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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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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설움을 기억하라!

등록 2003-08-22 00:00 수정 2020-05-03 04:23

[정선태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 량치차오 · 판보이차우 ]

<font size="2" color="663300">중국·베트남 망명객의 고뇌를 풀어놓은 대담집…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예고하는 비극적 징후들 </font>

1905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청말의 저명한 개혁사상가이자 문인이기도 했던 량치챠오(梁啓超·1873∼1929)와 베트남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소남자(巢南子) 판보이차우(潘佩珠·1867∼1940)가 만난다. 열강의 세력 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반식민지로 전락한 청나라를 떠나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량치차오는 왕성한 저술활동을 통해 새로운 중국을 꿈꾸고 있었으며, 이미 1883년에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진 베트남의 혁명가 판보이차우는 자금과 무기를 얻기 위해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어느 날, 어렵사리 얼굴을 대면한 그들은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눈다. 식민지 베트남의 현실에 대해서, 중국이 현재의 위기에 직면한 위기에 대해서, 일본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조선은 장차 어떤 길을 갈 것인가에 대해서.

조선 지식인들의 깊은 관심

둘 사이에 오고간 얘기를 일종의 ‘대담집’ 형식으로 묶은 가 간행된 것은 1905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였다. 1905년이라면 ‘을사조약’과 함께 망국의 위기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던 시점이 아닌가. 80여쪽에 불과한 이 책에서 두 망명객의 착잡한 심경과 고뇌를 읽어내기란 어렵지 않다. 그들의 고뇌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을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 책자에 적잖은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1년 뒤,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떠돌던 이 책이 을 통해 선을 보인다. ‘소남자’의 망국의 기억을 부분 연재한 것이었다.

일부 번역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서였을까. 그로부터 두달이 지난 1906년 11월, 근대계몽기의 저명한 번역가이자 저술가이기도 했던 현채(玄采·1856∼1925)가 이 책을 국한문체로 번역하여 독자들의 폭넓은 호응을 얻는다. 이어서 1907년 말에는 현채의 국한문본을 순국문으로 다시 번역한 가 간행된다. 번역자는 주시경(周時經·1876∼1914)과 이상익(李相益·1881∼)이었다. ‘주시경본’과 ‘이상익본’은 표기법이나 내용의 가감 등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큰 틀에서는 그렇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찌됐든 ‘을사조약’과 1907년의 ‘정미7조약’ 등에 의해 망국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번역된 는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적어도 1909년 새롭게 제정된 ‘출판법’에 의거, ‘사회의 안녕질서와 풍속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금서’가 되기까지는.

가 폭넓게 일반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사립학교의 교과서로 채택되기도 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풍속을 몰라도 ‘안녕질서’에 심대한 타격을 가할 만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번역자와 간행자의 의도는 망국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저항의 불씨를 제공하는 데 있었을 터. ‘주시경본’의 서문에서 노익형은 이렇게 말한다. “월남이 망한 사기는 우리에게 극히 경계될 만한 일이라.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이 물론 귀천남녀노소하고 다 이런 일을 알아야 크게 경계되며 시세의 깊은 사실을 깨달아 우리가 다 어떻게 하여야 이 환란 속에서 생명을 보전할지 생각이 나리라. 이러므로 한문을 모르는 이들도 이 일을 다 보게 하려고 우리 서관에서 이같이 순국문으로 번역하여 전파하노라.” ‘반역’을 이끄는 ‘번역’! 그러나 한권의 책이 ‘생명보존’을 위한 불길로 타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영악한 제국의 심복들이 몰랐을 리 만무하다. 어찌 이를 보고만 있을 수 있었겠는가.

폭넓은 독자층 확보… 금서로 낙인찍히기도

그런데 ‘출판법’에 따라 가 ‘금서’로 낙인찍혀 지하로 스며들기 전, 당시 천주교 기관지였던 에서 ‘근래 나오는 책을 평론’이라는 서평란을 통해 17회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주일에 한번씩 발간한 의 발행인 겸 주필이 바로 프랑스인 신부 안세화(安世華·Florian Demange)였으며, 당연하게도 이 신문은 베트남을 지배하는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의 종교로 인식되던 가톨릭을 싸잡아 비판하는 를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 일본은 조금 미워하고 법국(프랑스) 사람들만 증오하느냐’는 게 이 신문의 반문이었다. ‘문명’의 은혜를 전파한다는 사명을 안고 ‘오지’에서 선교에 애쓰는 사람들을 비난하느냐는 얘기인 셈이다. 더구나 전도하는 사람들까지 교회에서 이 책을 토대로 ‘찬미 예수’를 외치는 것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겠는가. 은 분명하게 말한다. 이 책은 거짓으로 가득 찬 ‘소설’이자 천주교를 죽이려는 ‘독소’라고.

‘제국’ 프랑스의 국민일 수밖에 없는 신부가 주도하는 신문의 집요하고도 신랄한 비판은 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반증한다. 굳이 영화 을 들먹이지 않아도 ‘기독교’와 ‘서양’이 공모하여 제국을 경영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의 저자들도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소남자’는 말한다. “우리나라가 망하기 전에 창귀(미친 귀신)된 자가 사사이익을 위하여 법국 사람을 인도하니 첫째는 천주교 하는 사람들이요, 둘째는 아첨하여 부동(附同)하는 무리들이라. 이 무리들이 임금이 사로잡히고 나라가 망할 줄을 어찌 미리 알며 법국이 월남을 다 차지한 후에는 저희 무리들도 필경 법국에게 해를 당할 줄을 어찌 미리 알았으리오.”(주시경본)

이렇듯 독립혁명가 ‘소남자’가 보기에 기독교는 제국의 앞잡이였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에 와 있던 기독교는 뭐란 말인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조선’을 위해서 파견된 제국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아달라고? 이 물음표를 지우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단, 근대국민국가는 필연적으로 ‘제국’을 욕망하게 마련이고, 선교사들도 그 국민인 이상 제국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웃나라의 참담한 역사를 읽는 회한

어김없이 ‘망국’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약육강식과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대, 제국의 거친 숨결이 근대의 문턱에서 허우적대는 조선을 엄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아직 의식이 깨어 있던 조선인들은 를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폴란드의 비참한 역사()와 이집트의 고난에 찬 역사()와 구별되는 이웃나라의 참담한 역사를 되짚으면서 어떤 감회에 젖었을까. ‘제국 일본’이 내세운 ‘아시아는 하나’라는 슬로건 아래 뭉칠 것인가, 아니면 기약 없는 힘겨운 싸움에 몸을 맡길 것인가라는 난제를 두고 고민을 거듭하지는 않았을까.

불행하게도 ‘제국의 욕망’은 아니 ‘근대의 폭력성’은 조선을 비껴가지 않았다. 그리고 신산한 망명의 계절, 많은 사람들은 황량한 벌판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불귀의 객’이 되어 아직껏 어딘가에서 떠돌고 있을 것이다. 베트남의 망명객 ‘소남자’의 모습에 신채호의 얼굴이, 김구의 얼굴이, 여운형의 얼굴이 포개지는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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