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시내암의 수호지] 모던 보이, 중국 고전에 빠지다

등록 2003-12-04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선태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 시내암의 ]

<font size="2" color="663300">1930년대 최고의 모더니스트였던 박태원이 중국의 ‘옛 소설’을 번역한 까닭은 무엇일까 </font>

1942년 8월호 월간 종합잡지 의 화보란에 ‘바다의 기념일 제전(祭典)’이라는 제목 아래 일장기가 내걸린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다. 그리고 사진 설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창망한 동반구(東半球)의 대해원(大海原)에 승첩의 일장기가 휘날리고 있는 대동아 성전의 파도를 타고 해양민족의 의기도 장히 20일의 제2회 바다의 기념 제전이 거행되었다. 메이지 9년 7월 황공하옵게도 메이지 천황께옵서 태평양의 거치른 풍랑을 헤치옵시고 하코다테로부터 요코하마에 어입항(御入港)하옵신 이날을 우러러 생각할 때 일억의 혈조는 다만 일사순국(一死殉國) 우리들의 생명선인 바다의 확보에 한층 더 결의를 굳게 한다.” 이렇듯 ‘대일본제국’이 수행하고 있는 ‘성전’(聖戰)을 독려하는 사진 옆에는 “우리는 황국신민이다”로 시작하는 ‘황국신민의 서사’가 새겨져 있다. 바야흐로 ‘대일본제국’의 명운을 건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일 때 간행된 이 잡지에는 폭력적인 군국주의가 몰고 온 어둠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당대의 손꼽히는 스타일리스트의 ‘외도’

조금은 의아스럽게도 ‘국어’인 일본어와 ‘지방어’인 조선어가 뒤섞여 있는 이 잡지에 1930년대 최고의 모더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던 박태원(朴泰遠·1909~86)이 번역한 이 연재되기 시작한다. 이태준·정지용·김기림·이상·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결성해 활약하면서 도쿄에서 보고 배운 근대적 풍경에 흠씬 빠져 있던 ‘모던 보이’ 박태원이 을 번역한 이유는 무엇일까. ‘갓바머리’에 대학노트를 끼고 경성거리를 헤매면서 과 등을 구상하고 썼던 당대의 손꼽히는 스타일리스트 박태원이 어울리지 않게시리 중국 고전으로 빠져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을 비롯한 톨스토이의 작품들과 헤밍웨이의 등 서양의 작품들을 적잖이 번역하던 그였기에 궁금증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하기야 동서양의 ‘고전’을 동시에 번역한 사람이 박태원 한 사람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중국의 소설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중국문학 연구자이자 번역가였던 백화 양건식에게서 독서지도를 받은 적이 있는 그는 이미 명대(明代)의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을 편집·번역해 1939년 이라는 제목으로 간행한 바 있었다. 박태원의 번역은 우연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것은 양건식이 루쉰을 비롯한 중국의 근대소설을 번역 대상으로 한 것과 달리 박태원은 중국의 ‘옛 소설’에 관심을 쏟았다는 점이다. 을 번역하면서 그 이유를 한마디쯤 남겨두었을 법한데도 그는 말이 없다. 번역 동기랄까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실마리를 남겨두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 돌아가기로 하자. 번역은 이질적인 문화와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감각과 사유방법을 확산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그런데도 한국의 창작계나 학계에서 번역은 오랫동안 온전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했으며,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기껏해야 번역은 창작의 여기(餘技)로 여겨지거나, 자신이 읽은 외국의 텍스트를 ‘공부 삼아’ 번역하는 정도로 간주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번역은 ‘팔리지 않는 작품’을 쓰는 작가들이나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한 학자들의 ‘부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번역가는 문화의 이동과 변용을 이끄는 사자(使者)’라는 얘기는 무색해지고 만다.

식민지 작가의 고민… 비극적 파탄 예고

박태원의 번역의 경우 사정은 어떠했을까.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대동아공영권의 깃발 아래 아시아 전체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고 간 시대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친일소설이나 일본어 소설을 쓰는 길말고는 창작의 열정을 부릴 곳이 없던 어느 모더니스트의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을 번역함으로써 양산박을 근거지로 봉기한 민중들의 저항을 우회적으로 말하려 했던 것이라 판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뛰어난 ‘기교’를 바탕으로 식민지 문단에서 단연 돋보이는 소설들을 창작한 사람 중 하나였던 그가 등 친일소설로 나아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 ‘팔리지 않는 소설’로는 유지할 수 없는 생활이 그를 압박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그랬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언할 수는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새로운 창작 에너지 또는 새로운 감수성과 사유방법을 얻기 위해서였을는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 에 나오는 인물의 말을 빌리자면 ‘양옥집’을 짓기 위한, 다시 말해 모더니즘 소설을 쓰기 위한 일종의 모색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해방 뒤 그가 간행한 일련의 번역소설들과 월북한 뒤 그가 창작한 역사소설들을 보면 이 역시 분명하진 않다. 적어도 한 가지, 제국주의 일본이 ‘성전의 파도를 타고’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 ‘일본 국민’으로 살지 않을 수 없었던 식민지 작가의 고민과 비극적 파탄을 예고한 것이 번역이었다는 점만은 확실하다.

최근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를 다시 번역하면서 호사가들 사이에서 번역을 둘러싼 논쟁이 꽤나 뜨겁게 일고 있는 모양이다. 그의 보다 훨씬 앞서 간행된 또 다른 ‘대표작가’의 가 출판시장에서 벌이는 한판 대결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관심도 자못 뜨겁다. 어느 사이엔가 ‘한국인이라면 일생에 세번은 읽어야 할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사나이들의 의리와 배반, 음모와 술수’로 가득한 가 ‘난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어버린 저간의 사정을 추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찌됐든 와 더불어 중국의 대표적인 고전으로 손꼽히는 과 도 꽤 알려진 작가들에 의해 번역 또는 리메이크되는 예를 볼 수 있거니와, 그렇다면 그들이 이 작품들에 관심을 쏟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역사 · 전기 소설로 나아가는 징검다리?

박태원의 경우를 참조해 추론하자면 적어도 다음 네 가지 중 하나가 그 답일 것이다. △훌륭한 고전은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새롭게 번역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번역이 이에 미달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상업주의로 무장한 출판사의 ‘유혹’에 이끌려 잠시 ‘외도’를 하고 싶어서 △창작의 에너지가 고갈되어 새로운 자양분을 얻기 위해서 △오대양 육대주를 가로질러 ‘성전’을 펼치고 있는 자본주의가 야기한 시대상황이 하도 엄혹한 나머지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쓸 수 없어서. 어느 것일까. 근대소설의 첨단을 걷다 의 번역을 거쳐 역사소설과 전기소설로 나아간 박태원은 이 물음에 뭐라고 답할까. 속설에 따르면 사지선다형 문제는 보기가 긴 게 답인 예가 종종 있다는데 과연 그러할지, 모를 일이다.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