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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렌의 시] 문학청년에 꽂힌 ‘병적’ 감수성

등록 2004-01-16 00:00 수정 2020-05-03 04:23

<font size="2" color="darkblue">감각적 언어로 청춘의 고뇌 풀어내 젊은이 사로잡아… 기성세대의 꾸짖음에도 열병 치유하는 해독제 구실 </font>

지금도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이발소에 가면, ‘이발소 그림’과 함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는 지극히 ‘감동적인’ 말로 시작하는 푸슈킨의 시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옆에는 “시몬, 그대는 들리느냐/ 낙엽 밟는 소리가”라는, 자못 애잔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구르몽의 시 ‘낙엽’이 적힌 액자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뾰족지붕집과 빨간 풍차와 잔잔한 구름과 낙엽과 고독한 사내…. 그리고 막 사춘기를 지나고 있던 소년은 이유도 모른 채 거리와 들판을 쏘다니곤 했을 것이다. 낙엽 밟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을까? 삶이 나를 속여도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였을까? 알 수가 없다. 다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덩이’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그라들지 않았을 것이며, 몰래 쓰는 연애편지(아, 얼마나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말인가!)에 이 시를 적어넣곤 했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폐허’ 위에 선 청춘의 갈망과 고뇌 노래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의 문학청년들도 청춘의 열병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본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한 민중들의 함성이 지하로 스며들고 난 뒤, 1920년 7월에 간행된 문학동인지 에는 베를렌(Paul-Marie Verlaine·1844~96)의 시 20여 편이 잇달아 실린다. 베를렌의 시를 번역하여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댕긴 사람, 바로 김억(金億·1893~)이었다. 내친 김에 김억이 번역한 베를렌의 시 몇 구절을 읽어보기로 하자. “우는 종소리에/ 가슴은 막히며/ 낯빛은 희멀금/ 지나간 옛날은/ 눈앞에 떠돌아/ 암, 나는 우노라.”(‘가을의 노래’) “나무 그림자는 안개 어리운 냇물에/ 연기인 듯이 스러지고 말아라/ 이러한 때러라, 하늘을 덮은 가지에는/ 들비들기가 앉아 울고 있어라.”(‘나무그림자’) “사원은 종은 우러러보이는 높은 하늘에서/ 보드랍게 한가롭게 울어라/ 소조(小鳥)는 우러러보이는 높은 나뭇가지에서/ 애닯게도 괴롭게도 울어라.”(‘하늘은 지붕 위에’) 종도 울고, 들비둘기도 울고, 작은 새도 애닯게 운다. 이처럼 김억은 베를렌의 시를 빌려 ‘폐허’ 위에 서 있는 청춘의 갈망과 고뇌를 노래했던 것이리라.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김억은 서양 시들을 왕성하게 번역해 한국 근대시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시를 쓴 시인이었으며, ‘진달래꽃’ ‘못잊어’ 등 절창을 남긴 김소월의 스승이기도 했다. 1912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그는 주간문예잡지 (1918년 9월26일 창간, 1919년 2월17일 종간)를 무대로 ‘태서’(泰西=서양)의 다양한 시들을 번역하고 서양 시단(詩壇)의 동향을 소개함으로써 ‘신체시풍’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국의 시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맡았다. “본보는 저 태서의 유명한 소설·시조·산문·가곡·음악·미술·각본 등 일반문예에 관한 기사를 문학대가의 붓으로 직접 번역하여 발행할 목적”이라는 창간호의 ‘선언’에서 볼 수 있듯 서구 문예를 본격적으로 번역 소개하기 시작한 는 1910년대 문학 번역의 산실이었다.

에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개’ ‘거지’ 및 단편소설 ‘밀회’, 베를렌의 ‘거리에 내리는 비’ ‘아름다운 밤’, 예이츠의 ‘꿈’, 구르몽의 ‘낙엽’ 등을 번역했던 김억은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등과 함께 만든 문예동인지 에 두번에 걸쳐 베를렌의 시들을 집중적으로 번역해 싣는다. 그리고 1921년에는 베를렌의 시 21편을 비롯하여 구르몽, 사맹(Albert-Victor Samain), 예이츠, 셸리 등의 시를 묶어 최초의 번역시집 를 간행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등 타고르의 시집을 번역하기도 했으며, 한시(漢詩)들을 번역하여 과 등을 펴내기도 했다. 이쯤 되면 그의 번역시들은 가히 동서양을 아우르고 있다.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창작시집 (1923)까지 펴낸 걸 보면 창착열 또한 만만치 않았다.

기성세대 계몽의 열정, 그것과 다른 감수성

그런데 그가 베를렌을 비롯한 ‘낭만적 상징주의’ 시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독자적인 음악적 리듬과 로코코 취향의 관능미로 근대의 권태를 노래한 베를렌은 보들레르, 랭보 등과 함께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뒤흔든 ‘반항아’였다. 랭보와 함께 벌인 ‘사랑의 도피 행각’과 격렬한 언쟁에 이은 권총 발사 그리고 감옥생활과 가정의 파탄. 베를렌은 말 그대로 타오르는 청춘의 불덩이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생명을 난도질하고 극도의 가난 속에서 죽어간 ‘저주받은 시인’이었다(영화 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네 이마를 내 이마에, 네 손을 내 손에 있게 하여라/ 명일(明日)이면 잊어버릴 달콤한 맹세를 하여라/ 이렇게 눈물 흘리며 아침빛을 맞게 하여라/ 열병에 걸린 어린아이여!”() 김억이 번역한 베를렌은 이처럼 ‘권태’ 속에서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갈망하고 있었다. “아아, 산령(山靈)의 님프여, 오랜 날의 내 사람이여!/ 아아, 금발, 푸른 눈! 그리고 꽃의 피부여!/ 그 자태는 젊은 육체의 가득한 방향(芳香) 안에/ 사랑의 생각조차 부끄러워하여라.”()

이러한 감각적인 언어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문학청년들의 감수성을 사로잡았다. 이들은 기성세대와 분명히 달랐다. 즉, 최남선과 이광수 등 이른바 ‘계몽의 열정’으로 무장한 기성세대의 ‘훈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새로운 언어의 세례를 받은 이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갈망을 토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에 이어 나도향·현진건·이상화·박영희·박종화 등이 주축이 되어 1922년 간행한 문예동인지 에서 식민지 문학청년들의 열병은 더욱 깊어진다. 나도향의 번역으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들이 실려 있는 를 휘감고 도는 것은, ‘나의 침실로’(이상화), ‘월광으로 짠 병실’(박영희), ‘사(死)의 예찬’(박종화) 등 익히 알고 있는 시들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사랑과 죽음과 질병과 환락을 향한 목마른 호소이다.

‘수입 언어’ 흉내낸 청춘들의 다양한 행보

이들을 싸잡아 병적 낭만주의에 찌든 부랑아라고 꾸짖는 점잖은 문학사가들이 많다. 민족이 도탄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데 이 따위 문학 나부랭이로 장난질이나 하고 있다니. 그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 또 근대의 길을 제대로 밟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분별하게 ‘서양것들’을 흉내내는 데 여념이 없었던 이들을 두고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혀를 차는 ‘어른’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수입된 언어’를 흉내내어 자신의 감수성을 표현하고자 했던 문학청년들의 ‘치기’를 나무라는 어른들에게 그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들은 청춘을 어떻게 보냈느냐고. 그토록 힘겨웠던 갈증과 갈망의 시간을 어떻게 추슬렀느냐고. 처음부터 무르익는 과일이 어디 있느냐고. 번역된 언어를 통해 감춰져 있던 열정을 들춰내고, 그 언어를 흉내내면서 감수성을 키우고 열병을 치유했을 그들에게 누가 돌을 던질 것인가. 나중에 ‘민족시인’으로, ‘계급문학이론가’로, ‘리얼리즘작가’로 나아간 이들 문학청년들의 진통을 어떤 잣대로 잰다는 것은 정말이지 부질없는 짓이다.

내가 아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푸슈킨과 구르몽과 투르게네프와 베를렌과 롱펠로 등 ‘출처 불명’의 시들에서 연애편지에 끼워넣을 ‘폼나는 말’들을 찾아 헤매던 ‘목마른 청춘’의 계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이들의 ‘과장된 제스처’를 그렇게 간단히 질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옥같은 구절’들을 뽑아 ‘별이 빛나는 밤에’에 보낼 엽서를 쓰던, 까만 교복 입은 자신의 모습일랑은 이미 지워버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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