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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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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그 이름만으로도…

등록 2003-06-12 00:00 수정 2020-05-03 04:23

김장호의 환상박물관 | 시베리아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횡단열차에서 세계화의 격랑과 영혼의 자유, 민족의 얼·혼을 생각하다

#하바로프스크

왜 그렇게 추운데 가, 응 마음이 추워서.

시베리아에 난데없이 간다는 말에 황당해하는 지인들에게 퉁명스레 답하고,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5월1일, 노동절이었다.

러시아 국적기를 타고 북한영공을 가로질러 불과 2시간 만에 도착했다. 러시아는 우리에게 가까운 나라지만 대한제국 이후로 한번도 ‘우방’이었던 적이 없었다. 대학시절 친구와 인도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소련 관광단과 막 부닥쳤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조국에서 온 이들과 만나다니, 흥분하여 고무찬양하는 언사를 늘어놓는 우리를 그들은 귀찮아했다. 과학기술자라는 그들도 참 난감했으리라. 동구권 몰락을 몇년 앞둔 1980년대 말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때 길거리에서 산 레닌 배지를 공항에서 행여나 걸릴세라 깊숙이 숨겨놓았다가 신주단지처럼 간직했다. 노동절의 하바로프스크 레닌 광장은 휘날리는 적기(赤旗)도 레닌 초상도 없이 밤늦게 맥주를 마시며 축제를 즐기는 젊은이들뿐이었다.

#보드카

소주의 두배를 넘는 40도의 독주인 보드카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것. 절대로 얼지 않기에 한겨울에는 자동차 부동액으로 쓰기도 하고, 냉동실에 넣었다가 끈적끈적한 상태로 마시는 게 제일 좋다고 한다. 밀이나 보리 같은 곡물을 원료로 발효한 다음 자작나무 숯에 걸러서 증류하는 과정을 거치면 무색·무취·무향의 술이 된다. 보드카는 ‘물’을 뜻하는 러시아어 ‘바다’에서 유래한 ‘생명의 물’이란 뜻이며, 러시아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의 국민이 언제나 보드카에 취해서 모든 불평불만을 삭히길 바랐다는 말도 있으니 어쩌면 ‘절명의 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짙은 냄새가 나는 검은 빵을 안주 삼아 쉼 없이 들이킨 보드카의 뜨거운 열기에, 몸도 마음도 다 마비되었지만 영혼만은 자유를 얻어 시베리아 벌판을 하얗게 방황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하바로프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저녁에 출발하여 아침에 도착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에 올라탔다. 4인1실 침대칸에는 젊은 러시아 여인과 그의 남자친구인 일본인, 베이징에서 사업차 왔다는 중국인, 그리고 내가 있었다. 시베리아횡단철도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진 네 나라 사람이 한칸에 다 모인 것이다. 서투른 영어로 서로들 인사치레가 끝나자 말은 갈라져서, 나는 시베리아횡단철도 관련회사에 다닌다는 일본인과 내내 이야기했고, 러시아어가 유창한 그는 나와 이야기가 끊기면 애인과 정담을 나누었다. 영어가 제법 유창한 중국인만 왕따당한 것처럼 심심했다. 시베리아의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영어를 못하며, 러시아어를 구사하는 외국인도 드물기에 여기에는 애초 국제공용어란 없다. 시베리아 밖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의 격랑이 거세건만 이곳은 아직은 미진하다.

그러나 부시의 안보교과서라 불리는 로버트 카플란의 을 보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벌이는 짓거리가 이해되며 그 다음이 왜 이란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21세기 자원의 보고라는 중앙아시아가 목표임을 알게 한다. 경의선 복원을 둘러싼 북한의 입장보다는 이러한 미국의 야심 때문에 동북아의 번영을 가져다줄 ‘철의 실크로드’는 앞길이 순탄치 않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일본만화 신간을 들치다가, 8억4천만t의 가스가 매장되었다는 바이칼호 주변에서 유럽-러시아 연합군과 미-일 연합군이 운명을 건 세계대전을 벌인다는 다소 황당한 대목을 본 기억이 떠올랐다. 남들은 애들이나 본다는 만화에서도 미래와 세계를 논하건만 애꿎은 갯벌만 메우느라 야단법석하는 조국의 현실을 생각하니 차창 밖 회색 풍경은 자못 우울하기만 하다.





얼어붙은 바이칼호, 바이칼호는 겨울이면 2m 두께로 호수가 얼게 되며, 호수 위에 임시 표지판까지 등장하여 트럭과 차들이 질주한다.


  



바이칼호에서 나는 물고기인 오물을 훈제하여 먹는데 보드카 안주로는 최상이다.









지금은 바이칼호를 돌아서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지나지만 예전에는 기차를 배에 실어서 바이칼호를 건넜다.


  



시베리아 샤먼은 집 가운데에 자작나무를 세워서 이를 통하여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다고 한다.





#바이칼호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작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로 ‘ 이래의 최고 소설’이란 표현을 즐겨 쓰곤 했다. 이광수에게는 뿐만이 아니라 도 있지만 양녀와 이루지 못하는 사랑을 펼친다는, 지금으로 치자면 원조교제식 애정행각이 어렸을 때는 잘 이해가 안 되었고 칙칙한 신파조처럼 느껴졌다. 바이칼호 언저리 통나무집에서 불면의 밤을 지새다가 생각 없이 가방에 넣었던 을 꺼내어 다시 읽었고, 이후로 나는 ‘ 이래의 최고의 감동’이란 말을 쓰게 되었다.

이광수는 한때 시베리아를 방황한 적이 있었으며, 그때 바이칼호의 풍경이 인상적으로 남아 훗날 의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앞에 어디로 가서 어찌 될는지는 나도 모르지마는 희미한 소원을 말하면 눈 덮인 시베리아의 인적 없는 삼림지대로 한정 없이 헤매다가 기운 진 하는 곳에서 이 목숨을 마치고 싶소”라는 호쾌한 문장도 붓으로 쏟아내었다.

샤머니즘의 고향이라 일컫는, 바이칼호의 알혼섬은 어쩌면 우리 민족이 이곳에서 왔을지도 모를 그래서 우리의 얼과 혼이 담겨 있을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깊고, 가장 깨끗하고, 가장 많은 물을 담은 바다와 같은 바이칼호를 바라보면서 나는 물 속에 내 혼백이 빠져들어감을 느꼈다. 그때 “검푸른 하늘에 저쪽 지평선을 향하고 흘러가는 반달은 참으로 맑음 그것이었다.”

김장호 | 도상학연구가 alhaji@hanmail.net

*사진제공: 세명투어 김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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