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 불리기 마치고 공격적으로 경쟁에 나선 우리은행 vs 신한은행
▣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1998년 6월29일은 우리나라 금융사에서 ‘피의 월요일’로 기록될 날이다.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은 은행 12개 가운데 동화·동남·대동·충청·경기 등 5개 은행의 퇴출을 공식 발표했다. 은행은 망하지 않는다는 ‘신화’가 처참히 깨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은행 빅뱅’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상업-한일의 합병으로 탄생한 한빛
한 달 뒤인 7월31일 배찬병 상업은행장과 이관우 한일은행장은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두 은행이 합병한다고 밝혔다. 전통의 상업은행과 한일은행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상업은행은 매년 전국 땅값이 공개될 때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상업은행 명동지점(현 우리은행 명동지점) 때문이다. 은행업의 메카로 불리던 서울 명동의 금싸라기 땅에 자리잡은 이 지점은 땅값이 2003년(평당 1억1900만원)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쌌다.
한일은행은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이 회장은 50년대 중반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시중은행 주식 공매에 참가해 한일은행(당시 흥업은행) 주식 83%를 갖게 된다. 조흥은행 주식 55%도 사들였다. 또 흥업은행이 상업은행 지분 33%를 갖고 있어 삼성은 당시 4개 시중은행 가운데 3개 은행을 소유한 셈이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삼성이 갖고 있던 은행 지분은 정부 소유로 넘어갔다.
합병한 두 은행은 한빛은행으로 거듭났다. 일단 몸집은 키웠다. 총자산은 105조원, 자기자본은 4조원에 이르렀다. 하지만 부실은 그대로였다. 부실채권은 14조8천억원으로, 대출금(63조원)의 23.6%에 이르렀다. 1026개 지점도 상당 부분 겹쳤다. 두 은행장은 부실여신을 털기 위해 정부에 공적자금 8조원을 요청했다.
합병 은행은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거치게 된다. 제일은행 명퇴자들의 아픔을 담은 ‘눈물의 비디오’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고통을 겪고 있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때였다. 상업과 한일 두 은행도 97년 말 1만7천여 명에 이르던 정규직원이 합병 뒤 3년 만에 7천여 명이 떠나면서 2002년에는 1만여 명으로 줄었다. 97년 991개에 이르던 점포는 2000년 말 624개로 줄어든다.
한빛은행은 이런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치며 자리를 잡아가다 대우사태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당기순손실이 2조원으로 치솟았다. 한빛은행은 2000년에 터진 서울 관악지점 아크월드 불법대출 사건으로 또다시 추락한다. 결국 2001년 4월2일 정부는 공적자금 12조7천억원을 투입해 한빛·평화·광주·경남은행과 한아름종금을 하나로 묶어 우리금융지주회사를 탄생시킨다.
동전 바꿔주며 후발주자로 나선 신한
“신한으로 합시다.”
20년을 갓 넘은 막내둥이 신한은행은 2003년 100년 역사의 조흥은행을 집어삼켰다. 당분간 두 이름을 함께 쓰다가 2006년 1월 ‘신한’과 ‘조흥’ 가운데 신한이 통합은행 이름으로 최종 결정됐다. 조흥이란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조흥은 외환위기 이전 부동의 1위 은행으로 군림했다. 조흥은 1897년 창립된 한성은행을 모체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이었다. 1982년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 사건으로 한 차례 위기를 겪은 조흥은행은 97년 한보, 삼미, 기아 등 거래기업의 부도로 휘청거리다 대우사태로 추가 부실이 발생해 결국 재기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신한의 시작은 미미했다. 82년 7월 재일 상공인들이 돈을 모아 설립한 후발 은행이었다. 은행법상 최저 자본금 250억원과 279명의 임직원들로 시작했다. 이름을 듣도 보도 못한 이 조그만 은행에 취직하려는 이들이 없어 전국 각지에서 경력사원들을 스카우트했다. 일종의 외인부대로 출발한 셈이다.
규모도 작고 자본도 부족한 후발 은행이어서 영업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고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고객을 찾아나섰다. 은행설립 초기 직원들이 나무 궤짝으로 동전함을 만들어 서울 경동시장 상인들을 찾아가 동전을 바꿔주며 영업을 넓혀나갔다는 전설적인 얘기도 나온다.
당시엔 시중은행을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이라기보다 일종의 정부기관으로 여기는 경우가 흔했다. 이 때문에 직원들 사이에 고객에 대한 관료주의적 생각이 팽배했다. 신한은 후발주자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객만족을 최우선 가치로 치고 나온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후발 주자였던 신한은행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을 인수하게 된다. 이때부터 신한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조직’이라는 별칭도 따라붙는다.
두 은행은 이렇게 몸집을 키우다가 2004년 우리은행에 황영기 행장(현 KB금융지주 회장)이 부임하면서 맞붙기 시작한다.
처음엔 국민은행에 이은 업계 2위 자리를 놓고 격돌했다. 신한은 조흥을 인수해 자산규모를 137조원으로 늘렸다. 우리은행과 하나은행을 제치고 국민은행(204조원)에 이은 업계 2위로 단번에 뛰어오른다.
“이름 바꿔라” “뒤통수 치겠다” 신경전
황 행장은 ‘검투사’란 별명답게 공격 경영에 나선다. 그는 2006년 새해 경영전략회의에서 전국 영업본부장들에게 지휘봉을 하나씩 선물했다. 단순히 지휘를 잘하라는 의미로 여겼는데, 지휘봉 손잡이에 작은 단검이 숨어 있었다. 선물은 ‘경쟁에서 지면 죽는다는 각오로 영업에 나서라’는 행장의 뜻을 품은 것이었다. 황 행장은 “사냥에 나서기 전 둥지를 부리로 깨부수는 ‘장산곶매’처럼 비장한 각오로 출정하자”며 전의를 불태웠다. 우리은행 직원들은 결사적으로 영업에 나섰다. 2005년 우리은행 자산은 140조원, 신한은행은 163조원이었으나 다음해엔 우리은행이 186조원, 신한은행이 177조원으로 역전됐다. 하지만 황 행장의 공격 경영은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뒤 7천억원가량의 투자 손실을 우리은행에 입혔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신한은 지주회사 차원에서 몸집을 늘려갔다. 2006년 카드업계 1위인 LG카드를 6조6천억원에 인수했다. 우리은행도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공적자금이 들어간 금융회사가 공적자금이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인 LG카드를 인수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두 은행의 경쟁은 은행장들의 신경전으로 이어졌다. 2006년 신상훈 신한은행장은 “우리은행이 스스로 ‘우리’라는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시중은행들은 고유명사인 ‘우리은행’ 때문에 ‘우리 은행’이라는 보통명사를 못 쓰고 ‘당행’이나 ‘저희 은행’을 써야만 했다. 이 때문에 신한을 비롯한 시중은행들은 ‘우리(Woori)은행’을 ‘워리(Worry)은행’으로 비꼬아 부른다. 신 행장의 말에 황 행장은 곧바로 “우리 등에 칼을 대면 우리도 뒤통수를 치겠다”고 응수했다. 정통성에서도 두 회사는 격돌한다. 신한이 조흥을 인수해 은행 역사를 단번에 100여 년으로 늘리면서 최고(最古) 은행임을 강조하자, 우리은행은 외국인 주주가 절반이 넘는 시중은행과 달리 정부가 대주주인 점을 들어 ‘토종론’을 주장하며 맞섰다.
2007년 3월에는 우리은행이 비정규직원 3천여 명을 모두 정규직원으로 전환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대부분의 은행들이 우리은행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우리은행은 삼성 비자금 사태와 관련해 금융실명법을 어겨 금융감독위원회로부터 ‘기관 경고’라는 징계를 받았다.
두 은행은 확연히 다른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은행은 10년도 안 돼 김진만(한빛은행장)-이덕훈-황영기-박해춘-이종휘 행장 등 여섯 명의 행장이 나왔다. 신한은행은 라응찬 신한금융지주회장이 91년 이후 계속 지주회사의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고, 신상훈 신한은행장도 2003년 이후 5년째 은행을 이끌고 있다.
우리은행은 앞으로 민영화라는 거대한 산을 넘어야 한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8월28일 “산업은행, 우리금융, 기업은행 순서로 민영화를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금융 민영화의 경우 정부는 매각대금을 높이기 위해 시장 상황을 고려해 지분 매각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두 은행의 맞수 경쟁은 은행 창구가 아닌 체육관으로도 이어진다. 바로 여자 농구다. 두 은행의 여자 농구팀은 1∼2위를 달리고 있는 맞수다.
앞으로 두 은행 중 어느 은행이 ‘리딩(선두) 은행’이라는 축배를 들게 될까? 아마도 ‘블루오션’에 먼저 나서거나, ‘장산곶매’와 같은 투지가 있는 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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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훈 신한은행장(왼쪽)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정통 뱅커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조직’이라는 신한은행 문화에 걸맞게 신 행장도 평범한 은행원에서 출발해 비범한 CEO 자리에 올랐다. 신 행장은 전형적인 ‘덕장’ 스타일이다. 누구나 격의 없이 대하는 특유의 친화력이 강점이다. 푸근한 인상이지만 업무 처리에선 빈틈이 없다. 영업·여신심사·자금흐름·국제업무 등 은행 경영의 핵심을 꿰고 있다. 영업지점장 때는 전국 영업점 업적평가대회에서 두 번이나 대상을 받았다. 조흥은행과의 통합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신 행장이 즐겨 강조하는 말이 ‘블루오션’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처럼, 좁은 국내 시장 레드오션에서 경쟁하기보다 해외로 나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자는 것이다. 2006년 신 행장은 여행가 한비야씨의 라는 책을 소개하며 “앞으로는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지도상에 없는 분야로 길을 뚫고 블루오션을 개척하자”고 강조했다.
이종휘 우리은행장(오른쪽)은 정통 뱅커이면서도 금융권 전반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나다. 1970년 한일은행에 들어가 재무기획팀장, 경영기획본부장, 수석부행장 등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다. 업무에는 치밀한 스타일이지만 성품이 온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외환위기 당시 부실기업 워크아웃을 주도하는 등 기업금융에 탁월한 실력을 보였다. 우리은행 수석부행장 시절에는 부서 업무 상충 문제를 합리적으로 조율했다.
이 행장은 외유내강형 경영 스타일로, 전임 박해춘 행장과 종종 비교된다. 박 전 행장이 과감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영업 전략을 추진한 데 반해, 이 행장은 조용한 내실 경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박 전 행장은 첫 공식 업무로 중소기업 공장을 찾았다. 하지만 이 행장은 취임 다음날 대기업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포스코센터 지점을 찾아 직원들을 격려했다. 박 행장이 중소기업 대출 확대로 성장동력을 찾았다면, 이 행장은 우리은행 최대 강점인 대기업 대출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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