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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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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결사반대에서 개헌 전도사로

노무현 정부 땐 반대하던 이재오 장관이 개헌론 불 지피는 ‘속뜻’은

“여당 해보니 알겠더라… 선진 헌법으로 바꿔야 국민이 편안해진다”
등록 2011-02-17 02:30 수정 2020-05-02 19:26

‘특임장관’이란 생소한 직책은 이명박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08년 2월29일 정부조직법이 개정되면서 생겼다. ‘대통령이 특별히 지정하는 사무 또는 대통령의 명을 받아 국무총리가 특히 지정하는 사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1명의 국무위원을 둘 수 있다.’(17조 1항)는 조항을 신설했다. 한나라당이 제출한 개정안에 나온 특임장관직 신설 목적은 ‘투자유치, 해외자원 개발 등 핵심 국책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난해 8월30일 취임한 이재오 특임장관의 ‘특별한 임무’는 개헌이다. ‘개헌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지난 2월10일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8층 특임장관실에서 1시간 동안 진행된 인터뷰 내내, 이 장관은 개헌과 관련한 두툼한 노트를 앞에 두고 손으로 짚어가면서 개헌의 당위성과 진정성을 설명하려 애썼다. 노트엔 이명박 대통령의 개헌 관련 발언과 2007년 4월 한나라당의 개헌 당론, 그리고 현행 헌법의 문제 조항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질문은 개헌의 현실성에 집중됐는데 답변은 당위성을 향했다.

2월8일과 9일 이틀 동안 한나라당이 개헌을 주제로 의원총회를 했지만 분위기는 대체로 냉랭했다. 개헌 전도사로서 어떻게 평가하나.
매우 성공적이었다. 우선 18대 국회 초(2008년)에 개헌 논의를 시작했어야 한다. 2007년 4월13일 채택된 한나라당의 당론 정신은 18대 국회 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했던 4년 중임제 대통령제를 포함해 폭넓게 개헌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국민과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여러 사건이 있지 않았나. 촛불 사태, 광우병 파동, 글로벌 금융위기, 세종시…. 개헌을 논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다. 지금은 적기다. 올해가 이명박 정부에서 개헌할 최적기다. 정치 개혁을 마무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한나라당이 공식적으로 논의해 기구를 만들었으니 대단히 성공적이다.






‘개헌 전도사’ 이재오 특임장관은 2월10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나라의 기본 틀인 헌법은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며 “(개헌을 하지 않고 다음 정권에) 이 업보를 그대로 물려주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말했다.한겨레21 류우종

‘개헌 전도사’ 이재오 특임장관은 2월10일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나라의 기본 틀인 헌법은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며 “(개헌을 하지 않고 다음 정권에) 이 업보를 그대로 물려주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말했다.한겨레21 류우종

회기 내에 처리되지 못한 법안은 국회의원의 임기 종료와 동시에 자동 폐기된다. 당론을 결정했던 의원들이 바뀌었는데, 17대 국회의 당론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나.

법안은 그렇지만 당론은 국민과의 약속이다. (당시 문서를 펼쳐 보이며) 18대 국회에서 국회가 주도적으로 한다고 쓰여 있지 않나. 또 차기 대통령 임기가 완료될 때까지 개헌이 되도록 최대한 노력한다고 돼 있다. 따라서 이 결정은 구속력을 갖는 것이다.

개헌을 하려면 국회 재적의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데, 한나라당 내에서도 회의적인 의견이 많다. 실제 개헌을 하려면 첫 단추를 꿰는 중요한 의원총회에 직접 나가서 설득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불참했나.

장관이고 국무위원이잖나. 약속대로 국회가 주도해야 한다. 특임장관으로서 주장할 수는 있어도, 의원총회장에 직접 참석해 발언하려면 장관직을 내놔야 한다.

개헌 전도사로서의 활동은 잠재적 대선주자 혹은 정치인 이재오가 아닌 특임장관의 활동이라는 얘기인가.

특임장관은 대통령의 지시 사항을 수행하는 것이 법에 규정돼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8·15 경축사부터 최근 방송좌담회까지 모두 8번 개헌을 일관되게 말해왔다. 특임장관은 그 뜻을 실천하는 게 임무다.

이명박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개헌을 전담해 추진하라는 지시를 한 적이 있나.

그렇지는 않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개헌을 하려면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하다. 한나라당 안에 이견이 적잖고, 야당들은 개헌 논의를 반대한다. 국민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명박 정부에서 헌법을 개정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보는가.

(한숨) 그런 질문 많이 하는데…. 7년 전부터 논의해왔다. 노무현 정부의 시안이 있고, 그 이후 헌법학자와 국회 자문위원들의 논의 결과가 있다. 여야가 합의만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여야의 합의를 위해서는 정치적 여건이 성숙돼야 한다. 지금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정치적 여건이 성숙해지는 데 얼마나 걸리나. 앞으로의 구체적인 절차와 계획은 어떻게 되나.

정치적 여건은 항상 변한다. 옳은 방향 아닌가. 예를 들어 임기를 연장하겠다거나 한 번 더 나서겠다고 하면 옳지 않다. 23년 된 낡은, 유신헌법의 잔재가 남아 있는 헌법을 선진 헌법으로 바꾸자는 거다. 그래야 나라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 선진 헌법으로 바꿔야 국민이 편안해진다. 역사적 명분이 있다. 개헌 자체를 반대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지 않나.

현행 헌법 128조 2항은 ‘대통령의 임기 연장 또는 중임 변경을 위한 헌법 개정은 그 헌법 개정 제안 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효력이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 장관의 ‘옳지 않은 방향’ 대목은 별 의미가 없는 말인 셈이다.

기자가 정치인 이재오를 처음 만난 건 2000년, 그가 두 번째 국회의원에 당선된 해였다. 여당 시절 원내총무,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대여 투쟁의 선봉에 섰던 원내대표·최고위원 시절을 두루 겪어왔기에 ‘확신’에 찬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세월이 흘렀을 수도, 혹은 인터뷰 당시 평소보다 피곤했을 수도 있겠지만 예전의 확신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주관적인 느낌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개헌 전도사가 됐는가. “한나라당이 개헌에 반대하기 때문에 (개헌안 발의를 위한) 국회 의결 정족수인 재적 과반수는 채울 수가 없다. 번연히 통과 안 되는 줄 알면서 개헌안을 발의하는 것은 고집밖에 안 되며, 다른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했던 4년 전 이맘때인 2007년 1월 얘기다.

당시는 대선 1년 전, 각 당의 대선후보 경선 6개월을 앞둔 시점이 아닌가. 느닷없이 헌법을 이렇게 저렇게 하자면 여야 모두가 당황하게 된다. 그때는 당연히 반대했다. 야당의 최고위원이었고, 한나라당이 다 반대였다. 나도 이미 이명박 후보 진영에서 경선을 준비할 때였고….

시한이 촉박해서 반대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다. 노무현 정부 집권 3년차인 2005년 9월3일에 이 장관은 “개헌은 어떤 형태로든 당신의 임기 내에 이뤄질 수 없다” “모든 것이 부담스럽고 자신 없다면 조용히 물러나라”는 공개편지(‘노무현 대통령, 답답한 것은 국민입니다’)를 쓴 적이 있다.

그때는 야당 때니까 개헌에 반대했다. 5년 단임제가 옳다고 생각했다. 여당이 돼서 정권에 들어와 정치를 해보니 이래 갖고는 선진국 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개헌을 하려는지 자세히 얘기하겠다.

우선 그 전에 확인하고 싶다. 당시에는 야당으로서 반대했는데 여당이 돼보니 개헌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다는 말인가.

지난날 개헌을 반대했었다. 입장이 바뀐 건 아니고….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2년 남은 시점에 현재 권력체제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다음 정권이 들어서면 나라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자세히 연구해보니 손댈 데가 너무 많다. 헌법은 나라의 기본 틀이고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 용어, 조문 등 고칠 데가 많다. 이 업보를 그대로 물려주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분권형 대통령 개헌을 처음 언급한 것은 취임 이듬해인 2003년 4월 임시국회 국정연설이다. 요새 이 장관이 주장하는 개헌 방향과 유사한데, 그때도 반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처지에 따라 입장이 바뀐 것 아닌가.

내가 말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노 전 대통령의 순수 내각제는 달랐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대연정 주장은 순수 내각제에 가까웠다. 내치에 대한 언급은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와 권한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우리는 집권을 꿈꾸는 야당이었다. 만약 그때 분권형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제안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한나라당의 개헌의총 이틀째인 2월9일, 전날에 비해 빈자리가 많았다. 오른쪽부터 안상수 대표, 김무성 원내대표, 홍준표 최고위원. 한나라당은 개헌 관련 특별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한겨레 탁기형

한나라당의 개헌의총 이틀째인 2월9일, 전날에 비해 빈자리가 많았다. 오른쪽부터 안상수 대표, 김무성 원내대표, 홍준표 최고위원. 한나라당은 개헌 관련 특별위원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한겨레 탁기형

이 장관이 구상하는 개헌안의 핵심은 무엇인가.

정치를 오래 하고 야당·여당 다 해보면서 정치의 무엇이 문제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됐다. 한국에 맞는, 정치적 갈등을 줄이고 1년 정부 예산에 달하는 사회적 갈등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연구를 오래 해왔다. 불변의 원칙이 뭔가 하면, 대통령은 국민이 뽑아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민주화 투쟁으로 직선제를 하게 됐다. 대통령을 간선제로 국회나 체육관에서 뽑는 것은 옳지 않다는 공감대가 있다. 5년마다 선거를 하면 그 안에 국회의원 선거, 지방선거, 재·보궐 선거를 여러 차례 한다. 그때마다 여야가 갈린다. 야당은 무조건 여당를 공격한다. 나도 10년간 야당 할 때 그랬다. 다음 선거가 있을 때까지 타협과 협상이 아니라 오직 반대 투쟁만 이어진다. 정권이 넘어올 때까지. 국민에게 피해를 준다. 이를 줄일 수 있는 길은 4년 중임제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서 외교·국방뿐 아니라 통일 분야를 맡아 정쟁에서 벗어나고, 내치는 국회가 맡아도 된다. 한국형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라고 할 수 있다.

기자와 이 장관의 기억은 정확히 얘기하자면 모두 착오가 있었다. 2003년 4월 국정연설은 분권형 대통령제 언급이 있었으나 개헌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의 연설 내용(“지역 구도 해소를 위해 특정 정당이 특정 지역에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독차지할 수 없도록 여야가 선거법을 개정할 경우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정당 또는 정치 연합에 내각의 구성 권한을 이양하겠다. 이는 대통령이 가진 권한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을 내놓는 결과가 될 것이며, 많은 국민이 요구하는 ‘분권적 대통령제’에 걸맞은 일이다”)을 순수 내각제 제안으로 받아들인 점은 이 장관의 착오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정치적 의도를 빼고, 말로 표현된 개헌의 진정성만을 놓고 비교하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그것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다 보니 “임기를 마쳐가는 대통령과 주류 세력은 입맛에 안 맞는 차기 주자에게 자신이 누렸던 강력한 권한을 그대로 물려주기 싫은 것이고, 대통령직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주자들은 대통령과 주류 세력이 개헌이라는 대형 이슈를 통해 정치판을 흔들려 한다는 피해의식을 갖게 마련”( 김창균 칼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 장관이 트위터에 시리즈로 올리고 있는 개헌 단상은 지나치게 미시적이거나 ‘선진 헌법’이란 표현처럼 추상적이어서, 지금 무엇 때문에 개헌을 하려는지가 잘 읽히지 않는다. 정치 개혁이나 선거제도에 관한 언급도 없다.

이 대통령이 방송좌담회에서 이미 말하지 않았나. 독일식 비례대표제나 중대선거구제, 권역별 비례대표제 등을 검토하자고. 야당이 참여하면 당연히 선거제도 개편 문제도 함께 논의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시대정신처럼 큰 담론이나 구체적인 조항 등 헌법에 관한 것만 말하고 있다. 사실 국민이 잘 모르니까.

대통령과 장관은 진정성을 가지고 정치 개혁을 핵심으로 한 선진 헌법을 강조하는데 정치권과 언론, 국민이 안 알아주는가.

안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아직) 못 알아주는 것이다. 사실 언론이나 헌법학계가 주장하면 진정성을 알아줄 거다. 지금까지 개헌은 대통령의 임기를 연장하거나 권력을 강화하려는 쪽이 아니었나. 이승만의 사사오입 개헌, 박정희의 유신헌법, 전두환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등 그동안 대통령이 정상적으로 개헌 과정을 발의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나 장관이 주장하니까 뭔가 꿍꿍이속이 있나 보다 생각한다. 60년간 내려온 불신이 6개월 동안 소리친다고 국민이 ‘아, 맞다’ 그러겠나. 꾸준히 해야 한다.

개헌 발의 방식은 두 가지다. 국회 쪽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발의할 가능성이 있나.

없다. 당론은 국회가 주도하라고 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개헌이 안 되더라도 역사적 기록을 남기겠다는 의지로 발의하려 했지만, 우리는 임기가 2년이나 남지 않았나.

인터뷰를 마치고 기사 작성을 위해 회사로 돌아가는 길, 하늘은 간만에 눈이 시리도록 맑았다. 선진 한국, 정치 개혁, 국민 행복 등 달짝지근한 개념어들이 들어찬 머릿속을 비웠다. 민간인 사찰, 연평도 포격, 구제역, 물가 폭등, 전세난, 인권위 직원의 인권위 제소, 젊은 영화인의 비참한 죽음까지 얼핏 떠오른 일련의 사고나 문제들 가운데 낡은 헌법,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와 무엇이 관련 있는지 궁금했다. 대신 지난해 말 집권세력의 예산안 날치기 과정에서 난장판이 돼버렸던 국회가 그려졌다. 그때 의원들을 지켜보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재오 특임장관의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김보협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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