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현 자유기고가 groove5@naver.com
무제[muζe] 無題. 명사
제목이 없음. 흔히 시나 그림, 노래 따위에서 제목을 붙이기 어려운 경우에 제목 대신에 사용한다. 이름표만 보고 내용에 눈길을 주지 않는 감상자들에게 알맹이를 봐달라고 부탁을 하거나, 딱히 마땅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을 때 창작자가 택하는 제목 아닌 제목. 삼성그룹 비자금 의혹을 수사 중인 조준웅 특별검사팀을 헛갈리게 하려고 고른 제목은 아니다.

최근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그룹이 비자금으로 구입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제시한 고가 미술품 30점의 목록에는 ‘무제’라는 제목의 미술품이 4점 포함돼 있다. 특검팀은 삼성에버랜드 창고에서 나온 수천 점의 그림들이 삼성의,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그림인지, 홍라희의, 비자금에 의한, 홍라희를 위한 그림인지 구별하는 과정에서 ‘무제’와 일련번호만 다른 같은 제목의 연작들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무제’는 순수했다. 법학교수직을 마다한 채 서른 살에 무작정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현대 추상예술의 선구자 칸딘스키가 그린 최초의 추상 수채화는 였다. 이제 ‘무제’는 사야 제 맛이다. 12월5일 마크 로스코의 추상화 는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 낙찰가 기록 경신 여부로 관심을 모았다가 유찰됐다. 지난해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마크 로스코의 가 673억원에 팔려 전후 미술품으로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기 전까지 최고 낙찰가는 2006년 11월 거래된 윌렘 드 쿠닝의 1977년작 였다. 창고에 갇혀 빛을 잃고 관람자를 잃은 삼성에버랜드의 수천 점이 진짜 ‘무제’다. 어쨌든, 좋은 그림 같이 좀 봅시다. 떳떳한 돈으로 떳떳하게 사서 떳떳하게 자랑합시다. 세기의 부호는 입장료 저렴한 개방형 사설 미술관으로 돈자랑을 한다는 게 역사적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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