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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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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언어에 정치성 마비

등록 2003-10-10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선태의 번역과 근대 | 루소의 ]

<font size="2" color="663300">뿌리 내릴 토양을 잃어버린 정치사상의 굴절… 자연주의자로 비정치적 상식 전파에 이바지 </font>

“인간은 본래 자유인으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디에서나 쇠사슬에 얽매어 있다. 더 심한 노예 상태에 처해 있는 이도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지배자로 믿고 있다. 어떻게 해서 이런 뒤바뀜이 생겨났는지 모를 일이다. 그럼 무엇 때문에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적 변화 꿈꾸던 지식인의 텍스트

근대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자 문인인 루소(J. J. Rousseau·1712∼78)의 대표적 저작 (1762)의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지닌 인간을 ‘쇠사슬’로 얽매고 있는 전제주의에 저항하고, 협약(協約)에 기초한 공동체 실현의 방향을 모색했던 의 ‘혁명적 선언’은 근대계몽기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루소의 이 저술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에 토대를 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었고, 이를 현실로 옮기기 위해 힘겨운 투쟁을 전개한다.

‘사회계약’을 통해 자연적 신분에서 시민적 신분으로 옮겨간다는 이 책의 선언은 프랑스혁명의 슬로건으로서 그 영향력을 유감 없이 보여주었으며, 그 여파는 번역을 통해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1875년 일본의 계몽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이기도 했던 나카에 초민(中江兆民)이 을 (民約論)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면서 루소는 동아시아 근대지성사에 본격적으로 그 이름을 내민다. 먼저 일본의 경우, 나카에 초민에 의해 번역된 은 187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에 걸쳐 전개된 자유민권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으며, 그 결과 일본의 헌법이 만들어지고 국회가 문을 열었다. ‘아시아의 모범생’으로서 근대국가를 ‘성공적으로’ 만들어간 메이지 일본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중국과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자유민권운동의 추동력이 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번역된 한권의 책이 혁명적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예상이 현실로 다가온 순간이 아닌가. 그렇다면 ‘혁명적 변화’를 꿈꾸던 중국과 한국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이 번역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무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일본으로 망명해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친 량치차오(梁啓超)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1901년 그는 나카에 초민의 번역본을 토대로 하여 을 요약·정리한 (盧梭學案)을 간행한다. 이 글에서 량치차오는 루소의 ‘민약’을 인민의 자유와 평등을 근간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이렇게 주장한다. “자유는 권리의 근본이고 책임의 근원인 까닭에 책임은 피할 수 없고 권리는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자유권은 도덕의 근본이며 이것 없이는 인간이 인간일 수 없다. 노예일 따름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면서 루소는 일약 근대계몽기 한국의 ‘정신계’를 뒤흔드는 인물로 떠오른다.

루소의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이 ‘로사민약’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어 선을 보인 것은 1909년 8월4일치 을 통해서였다. 모두 4부로 구성된 가운데 1부만을 번역해 연재(1909년 9월8일까지)한 글이지만, 지금까지 간접적이고 단편적인 인용이 고작이던 상황에서 저널리즘을 통해 루소 사상의 중요내용들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소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 의의는 결코 만만치 않다. 사실 근대계몽기 한국에서 ‘법국(法國)’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프랑스는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1900년에 (法國革新戰史)라는 제목으로 프랑스혁명사가 소개되면서 볼테르·디드로·몽테스키외 등이 이미 알려져 있었으며, 프랑스가 낳은 나폴레옹은 ‘구국의 영웅’을 갈망하던 한국인들의 최고 ‘스타’였다. 이들 가운데 ‘민심을 고동(鼓動)하는 법국의 명사’ 루소가 속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전기를 빼면 프랑스 계몽사상가의 저작이 소개의 차원을 넘어 부분적이나마 번역된 것은 극히 예외적이다. 결국 의 번역은 루소의 에 모아진 높은 관심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유·평등·권리·책임 등의 말을 우리는 자연스럽고 자명한 것으로 알고 사용하지만, 이 용어들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러한 개념들을 감당할 정신적 ‘인프라’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 말들을 실감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을 터이다. 서양의 근대가 생산한 개념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일본의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번역어 하나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번역된 말은 서양의 ‘원개념’과 정확히 대응하지 않는다.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굴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번역어의 숙명’이라면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0년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면서 근대 계몽기에 그 맹아를 보인 이러한 ‘정치적 성격’의 번역어들은 뿌리 내릴 토양을 상실해버린다. 일본을 거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을 어렵사리 번역한 의 ‘로사민약’도 수면 아래 숨어 인고의 시간을 기다린다.

하지만 루소는 아직 식민지 조선의 정신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나 등 ‘정치적’ 저작을 쓴 루소가 아니라 과 의 작가 루소였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입각해 새로운 세계를 구상했던 루소가 사라진 자리에 교육과 정육(情育)을 전도하는 루소가 이광수를 비롯한 ‘개량적 지식인’들의 의식에 들어선다. 근대 계몽기에도 최남선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들에 의해 의 내용이 ‘격언’ 또는 ‘처세훈’의 형식으로 소개되긴 했으나, 정치사회적 운동이 차단된 식민지 시기에 들어서면서 루소 사상의 정치적 성격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 루소는 없었다

자연주의자 또는 낭만주의자로 변신한 루소는 식민지 조선인들의 비정치적 ‘상식’에 대한 갈증을 달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그 임무를 바꾼다. 예컨대 엄정일은 1922년에 발표한 라는 글에서 루소의 자연주의를 “자연주의자들은 현실의 충족을 힘써 도모하며 이상에 구속되는 것이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인생의 오탁(汚濁)과 사회의 번잡(煩雜)을 벗어나 자연의 무구(無垢)한 본체를 추구하며, 인생의 진실을 발휘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루소의 자연주의가 과연 그런 것인지는 다시 물어야겠지만, 그가 번잡한 사회에서 벗어나 때묻지 않은 자연을 추구한 자연주의자로 이해되고 있었다는 점만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에 등장하는 ‘낭만적 계몽주의자’ 이형식이 읽은 것도 루소의 과 이 아니었던가.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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