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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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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 빛을 보았다

등록 2003-10-23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선태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 루쉰 ]

<font size="2" color="663300">식인의 세계에서 찾은 새로운 희망의 길… 정치의식 함양·작가정신 발견 등 영향받아 </font>

1910년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기 직전부터 한국의 번역은 ‘제국’ 일본의 압도적인 영향 아래 놓인다.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침략은 문화적 침략을 그 동력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이를 놓쳤을 리 없는 일본은 스스로가 ‘근대의 대변자’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이 번역한 ‘서양’을 이 땅에 이식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위한 터 다지기에 주력해온 터였다. 1910년 이후에는 식민지의 문화적 대지에 대대적인 ‘융단폭격’을 퍼붓는다. 번역의 창구도 일본으로 일원화되는 듯했고, 많은 경우 실제로 그러했다. 일본을 경유하지 않은 ‘근대의 번역’을 식민지 조선이 감당하기에는 폭과 깊이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서양 번역 ‘실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제국 언어 벗어나 정신적 자양분 섭취

문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어로 번역된 외국문학과 일본 근대문학이 ‘식민지 조선’의 문학판을 틀어쥐고 있었다. 대부분 ‘제국의 언어’를 매개로 신지식을 습득한 지식인들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김동인이 이라는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외국문학을 “조선문으로 이식(번역)할 번거로운 의무에서 벗어나” 편식을 즐기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 아닌가. 소수이긴 하지만 제국주의 일본이 마련해준 ‘언어의 식탁’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정신적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 번역가들이 있었다. 한 걸음 비껴서서 대세나 주류에 균열을 일으킬 ‘폭약’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법, 중국 근대가 낳은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한 유수인(柳樹人)·양건식(梁建植)·정래동(鄭來東)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근대 중국의 현실과 온몸으로 싸웠던 ‘위대한 작가’ 루쉰(魯迅·1881~1936)과 식민지 조선의 만남을 주선한 것도 이들의 번역이었다. 유수인이 처음 번역한 루쉰의 대표작 가 식민지 조선의 문단에 등장한 것은 1927년 8월호 잡지 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1928년에는 양건식이 그가 한국어로 옮긴 작품들을 묶어 을 펴내는데, 여기에는 루쉰의 를 비롯해 궈모뤄(郭沫若)와 위다푸(郁達夫) 등 중국 근대 작가들의 작품 15편이 실려 있다. 이후 등 루쉰의 주요 작품들은 식민지 조선의 문단에 눈에 띄진 않지만 의미 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루쉰의 첫 작품인 는 저 유명한 ‘환등기 사건’ 이후 의사의 꿈을 접고 작가로 ‘전향’한 루쉰이 전통의 무게에 짓눌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중국의 현실을 향해 쏟아놓은 침통한 납함(*口+內 喊), 역사의 지반을 뒤흔드는 침울한 외침이었다. 루쉰은 이라는 글에서 중국의 역사를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시대와 잠시 안전하게 노예가 될 수 있는 시대의 순환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한 바 있거니와, 에서는 그것을 ‘식인의 역사, 식인의 전통’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와 같은 비판적 인식은 치열한 대결과 뜨거운 사랑을 통해 획득된 것이어서 전통이나 역사를 맹목적으로 매도하거나 옹호하는 태도와 뚜렷이 구분된다. 이는 ‘정신승리법’으로 무장한 중국의 민중 ‘아Q’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더불어 루쉰의 사상을 형성하는 두 축을 형성하고 있다.

근대를 일깨우는 섬뜩한 전율 느껴

이러한 역사 인식과 민중 인식에 바탕을 둔 루쉰의 글은, 그것이 시든 소설이든 아니면 ‘잡문(雜文)’이든 근대 중국이 처한 역사적 현실과 부딪치는 지점에서 생성된 것이어서 예상치 못한 예리한 섬광을 보았을 때처럼 섬뜩한 전율을 자아낸다. 풍자와 유머, 짙은 페이소스와 아이러니가 빚어내는 전율! 그의 소설들을 비롯해 잡문/잡감(雜感)들 곳곳에서 수많은 아포리즘들이 빛을 발한다. “죽어 넘어진 어미를 먹어치우면서 힘을 기르는 사자새끼처럼 힘차고 용감하게, 나를 떨쳐버리고 인생의 길로 나아가거라… 가거라, 아들아!” “희망이란 땅 위의 길과도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에는 길이란 게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먹으로 쓴 거짓말은 피로 쓴 진실을 감추지 못한다” 등등. 삶과 역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내공’에서 발효된 이러한 아포리즘들은, 자신의 글을 견고한 적진을 향해 던지는 ‘투창과 비수’에 비유했듯, ‘쇠로 만들어진 방’에 갇힌 근대 중국을 일깨우는 날카로운 무기가 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마오쩌둥은 에서 루쉰을 “중국 문화혁명의 주장(主將)으로서 위대한 문학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자 혁명가”라고 하여 민족적 영웅으로 추어올린 바 있지만, 사실 그는 그 어떤 ‘주의’나 집단에도 예속되기를 거부하는 ‘진정한 경계인’으로서 쉼 없는 사랑과 생성의 삶을 산,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위버멘쉬(초인)의 삶을 꿈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암흑이 나를 삼켜버릴지도 모르고 광명이 나를 지워버릴지도 모르는” 위기감 속에서, 암흑이라는 전근대와 광명이라는 근대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그림자처럼 방황하다 기꺼이 암흑에 잠겨 한점 ‘불꽃’이 되기를 꿈꾸던, 진실로 생명을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균질적인 삶을 강요하고, 생명을 억압하는 근대와 숨이 멎기 직전까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결을 펼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전통이라는 망령을 짊어지고 주검처럼 잠든 수많은 중국의 민중을 바라보며, 이들에게 비수를 꽂으려 달려드는 근대라는 괴물을 앞에 둔 식인의 세계와 다름없는 ‘지옥 가장자리 황량한 곳’에서 몸부림과 절망과 고뇌 끝에 발견하고자 한 것, 그것이야말로 루쉰적 사유의 고갱이라 할 수 있다.

사대적 추종만이 살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와 을 비롯한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은 루쉰과 중국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이육사는 그에게서 중국 민중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강한 정치의식을 보았고, 정래동은 프롤레타리아 사상가이자 진보적인 작가의 정신을 발견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중국의 역사와 전통과 민중과 자신을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무덤’ 저 끝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의 빛을 찾으려 고난에 찬 싸움을 이어나갔던 루쉰과 함께, 또 다른 ‘무덤’(염상섭)인 식민지 조선에서 생명을 억압하는 근대성으로 무장한 지배세력을 향한 ‘반역’을 꿈꾼 사람은 없었을까.

번역가를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했던 루쉰은 번역이 ‘창조적 배반’에 불길을 댕기는 힘을 내장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 번역이 ‘사대적 추종’을 조장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식민 본국’ 일본을 거치지 않고 루쉰의 작품을 비롯한 중국 근대의 문학을 직접 번역했다는 것은, 비록 제국주의 일본의 ‘융단폭격’에 대항하기엔 미미했을지언정, ‘사대적 추종’에서 벗어나 어디에도 없을 것처럼 보이던 ‘희망’의 길을 향해 내디딘 의미 있는 걸음이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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