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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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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문 열면 서구가 보일까

등록 2003-09-07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선태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 존 버니언의 ]

<font size="2" color="663300">기독교를 정신적 무기로 삼은 계몽적 지식인들… 종교에 기대어 문명세계에 대한 열망 담아 </font>

이광수는 1917년 잡지 에 기고한 라는 글에서 기독교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여덟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서양 사정의 전파 △도덕의 진흥 △교육의 보급 △여성의 지위 향상 △조혼의 폐단 교정 △한글의 보급 △사상의 자극 △개성의 자각 또는 개인의식의 자각. 일목요연하다.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그가 보기에 기독교는 ‘문명의 서광’을 조선에 선물한 ‘큰 은인’이었다. 이광수만이 아니라 계몽적 열정으로 자신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많은 지식인들이 서양문명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다 발견한 것이 바로 기독교였다.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원할 기독교

서재필과 윤치호 등 기독교 세례를 받은 의 필진들은 물론 전통적 교양에 뿌리를 둔 신채호와 박은식 등도 ‘기독교의 힘’을 높이 평가하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았다. 예컨대 신채호를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던 근대 계몽기의 대표적 신문 에 실린 의 필자는 기독교와 애국심, 기독교와 국가의 부강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역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상제(上帝)로 대주재(大主宰)를 삼고, 기독으로 대원수를 삼고, 성신(聖神)으로 검을 삼고, 믿음으로 방패를 삼아 용맹 있게 앞으로 나아가면, 누가 죄를 자복(自服)하지 아니하며, 누가 명을 순종하지 아니하리오. 지금 예수교로 종교를 삼는 영·미·법(프랑스)·덕(독일)국의 진보된 영광이 어떠하뇨. 우리 동포들도 이것을 부러워하거든 그 나라들의 숭봉(崇奉)하는 종교를 좇을지니라.” 이처럼 기독교는 일개 종교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도탄에 빠져 신음하는 민족을 구원하고 국민의 사상을 개조할 강력한 ‘정신적 무기’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종교의 전파는 번역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중국의 불경 번역과 성서의 대대적인 번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명하게 드러나거니와, 번역사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종교 경전의 번역은 문화의 교류를 주도하는 핵심요소였으며, 한국의 기독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교단의 전폭적 지원과 선교사들의 종교적 열정이 번역을 추동하는 힘이었다는 것은 새삼 말할 것까지도 없다. 개신교로 좁혀 말한다면, 근대 계몽기 한국에서 그 어느 신도나 전도사보다 번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바로 캐나다 출신 선교사 게일(James S. Gale·1863∼1937)이었다. 역대 선교사 중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그는 한국의 문화 전반에 걸쳐 폭넓은 식견을 지니고서 왕성한 번역활동을 펼친다. 게일은 등 고전문학을 비롯하여 등을 영어로 번역했으며, 한국에 관한 저서를 여러 권 쓰기도 했다. 특히 1897년 그가 편찬한 은 한국의 사전 역사에서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출중한 번역가 게일은 한국의 고전들을 영어로 번역했을 뿐만 아니라 를 비롯한 기독교 관련 서적들을 한국어로 옮기기도 했다. 그야말로 ‘쌍방향 번역’을 능숙능란하게 수행한 번역의 대가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아내와 함께 번역하여 1895년 원산에서 간행한 (The Pilgrim’s Progress)은 와 더불어 한국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한 책으로 손꼽힌다. 영국의 작가 존 버니언(John Bunyan·1628~88)이 쓴 이 작품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처자를 버리고 성서 한권을 들고 파멸의 도시를 떠나 낙담의 늪, 죽음의 계곡, 허영의 거리 등에서 수많은 유혹과 시련을 통과하여 천국의 도시에 이르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요컨대 ‘천국으로 가는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제목대로 신앙의 형성 과정을 형상화한 종교적 우의소설(寓意小說)이라 할 수 있다.

최고의 번역가 게일… 근대의 태생적 숙명

그런데 원문에는 없는 삽화를 곁들인 한국어본 은 종교적 영향력 못지않게 번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어로 된 텍스트를 직접 한국어로 옮긴 ‘희귀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근대 계몽기의 번역은 중국어(한문)나 일본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다시 한국어로 옮긴 것이 대부분이며, 서양의 원전을 번역한 예를 발견하기란 풀숲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렵다. ‘제국’의 힘은 번역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메이지시대 일본이 인적·물적 자원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서양’을 직접 번역한 것에 비해, 한국은 일본을 경유하여 ‘서양’을 중역(重譯)하는 게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일본을 통해 근대를 바라보아야 하고 또 배워야 하는 운명! 이를테면 제국과 식민지의 구도가 번역 과정에서 이미 그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서양=영어’를 직접 번역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한글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문체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의의를 지닌다.

하지만 번역자가 한국인이 아닌 외국의 선교사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운명’을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번역자의 국적이나 피부색이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마는, ‘제국’을 아버지로 둔 사람의 시선에 포착된 텍스트와 ‘반식민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눈이 발견하는 텍스트는 엄연히 다를 게 아닌가. 게일은 한국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한국인을 깊이 동정했다고들 한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해’와 ‘동정’은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보이는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 지속적 신뢰를 보내는 데는 많은 망설임이 따른다. 윤치호의 말마따나 ‘조선 고금 명현과 역사와 명문집에 능통한 조선학의 거인’이었던 최고의 번역가 게일. 그런 그가 ‘조선의 다양한 정령’들을 ‘성정이 악하여 인간에게 불길함과 비애를 가져다준다’고 평가하는 대목()에 이르면 망설임은 의혹으로 바뀌고 만다. 한국 근대의 태생적 숙명을 번역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은 천국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종교소설’이다. 그럼에도 와 짝을 이룬 ‘전도용’ 책자였다고 치부해버리기엔 뭔가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말한 대로 한국의 계몽적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은인’으로, 문명을 떠받치는 힘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에서 주인공 ‘크리스천’이 간난신고 끝에 도달한 ‘천국’을, 저 빛나는 ‘문명세계’의 비유로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근대 계몽기 담론 공간에서 지옥·천당·죄와 벌 등 기독교적 수사학이 곳곳에서 출몰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들에게 문명세계는 천국이었고, 그 나머지는 악귀가 출몰하는 지옥이었다. 기독교적 수사학은 ‘크리스천’이 되어 악귀들이 들끓는 야만의 땅을 벗어나지 않는 한, 지옥으로 떨어져 마땅하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따라서 “만약에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분명히 20세기라는 시대는 단독으로 황제를 무너뜨리고 그가 대표하는 모든 것을 상실케 했을 것”이라는 게일의 발언은 결코 돌출적인 게 아니었던 셈이다.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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