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1984년, 여가수 이선희는 강변가요제에서 <j>를 불렀다. 여자 양궁선수 서향순은 한국 여성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전두환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는 ‘새세대 심장재단’ 이사장이 됐다. 이 정도를 제하면, 나머지 한국 여자들에겐 특별한 일이 없었다. 언론계를 통틀어 기자인 여자는 여전히 희귀했다. 드물게 기자를 해도 한갓진 부서에서 일했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는 기자가 됐다. 회식 자리에 가면 부장이 말했다.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이런 자리까지 따라오나.” 회식 자리에 가지 않아도 부장이 말했다.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려고 이런 자리에 빠지나.” 동료 남기자들이 다 거쳐간 경찰 취재도 그에겐 맡기지 않았다.
그의 정체성은 그 시절 담금질됐다. 지방 일간지 기자를 거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다시 에 입사해 여성 전문기자와 논설위원이 될 때까지, 그는 줄기차게 한 우물을 팠다. 여성의 권리였다. 여성은 소수자였다. 소수자의 권리까지 아울러 파고들었다. 2008년 2월, 한나라당 추천으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이 됐을 때, 이 분야의 전문성과 능력을 인정받은 듯해 그는 기뻤다. 국가인권위가 권력의 잣대로 인권을 외면할 줄은 몰랐다. 권력의 전횡을 비판한다 하여 좌파로 몰릴 줄은 몰랐다.
결국 지난 11월1일 “현병철 위원장 부임 이후 국가인권위가 파행과 왜곡의 길을 거쳐 고사의 단계로 전락하고 있다”며 상임위원 사직을 발표했다. “이편 저편 나누는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썼다”고 문경란 전 국가인권위 상임위원은 거듭 말했다. 4일 오후, 서울 서초동 어느 카페에 마주 앉은 그는 ‘진보·보수’라는 단어를 피하려고 애썼다. 오직 인권을 잣대 삼아 인권위의 문제를 설명하려 애썼다. 지난 2년6개월을 돌이키는 그의 회고에서 인권의 반대말은 권력이었다.
- 언제 사퇴를 결심했나.
= (상임위원이 된 뒤) 여러 차례 사퇴를 고민했으나, 많이 참았다. 가능하면 임기를 채우고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하는 게 소임이라 생각했다. 상임위 운영규칙 개정이 결정적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이미 상임위의 손발을 묶었는데, 이젠 완전히 입을 틀어막는구나 싶었다. 너무 모욕적이었다. 남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나가야 되겠구나, 생각했다.
- 과거에 현 위원장이 상임위의 손발을 묶은 사례가 있나.
= 지난해 9월 방한한 프랑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인권위 상임위원들을 만나려 했다. 그런데 현 위원장이 못 만나게 했다. 지난해 말, 대통령 특별보고 자리에 상임위원을 배제하고 위원장 혼자 갔다. 과거에는 상임위원이 모두 동석했다. 인권위의 논의 사항을 위원장에게 보고하기 전에는 상임위원에게 알리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명령했다. 예전에는 조사관들이 담당 분야별로 상임위원과 충분히 의논했다. 사무처 직원 인사에 대해서도 상임위원들과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매주 열리던 상임위 정례회의도 지난해 말부터 안 하고 있다. 위원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독립성이 인권위의 생명이라면, 인권위원의 생명도 독립성이다. 사퇴 발표 직후,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추천을 받은 위원조차 문제제기한다’는 성명을 냈는데, 그런 표현조차 불쾌하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 추천한 인권위원은 반인권적으로 활동하는 게 상식이라는 뜻이냐.”
2001년 11월, 국가인권위 출범 이후 김창국·최영도·조영황·안경환에 이르는 역대 위원장들은 매주 월요일 상임위원들과 현안을 의논하는 자리를 열었다. 다른 날에도 수시로 ‘티타임’ 형식의 같은 자리가 만들어졌다. 지난해 말부터 그런 자리가 없었다는 것은 이미 1년 가까이 상임위원회가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뜻이다.
상임위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위원장과 여야가 추천한 3명의 상임위원으로 구성된다. 인권위의 중심이다. 상임위 논의는 7명의 비상임위원과 상임위원이 함께 참석하는 전원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승인한다. 지난 10월25일 제출된 상임위 운영규칙 개정안은 상임위 결의 없이 위원장 단독으로 전원위에 안건을 상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상임위는 완전히 무력화된다. 현병철 위원장은 껄그러운 안건의 상정 자체를 틀어막고, 혼자서 인권위를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개정안은 조만간 열릴 전원위의 의결을 기다리고 있다.
- 왜 상임위를 무력화하려고 할까.
=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상임위원이 논의하는 것 자체가 권력의 심기를 거스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권위의 원래 소임은 권력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것이다. 그런 쓴소리를 하는 기관이 나라에 한 군데는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국민 세금으로 우리가 월급을 받는다. 그 역할을 하지 않으면 인권위가 있을 이유가 없다. 위원장은 그 역할 자체를 두려워하고 회피했다.
- 그게 혹시 추천을 한….
= 그 문제 편하게 말해도 괜찮다. 날더러 보수니 좌파니, 여당 추천이니 뭐니 해서 불쾌했다. 독립성이 인권위의 생명이라면, 인권위원의 생명도 독립성이다. 사퇴 발표 직후, 민주당이 “한나라당의 추천을 받은 위원조차 문제제기한다”는 성명을 냈는데, 그런 표현조차 불쾌하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이 추천한 인권위원은 반인권적으로 활동하는 게 상식이라는 뜻이냐. 한나라당이 나를 추천할 때는 인권적으로 일을 잘하라는 뜻이었다고 나는 이해한다. 이런 일을 두고 자꾸 보수·진보, 여·야로 나누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 위원장에게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나.
= 수도 없이, 비일비재하게 위원장에게 말했다. 그러나 위원장은 이런 문제제기에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이러저러해서 못한다고 설명이라도 해주면 대화가 되는데, 항상 말을 돌리고 회피했다. 그러다 안 되면 사무처 직원들에게 관련 보고서를 만들어 올리라고 지시했다. 문제를 에둘러서 무력화하는 방식이다. 그도 안 되면 독단으로 결정했다. 용산 문제 논의를 일방적으로 폐회시킨 게 대표적이다.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제기를) 끝까지 묵살했다.
지난해 12월28일, 국가인권위 전원위원회는 ‘용산 참사’에 대한 의견표명을 법원에 제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른바 ‘한나라당 성향’ 위원들이 다수를 차지한 전원위조차 참석자 10명 가운데 7명이 “의견표명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현 위원장은 안건 상정 절차에 문제가 있다며 느닷없이 의사봉을 두들겨 폐회를 선언했다. 어이를 잃은 위원들을 향해 그가 외친 말이 두고두고 회자된다. “독재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문 전 위원은 에서 잔뼈가 굵었다. 2000년 낙천·낙선 운동을 펼친 ‘총선연대’를 현장에서 취재했다. 당시 를 비롯한 보수 일간지는 총선연대에 비판적이었다. 여성운동에 관심이 많던 그는 현장에서, 그리고 신문사에서 고심이 많았다. 더 깊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그 시절 굉장히 괴로웠다”고 말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어, 사안별로 온당하고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말했다.
- 인권위를 둘러싼 편가르기를 어떻게 보나.
= 보수건 진보건 인권은, 안경환 전 위원장이 쓰신 표현인데, 매일 먹어야 하는 양식이다.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인권이야말로 보수의 것이다. 보수의 가치를 흔히 법치주의라고 하는데, 법치의 최고는 헌법이고, 헌법은 곧 인권법이다. 헌법에 나오는 인권을 부인하는 것은 보수가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인권위는 보수의 것도 진보의 것도 아니다. 또는 보수와 진보 모두의 것이다. 내가 (보수 또는 진보의) 어느 편에서 인권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생각한 적이 전혀 없다. 개별 사안마다 인권침해 내용이 무엇인지 열심히 들여다봤을 뿐이다.
- 그렇다면 편파적인 인권위원들은 무엇을 문제 삼는가.
= 예컨대 용산이나 촛불집회 등을 다루면, 인권이 아니라 정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촛불집회를 다룰 때, 인권위는 기본권의 하나인 표현의 자유 측면에서 집회·시위의 권리를 따져야 한다. 시위대가 경찰에 폭력을 행사했다면 그건 형법으로 다뤄 엄벌하면 된다. 인권위의 결정을 두고 정부를 공격하는 게 아닌지 특정 정파의 편을 드는 것을 아닌지 지레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인권을 지켜야 하는 법원이 있는데도 왜 인권위를 따로 만들었겠나. 기존 국가기관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문제를 더 꼼꼼히 챙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권위원은 불편부당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약자·소수자의 입장에 더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전체적으로 사회가 공정해지고 균형을 잡는다. 이런 인권위원의 역할을 하려면 그저 법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약자·소수자의 처지를 느끼고 고민하는 감수성과 애정이 있어야 한다.
- 인권에 대한 현 위원장의 시각과 철학은 무엇인가.
= 잘 모르겠다.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다. 위원장이 생각하는 인권이 도대체 무엇인지 말하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했다. 보수의 관점을 내세워도 좋다. 이러저러해서 반대한다고 조근조근 이야기하면 된다. 그런데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용산 사건을 권고하지 말자는 게 인권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빚어진 일인가. 그건 인권을 돌보지 않겠다는 이야기다. 상임위원들이 인권침해 사안에 대해 반인권·비인권적 결정을 내렸다면, 이를 전원위에 올려 다시 의논하는 게 맞다. 그런데 그런 논의 자체를 안 하겠다면서 상임위를 없애고 전원위에서만 논의하겠다는 뜻이 도대체 뭐냐.
- 앞으로 국가인권위를 어찌 운영해야 옳을까.
= 그 걱정을 많이 했다. 남은 이들이 뭘 할 수 있을까. 이미 그만둔 사람이 너무 많다. 사무처 규모를 줄이면서 그만두기도 하고, 위원장 때문에 제 발로 나가기도 하고. 인권위를 정상화하려면 인권 문제에 애정과 전문성을 갖춘 일꾼을 충원해야 한다. 무엇보다 임명권자가 지금의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인권위 본래의 소명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면 답이 나온다. 그리고 인권위원장을 포함해 인권위원을 잘 임명해야 한다. 궁극적으로는 인권위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헌법기구로 만드는 게 필요하다.
인터뷰 도중, 어느 인권위 조사관이 전화했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문 전 위원의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요.” 문 전 위원은 오히려 상대를 위로했다. 상임위원 사퇴를 발표하던 날엔 다른 조사관이 그의 손을 잡고 울었다. 미혼모 학습권 문제, 연예인 성폭력 문제, 학원 체육계의 청소년 인권침해 문제 등을 함께 조사한 직원들이었다. “그저 권고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현장을 바꾸고 싶었어요. 직원들을 다그치기도 했지만, 서로 감전된 것처럼 열정적으로 현장을 누볐죠. 인권위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내 임기 많이 남았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포기 안 한다’고 말했죠.” 그랬던 그가 남은 임기 100일을 가슴에 묻었다.
문 전 위원은 ‘사임의 변’에서 “인권위 근무의 전반부는 열정과 신바람과 보람의 나날들”이었으나, “최근 상황은 안타까움과 슬픔과 절망의 시간이었다”고 적었다. 그 경계에 2009년 7월 현 위원장의 부임이 있다. 인터뷰가 진행된 4일, 인권·시민단체들은 서울 태평로 인권위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요구는 간단했다. “현병철 위원장, 사퇴하라.”
안수찬 기자 ahn@hani.co.kr</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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