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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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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현장 하나하나에 시대의 본질이 있다”

한진중공업 등 노동현장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민주당 정치인 정동영 의원…중도를 표방하던 그의 변신은 왼쪽으로 진화인가 좌클릭 시류 영합인가
등록 2011-07-14 07:43 수정 2020-05-02 19:26

정치인들에게도 유통기한이 있을까.
정당은 큰 선거를 앞두고 물갈이를 한다. 정치권 밖에서 신선한 이미지를 지닌, 때 묻지 않은 ‘젊은 피’를 수혈한다. 유명 앵커 출신으로 1996년 14대 총선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한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도 한때는 그런 인물군에 속했다. 지금은 아니다. 정치 입문 이후 줄곧 집중받았고, 2007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큰 표 차이로 낙선하고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번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정치인이 다시 기회를 잡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정 의원은 정치인들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현장을 자주 찾고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해 대중과 소통을 강화하면서 다시 정치의 중심으로 들어서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구인 전북 전주 덕진구보다 한진중공업이 있는 부산 영도를 더 자주 간다는 정 의원을 지난 7월7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2007년 대선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것 같다. 한진중공업 문제도 진보정당 의원들만큼 열성을 보인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다. 국회 상임위도 환경노동위원회 아닌가.
-정 의원의 대표 상품은 노동이 아니었다. 2000년대 초반은 정당 개혁과 정치 민주화였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통일부 장관을 지내면서 남북관계가 주 전공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를 보면서 새로 눈을 떴다.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충격받았다. 세계경제 질서를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수용자였는데 그것이 불철저했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부작용에 대해 대증적으로 접근했지 근본적인 성찰이 없었다. 지난해 8월에 쓴 반성문에도 그런 고민이 녹아 있다. 곧 출간할 책의 일부이기도 하고.

한겨레21 김경호

한겨레21 김경호

-그럼 곧 반성문을 책으로 보게 되는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시절 내가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돌아보는 것이 주 내용이다. 정당 민주화와 남북 문제에 집중하는 동안 대중의 삶의 질은 굉장히 나빠졌다. 두 분야도 중요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에 절규가 들리고 있는데 그런 대중의 일차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 반성한다.

-반성과 사과를 하면 울림이 있는가.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큰 선거를 앞두고 표를 의식해 반성과 사과를 하는 것 아니냐고 얘기하지 않나.
=어제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 갔다. 격월간 발간 10돌 후원행사였다. 몇백 명이 왔는데 민주당은 나 하나더라. 사과한다고 했다. 손학규 대표가 중국 방문 중이니 민주당의 대표 대행자 격으로 사과한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비정규직 양산법이 돼버린 비정규직법이 참여정부 때 개악됐다. 비정규직이 확 늘어나지 않았나. 그 부분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었다. 이인영 최고위원이 며칠 전 토론회에서 정리한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 동일노동 차별 금지를 당론화하려고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자리에서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가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하더라. 일회적인 것이 아니다. 민주당의 변화가 점진적이긴 하지만 진보적 민주당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런 과정에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부유세 신설 주장이나 대학 등록금 대책에서 정 의원은 민주당의 당론에 비해 왼쪽에 있는 것 같다.
=국가운영 원리의 일대 전환이, 구체적인 청사진이 필요하다고 본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때가 생각난다. 제주 경선 당시 어느 신문의 정치 성향 조사를 인용하며 노무현 후보는 과격하다고 표현해 스스로를 중도에 놓으려 했던 적도 있다. 정말 격세지감이다.
=세상이 변했다. 그리고 좋게 말하면 정동영이 진화한 거라 생각한다. 10년 전에는 기회의 창이 닫히지는 않았다. 오늘날에는 거의 닫혔다. ‘격차 사회’가 돼버렸다. 지난해 1년 동안 30대 재벌 총수 가족이 13조원을 벌었다. 반면 대다수 서민 중산층의 실질임금은 4.1% 떨어졌다. 정치란 결국 시대의 요구를 얼마나 잘 받아서 대답하느냐인데, ‘격차’를 줄이라는 게 시대의 요구다.

-그래서 사회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 등에 집중하는가.
=조국 서울대 교수의 표현을 인용하면 ‘입은 자유롭게, 밥은 공정하게’ 하자는 거다. 그게 진보의 가치다. 남북·한반도 문제에 대해서는 나만큼 진보적이고 구체적인 성과를 만든 사람이 없다고 본다. 그런데 밥과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는 떨어져 있었다. 현장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된다. 기존 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으로 발을 내딛기 힘들어진다. 그런데 정 의원은 사과와 반성을 하고 ‘밥’의 문제, 그리고 밥이 걸린 현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대로 ‘진화한 정동영’인지, 앞으로의 정치 일정과 경쟁 상대를 고려한 새로운 전략인지를 평가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한겨레21 김경호

한겨레21 김경호

-지난 7월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친서민을 표방한 홍준표 체제가 출범했다. 어떻게 평가하나.
=상당히 위협적으로 본다. 한나라당도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말만 앞세웠던 친서민을 실천으로 옮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당에 위협이 된다. 어중간하게 가서는 안 된다.

-민주당이 더 왼쪽으로 가야 한다는 뜻인가.
=왼쪽이 아니라 대중 속으로 가자는 거다. 친서민 문제는 유성기업 현장과 연결돼 있다. 밤에는 잠 좀 자자는 것이 노동자들의 요구인데, 경찰이 거칠고 무자비하게 나왔다. 그 뒤에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고 본다. 연봉 7천만원짜리가 무슨 파업이냐고 하지 않았나. 그는 대기업의 이익, 대기업 총수의 이익을 국익이라고 본다.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친서민 구호가 진정성이 있으려면 유성기업 문제를 풀어야 한다. 노동자들이 밤에 잠 좀 자자는데, 이제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한다고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닌가. 폴크스바겐이 1993년, 도요타가 95년에 바꿨다. 현대자동차가 폴크스바겐보다 크지 않나. 이런 걸 선진화하는 게 선진화다. 노동현장 하나하나를 보면 이 시대의 본질이 다 들어 있다.

-그래서 한진중공업도 열심히 가나.
=한진은 이미 개별 기업의 문제를 넘어섰다. 거기에 ‘김진숙’이라는 시대의 상징까지 생겼다. 승자독식의 세상, 벌어진 양극화 속에서 나오는 고통의 외침,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2011년 정도면 유엔 인권선언이나 인권규약, 헌법상의 기본권적 인권이 제대로 존중돼야 한다. 경찰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조남호 소유인 85호 크레인이, 사유재산권이 침해된 상태다. 그래서 법원도 비우라고 했다. 사유재산권이 한쪽 저울에 있다면 반대쪽 저울에는 부당한 정리해고 철회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한 여성 노동운동 지도자의 생명권이 있다. 둘 다 존중해야 하지 않나. 경찰이 재벌 총수의 도구가 되면 안 된다.

-한진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한다고 보나.
=재벌과 대기업의 문제가 농축돼 있다. 지난해 12월 170명을 정리해고한 다음날 174억원을 주주에게 배당했다. 20일 뒤 52억원을 현금 배당하고 임원 월급을 2억원에서 3억원으로 올렸다. 누가 봐도 부도덕하다. 경영상의 압박을 받았으면 고통을 분담해야지, 한쪽은 잔치하고 한쪽은 무자비하게 잘라내고. 이것도 기업의 자유에 속하는 것인가.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대기업이 애국하는 방법이 두 가지다. 하나는 고용이고, 또 하나는 세금이다. 그런데 일감 몰아주기 방식으로 세금 없는 상속을 하고, 정규직은 정리해고하고 비정규직을 확대하지 않나. 반사회적이다.

인터뷰는 좀처럼 현장과 현안을 떠나지 못했다. 다른 화제를 얘기하다가도 되돌이표를 만나 유성으로, 한진으로 돌아왔다. 그만큼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는 방증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기사를 작성하던 7월7일 밤, 트위터에는 정 의원이 크레인 위에서 생일을 맞은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게 케이크를 올려 보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민주당의 다른 의원들이나 당 차원에서는 정 의원만큼 열성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민주희망2012(이전 쇄신연대) 의원들이 같이 간다. 민주당이 큰 방향은 변화 쪽으로 틀었지만 아직 많이 모자라다. 우선 구성원들의 한계가 있다. 하지만 공감대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민주희망2012에서 고문을 맡았는데 어떤 성격의 모임인가. 비주류 모임인가, 아니면 노선투쟁을 위한 모임인가.
=민주당의 노선과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한 모임이다. 지난 1년 동안은 당의 사당화 방지와 투명화에 집중했다. 2기의 목표는 노선과 정체성의 수호다. 지난해 10월3일 전당대회에서 진보적 민주당을 천명했다. 그러면 그 방향으로 진군해야 하는데 아직 머뭇머뭇하고 있다. 최근 포용정책을 둘러싼 논란도 그런 것이다. 평화 노선은 민주당의 중요한 정체성 중에 가장 진보적이고 핵심이다. 한반도 평화에 관한 이념과 정책인데, 그 부분을 흔들면 민주당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손학규 대표의 남북관계, 특히 포용정책에 대한 인식이 민주당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다는 말인가.
=북한의 핵과 인권 문제에 단호히 대응하겠다고 했다. 이건 한나라당의 아류다. 미국 부시 정권 때 만든 북한인권법은 북한 붕괴론에 입각한 것이다. 북한 인권 문제에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표현 속에는 지금의 북한 체제와 공존하기 어렵다, 인정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숨어 있다. 1991년 노태우 정부 때의 남북 기본합의서 1장 1조가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이다. 그것에 기반을 둔 6·15 남북 공동선언, 9·19 공동성명 10·4 정상선언 등이 민주당의 정체성이고, 성과이고 금자탑이다. 그런데 이걸 놔두고 단호한 대응, 원칙 있는 포용정책, 더 나아가 종북진보를 운운했다. 받아들일 수 없다. 손 대표가 이해가 부족했거나, 아니면 정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토론을 제안한 거다.

-정 의원의 북한 인권 개선에 대한 해법은 뭔가.
=1단계는 정치적 인권보다 원초적 인권, 굶어죽지 않을 권리, 치료받지 못해 죽지 않을 권리를 지켜주자는 거다. 식량·비료·의약품을 대대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2단계가 북이 핵을 포기하고 국제사회로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처럼 된다. 1979년 국제사회로 나오기 이전과 이후의 중국 인권은 천양지차다. 이것이 포용정책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10년 동안 해온 비핵화 전략, 북한 인권 개선에 관한 전략이다.

-손 대표가 중국에서 돌아오면 토론할 생각인가. 토론을 통해 정 의원이 생각하는 민주당의 정체성과 다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이 판단할 것이다.

-지난해 2월 민주당에 복귀한 이후 와의 인터뷰에서 2012년 대선 출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당 안팎의 엄중한 상황을 보면 그런 생각 자체가 사치스럽다”고 답했다. 올 연말 민주당 전당대회 이전에 진로를 결정해야 할 텐데.
=연말쯤 결정하려고 한다.

-지난해 정 의원의 보좌진들이 기자들을 상대로 정동영의 강점과 약점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다. 순발력·판단력이 뛰어난 반면 진중함이 떨어지고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고 하는데.
=남들이 보는 게 정확하지 않겠나. 인정하고 보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2012년 민주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있는가. 총선과 대선 승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해법 없이는 집권할 수 없다. 집권이 목적이 아니라 집권 뒤 성공이 목적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의 어정쩡한 민주당으로는 설사 집권한다 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그래서 야권 통합, 복지국가, 단일정당 노선을 설파하고 있다. 민주진보 정부의 주체세력을 만들고, 복지국가 철학을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이 얘기를 이정희(민주노동당 대표)·심상정(진보신당 전 대표)·문성근(국민의명령 대표)·김기식(시민정치행동 내가꿈꾸는나라 공동준비위원장)·백낙청 선생 등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인사, 원로 분들을 만나 설득하고 있다. 답답한 점은 민주당이 잘 안 움직인다는 것이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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