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임신한 여성을 방치할 겁니까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가 2026년 7월23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임신 증상이 모든 여성에게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여성이 입덧과 구토로 임신의 1분기(보통 임신 1~14주)를 보낸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 (…) 특히 어린 나이, 비만, 호르몬 조절을 통한 피임, 최근의 출산 등으로 월경 주기가 불규칙하거나 부정 출혈이 있다면 더욱 알아차리기 어렵다.”(‘턴어웨이’, 다이애나 그린 포스터 지음, 김보영 옮김, 동녘 펴냄, 2021)
권아무개(27)씨는 25살이던 2024년 3월 산부인과의원을 방문했다. 오랜 기간 생리를 안 하고 배가 부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의사는 다낭성난소증후군에 따른 호르몬 불균형으로 배가 부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낭성난소증후군은 배란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생리불순·무월경·난임 등을 유발하는 호르몬 이상 질환으로, 허리와 아랫배 주변에 과도한 지방 축적을 유발한다. 권씨는 ‘그냥 살이 많이 쪘구나’라고 생각했다. 임신 얘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가 처방한 약을 먹어도 계속 배가 불러왔다. 권씨는 3개월 뒤인 6월21일 집 근처에 있는 내과에 가서 복부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임신한 것 같다.” 권씨가 내과 의사로부터 들은 말이다. 바로 다음날 다른 산부인과의원에 갔다. 권씨를 임신 34~36주차 산모로 진단한 의사는 ‘한두 달 뒤에 출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고, 가족과의 관계도 단절돼 있었다. 상황을 고려했을 때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권씨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러모로 아이를 키우기 적절한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권씨는 임신중지를 원했다. 하지만 의사는 ‘주수가 너무 오래돼서 수술은 안 된다’며 분만 시설을 갖춘 다른 의원을 소개했다. 사흘 뒤인 6월24일 새로 소개받은 의원을 방문해 임신중지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같았다.
“그냥 모든 게 비참하고 막막했다.” 권씨의 말이다.
권씨는 6월25일 다른 지역에 있는 산부인과의원에 가서 어렵게 마련한 수술비 900만원을 내고 가까스로 임신중지 수술을 받았다. 권씨는 수술 전 자신의 복부 상태, 태아 초음파 동영상, 수술 이후 회복 과정 등이 담긴 동영상을 제작해 유튜브에 올렸다. 6월21일부터 25일까지의 경험을 ‘지옥 같던 120시간’이라고 표현한 권씨는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
그런 권씨를 보건복지부는 형사사법 절차로 밀어 넣었다. 복지부는 7월12일 권씨, 그리고 권씨를 수술한 병원장을 살인 혐의로 수사해줄 것을 경찰에 의뢰(진정)했다. 변호인 조력 없이 홀로 피의자 조사를 받은 권씨는 2025년 7월23일 살인죄로 불구속 기소됐다. 2019년 4월11일 형법상 ‘낙태죄’ 일부 조항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임신중지한 여성을 처벌하는 ‘자기낙태죄’ 조항은 2021년 1월1일부로 효력을 잃었다. 그런데 권씨는 검찰에서 조사받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들었다. “제가 ‘낙태’가 아니라 ‘살인’이냐고 물었을 때, 검사님이 ‘낙태죄’든 ‘살인죄’든 죄명이 바뀌는 건 의미가 없고 ‘낙태’랑 ‘살인’이 똑같다고 해서 ‘낙태를 인정한다’고 답했다.” 이 대답은 검사 작성 피의자 신문조서 끄트머리에 권씨가 살인 혐의를 인정한다는 취지로 답변한 것으로 기재됐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3부(재판장 이진관)는 2026년 3월4일 권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재판장 김용석)는 7월23일 원심을 파기하고 권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원심과 항소심은 동일한 사실관계를 놓고 서로 다르게 판단했다. 두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권씨는 지인의 도움으로 후기(보통 임신 28주 이상) 임신중지가 가능한 다른 지역 병원을 찾았다. 권씨는, 나중에 수사를 통해 브로커(중개인)로 밝혀졌지만 임신중지 수술을 받을 무렵 병원 관계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태아가 사산된 상태로 분만된다’는 취지의 설명을 지인한테 전해 들었다. 이어 해당 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전에 병원장과 상담실장에게 구체적인 수술 방법을 묻지 않았다. 권씨는 수술 전에 ‘신체에서 배출된 태아의 사체 처리를 동의하며 그 절차를 병원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사체처리동의장에 서명했다.
이진관 재판장은 권씨가 앞서 다른 산부인과의원에서 진료받으면서 고주차 산모로서 곧 자연적으로 분만에 이르게 될 상황임을 알았던 점, 수술 과정이나 태아 사체 처리 방법을 의료진에게 묻지 않은 점, 사체처리동의장에 서명한 점 등을 종합해 권씨에게 적어도 미필적으로나마 출생한 피해자(태아)를 살해한다는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권씨가 자기 몸 안에서 태아가 사산되는지를 적극적으로 확인하지 않은 행동이 ‘의료진이 살아서 태어난 영아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겠다’는 걸 의미한다는 결론이다.
“의료행위의 방법과 위험성, 예상되는 결과를 설명하는 것은 의료인의 법적·윤리적 의무입니다. 그런데 원심은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한 환자에게 ‘왜 먼저 묻지 않았느냐’고 책임을 물었습니다. 그 안에는 여성이라면 임신과 출산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하고, 모든 위험을 예견해야 하며, 모든 결과를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오래된 사회적 편견이 담겨 있습니다. 임신한 여성은 언제나 충분히 준비돼 있어야 하고, 충분히 공부했어야 하며, 충분히 질문했어야 하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 결과까지 자신의 책임이라는 시각입니다.” 간호사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널싱페미’ 김주희 활동가의 말이다.
반면 김용석 재판장은 권씨가 구체적인 수술 방법을 적극적으로 확인하지 않은 것은 앞서 지인을 통해 병원 관계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던 브로커로부터 ‘태아가 사산된 상태로 분만된다’는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라며, 모체에서 살아서 나온 태아가 의료진에 의해 살해되리라는 것을 권씨가 알았거나 미필적으로 이를 인식하고 용인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어 “피고인이 제왕절개 방법으로 시행되는 수술이 태아를 모체에서 배출한 후 인위적으로 살해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정을 알았다거나, 약 34주 정도의 산모가 제왕절개 방식으로 임신중절수술을 받을 경우의 특별한 의학적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권씨가 서명한 사체처리동의장 내용도 태아의 사체 처리를 병원에 위임한다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보일 뿐, 그것이 살아서 나온 태아를 의료진이 살해하는 것을 용인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피고인이 이렇듯 임신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로부터 이 사건 수술을 받게 된 날까지 사이의 짧은 기간 동안 임신중절수술 및 고주차 산모의 임신중절수술의 구체적 방법 등에 관하여 스스로 정확한 의학적 지식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보면, 앞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이 지인을 통하여 의료진으로부터 태아가 모체에서 사산되어 나온다는 말을 들은 것으로 믿은 이상 이에 관하여 어떠한 의심을 하지 않은 것이 피고인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산모의 관점에서 볼 때 통상적이지 아니하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김용석 재판장이 7월23일 선고공판 때 한 말이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 대표는 권씨가 지난 2년 동안 겪은 일이 제도의 공백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했다. “(뉴질랜드 등) 이미 많은 나라는 (당사자가) 임신중지를 위해 병원을 찾아갔을 때 수술을 통한 방법과 약을 이용한 방법 중에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지, 이 당사자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주거 상황, 노동 상황 등 많은 것을 같이 판단해서 더 나은 방법으로 더 안전하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과 같이 중후기를 넘어선 임신중지의 경우에도 의료인이 어떻게 환자에게 안내하고 그에 따라 의료인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명확하게 가이드를 제시하고 있습니다.”(제1603호·1604호 참조)

권씨의 임신중지 수술을 책임진 병원장 윤아무개(81)씨와 집도의 심아무개(62)씨는 원심보다 형은 줄었지만(윤씨는 징역 6년에서 징역 4년, 심씨는 징역 4년에서 징역 2년6개월) 유죄 판결은 유지됐다. 두 사람은 살아 있는 태아를 모체 밖으로 배출해 수술실 밖 냉동고에 넣어 사망하게 함으로써, 모체 내에 약물을 주입해 태아의 사망을 유도한 다음 모체 밖으로 배출할 것을 권장한 국제 임상지침(가이드라인)에 어긋나는 의료행위를 했다.(제1621호 참조)
그런데 임신 몇 주차까지 어떤 방식의 수술(보통 전신마취) 또는 시술(무마취 또는 수면유도)이 가능한지, 시술 또는 수술 전후에 생길 수 있는 여러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이렇다 할 임상지침이 현재 국내에 없다. 이 때문에 의료진 개인이 모든 책임을 지는 현실이 임신중지가 필요한 이들을 더 힘들게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의료진의 유죄는 현재의 의료진이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 더욱 위축시킬 수 있습니다. 임신중지가 필요한 많은 당사자가 병원을 찾기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정부와 의료계는 더 이상 여성 건강을 방치하지 말고, 제도권 안에서 임신중지를 어떻게 안전하고 정당하게 필수의료 서비스로 보장할지 당장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회 부위원장의 말이다. 그러나 국회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위의 표 참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7월23일 항소심 선고공판을 방청한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사람들은 기자회견에서 권씨가 다시금 본인의 삶을 회복하고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사는 7월28일 권씨의 무죄 판결에 불복해 상고장을 제출했다.
현재 국회에는 임신중지 수술의 허용 한계 조항을 삭제하고 수술 외 약물에 의한 임신중지도 가능하도록 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발의돼 있다. 복지부는 7월29일 한겨레21에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의 모자보건법 개정안 논의시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를 반영한 정부 대안 제시 등 국회의 입법 과정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며 “(임신중지 관련) 임상지침은 의료 전문가에 의해 개발 및 검토되어야 할 내용으로, 향후 직역 단체(대한산부인과의사회 등)와의 논의를 통해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로서는 보급 일정 등을 특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
※관련 기사
□제1601호 포커스_후기 임신중지 징역 6년 구형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803.html
<후기 임신중지 여성에 징역 6년 구형, 안전은커녕 범죄자 낙인 찍는 국가>
□제1603호_기승전21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913.html
<위헌 7년 방치, 임신중지 여성이 뒤집어쓴 살인죄>
□제1604호 이슈_임신중지 여성 '살인죄' 유죄 선고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963.html
<국가의 7년 부작위, 임신중지한 여성을 죄인으로>
□제1621호 포커스_소파술만 남았다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9584.html
<‘낙태죄’ 위헌 7년, 안내도 지침도 없이 각자도생된 임신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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