 중 하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나라 경제의 높은 개방성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의 주식투자 비중이 높죠. 경기가 좋을 때는 과도하게 자금이 유입돼 거품을 키우고, 경기가 나쁠 때는 한꺼번에 빠져나가 낙폭을 더 크게 만들어요. 주식시장뿐만 아니라 외환시장 변동도 커집니다. 한꺼번에 달러가 빠져나가면서 환율은 올라가고 금융위험이 높아지고, 그러면 한국 주식시장에 투자한 외국인들은 추가적으로 돈을 빼가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개방 시장에선 환율 변동성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데, 참여정부 때는 저환율 기조를 유지했고 이명박 정부에서는 고환율 기조를 고수하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을 놓고 환율 변동성을 줄여나가기 위한 대안을 찾아보자는 것이 주제였습니다. 대안으로는 외환보유액을 늘리고 외환시장 규모를 키워야 한다는 것을 제시했습니다.

-벤치마킹하려는 연구소가 있는지요?

=예를 들면 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쯤이 될 것 같습니다. 이 연구소는 경제 리포트를 낼 때도 너무 학술적이지 않습니다. 학술적인 논문은 연구자 각자가 학회 저널에 내죠. 대신 브루킹스에서 나온 리포트는 좀더 쉬운 언어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수 있도록 합니다. 여러 가지 연구결과를 잘 조합해 정책과 연결되기 쉬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완전히 학술도 아니고 완전히 정책도 아닌 중간 단계에서 자리매김하며 연구소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금융뿐만 아니라 다른 경제 현상에 대한 연구도 할 계획인가요?

=경제의 다른 이슈를 의도적으로 안 다루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일단 금융 쪽에 특화하려고 합니다. 금융이 너무 급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할 게 많거든요.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5월20일로 취임 100일을 맞았습니다. 평가를 해주시겠습니까?

=경제정책 당국자에 대해 금융연구센터 전체의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발언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다만 사견임을 전제로 평가를 하자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장점은 윤 장관이 전임 장관에 비해 현실감각이 조금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경제의 성급한 부양이나 회복에 대해 경고를 보내는 조심스러운 태도는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하지만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면, 금산분리 완화의 경제적 효과를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자신의 발언을 뒤집는 듯한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는 과잉 유동성을 경고하는 발언을 하다, 최근에는 과잉 유동성 문제가 심각하지 않고 단기적으로 금리인상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경제 수장은 시장에 일관된 신호를 보내야 합니다.

이날 전 소장은 넥타이를 매고 오지 않았다. 전 소장은 사진 찍기에 앞서 넥타이를 빌리려 했다. 평소 넥타이를 잘 매지 않는 임인택 사회팀 기자가 그날따라 넥타이를 매고 왔다. 사진에 찍힌 파란색 넥타이는 임 기자의 넥타이임을 밝혀둔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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