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후보는 재벌 개혁을 숫자가 아니라 (개혁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공약해야 한다.”
경제민주화운동을 10여 년간 벌여온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3월27일 과 한 인터뷰에서 “재벌 개혁이 성공하려면 원칙에 맞는 정책을 꾸준히 일관되게 추진하고, 그것을 제대로 통제할 수 있는 개혁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안식년을 맞아 지난해 8월부터 미국에서 연수를 하다가 일시 귀국했다. 그는 최근 책 를 펴냈다. ‘재벌과 모피아(관치금융의 주역인 경제·금융 관료를 일컬음)의 함정에서 탈출하라’는 부제가 보여주듯,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관한 내용이다. 마침 한국에서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그것들이 최대 화두가 되고 있다. ‘재벌 개혁 전도사’가 미국에서 바라본 2012년 대한한국의 재벌 개혁은 어땠을까?
공저로 과 등 2권이 있었지만, 단독 저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원래 선거에 맞춰 책을 낼 계획이었는가.
연수를 갈 때 두 가지를 목표로 했다. 하나는 책을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집단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책 내용 중에 논란이 될 부분도 있지만 용기를 냈다. 소액주주운동을 한 지난 10년 동안 마음속 얘기를 솔직히 하지 못했다. 이번 책은 그동안의 고민과 사색이 담겨 있다.
“구자유주의, 신자유주의 극복 초석”
선거에서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이 쟁점이 될 것임은 어느 정도 예상됐다. 이런 상황에서 김 소장의 해외연수는 의외의 결정이었는데.
한국에 있어봤자 할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야당에서 정치 참여를 제안하지 않았는가.
비례대표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국회의원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자리다. 사실 나는 연구실에만 앉아 있는 학자가 아니다. 넓은 의미에서 경제개혁운동을 통해 이미 정치 참여를 하고 있다. 다만 방식이 다를 뿐이다.
책의 목적이 개혁과 진보의 실체적 내용을 밝히는 게 아니라 거기에 접근하는 방법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했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1부는 종적으로 한국 경제의 지난 50년간 발전 과정을 조망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 경제에 부과된 ‘경로의존성’(대안은 현 상황을 주어진 조건 속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의 제약이 무엇인지 점검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살펴봤다. 2부는 횡적으로 재벌·중소기업·금융·노동 분야를 살펴보며 부문별 개혁 프로그램의 ‘상호보완성’(제도의 성과는 다른 제도들과 얼마나 긴밀한 보완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의미) 문제에 주목했다.
한국 경제의 핵심적 문제를 ‘신자유주의의 과잉과 구자유주의의 결핍’이라고 압축했다. 대표적 진보경제학자로 불리는 김 교수가 제시한 개혁진보의 첫 번째 과제가 ‘구자유주의 확립’(절차적 민주주의 내지 법치주의)인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웃기지만 분명히 그렇다. 사회 구성원 간 협력과 신뢰의 질서를 만들려면 공정하게 설계되고 엄정하게 집행되는 제도와 정책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르주아의 구자유주의적 과제이며, 모든 개혁과 진보의 전제조건 중 하나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도 총선 공약으로 ‘기업범죄 봐주기 근절책’을 내놓고 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최저 형량을 5년에서 7년으로 높여 재벌 총수가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을 원천봉쇄하자는 것이다.
법 위반자에 대해 경영할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재벌 개혁의 요체다. 신자유주의 극복의 해법이 구자유주의인 것이다.
미국에서 한국의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 논의를 어떻게 보았는가.
처음에는 ‘내가 없으니 재벌 개혁이 더 잘되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당들의 발표 내용 중에는 깜짝 놀랄 만한 내용도 들어 있다. 드디어 재벌 개혁이 본궤도에 오르는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은 과연 개혁이 제대로 될까 의심하는 수준까지 후퇴됐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원칙에 부합하는 정책을 5·10·20년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여러 정책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통합하고 변화하는 경제환경에 맞춰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정책 컨트롤타워가 작동하느냐가 관건이다.
“개혁, 정책 컨트롤타워 작동이 관건”
결국 대통령을 포함해 정책을 결정하고 운용하는 사람들의 팀워크가 중요하다는 말인가.
참여정부에 몇몇 개혁적 인사가 참여했지만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있어 힘을 낼 수 없었다. 대통령 후보는 개혁을 숫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공약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제부처 책임자에 모피아 출신을 기용하지 않고, 금융위원장·공정거래위원장·국세청장·검찰총장 등 4대 사정기관 책임자에 대한 ‘섀도캐비닛’(집권에 대비한 예상 각료 후보) 공개 등의 방안이 있을 것이다. 이런 개혁의 주체 역량 강화와 함께 재벌 위주의 성장 전략에 대한 대안 제시도 필요한 것 같은데.
아직도 적잖은 사람들이 재벌의 적하효과(대기업의 성장 과실이 서민과 중소기업에까지 흘러간다는 이론) 신화를 믿고 있고, 박정희식 성공 신화에 빠져 있다. 이들은 재벌 개혁을 하면 한국 경제의 성과가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한다. 재벌 개혁이 한국 경제를 살리는 선순환의 시작이라는 확신이 없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유권자가 재벌 개혁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정책 내용뿐만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먹고살지에 대한 답을 줘야 한다. 사실 재벌 개혁보다 더 어려운 것은 불공정 하도급, 비정규직, 자영업자 같은 3대 난제다.
3대 난제는 재벌 개혁과 다른 문제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지 않은가.
맞는 얘기다. 재벌 문제와 중소기업 문제는 샴쌍둥이 같다. 그래서 재벌 대책과 중소기업 대책이 한 세트로 나와야 한다. 재벌정책은 결국 투명한 경쟁을 촉진하는 정책으로 풀어야 하고,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지원과 육성 정책이 나와야 한다.
야당에서는 재벌을 종합적으로 규율하기 위해 ‘기업집단법’을 검토하고 있다. 기업집단법은 애초 김 교수가 제안한 것인데.
조만간 보고서를 낼 계획이다. 흔히 기업집단법이라고 하면 독일 콘체른법을 바로 연상하지만, 유럽 전체로 보면 더 넒은 의미를 갖는다. 유럽의 기업집단법 논의를 보면 1980년대는 독일식이 주도했고, 90년대는 다양한 접근 방법이 나타난다. 나도 한국에 독일식 법을 바로 도입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적 존재인 재벌들이 제대로 규율되지 않는 것은 큰 문제다. 회사법·공정거래법·파산법 등 각 영역에 기업집단법 요소를 어떻게 반영하는 것이 좋은지 살펴볼 것이다.
총선 뒤에는 대선이 있다. 또다시 실패한 대통령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할 텐데.
누가 대선에서 승리하든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원한다면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한다. 임기 5년의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보수와 진보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대통령 모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독단과 조급증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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