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호의 환상박물관 | 헨리 다거
주검의 도상학을 탄생시킨 … 이미지에 감춰진 진실을 밝혀내는 지난한 여정
헨리 다거란 이가 있다. 1892년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17살부터 병원 청소부로 내내 일했으며, 은퇴 뒤에는 아침 7시 반에 어김없이 교회 미사에 참석하던 그냥 평범한 미국시민이었다. 평생 독신이었고 정신지체였다는 사실이 좀 남다른 점이었지만 주변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81살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가족이 없었던 탓에 집주인이 방에 남은 물건을 정리하게 되었다. 한때는 사진가로도 활동한 집주인은 곤궁했던 독신노인의 유품 속에서 진기한 것을 발견했다. 그림과 글이 가득한 엄청난 양의 원고뭉치와 스케치였다. 몇장 들춰보던 집주인은 순간 감전이나 된 듯 온몸을 떨었다.
81살 독신 노인이 남긴 아웃사이더 아트
20세기 아웃사이더 아트의 최고걸작이자 어쩌면 인류의 미술사와 문학사를 다시 쓰게 할지 모를 는 그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15권 분량의, 타이프로 깨끗하게 쳐진 총 1만5145쪽의 분량. 가공의 세계에 대한 장대한 역사가 전개되는 의심할 여지 없는 문학사상 최장의 논픽션. 그러나 활자로 된 원고뿐만이 아니다. 헨리 다거가 이야기를 그림으로 직접 풀어낸 것이 큼직한 화집으로 3권이다. 이 수백장의 그림 가운데는 길이가 3m를 넘는 것이 있고, 원고 중간에도 삽화가 수없이 등장한다. 는 문학과 미술에 걸쳐 방대함과 기묘함에서 동서고금의 유를 찾기 힘들다.
“지구보다 수천배나 거대한 가공의 행성에 있는 가공의 세계와 이에 속하는 여러 나라에서 다음 이야기가 시작한다.” 주인공은 비비안 자매라 불리는 7명의 소녀인데, 이들은 그랜델리니아라는, 어린이를 노예로 삼고 학대하는 악의 축이 중심이 되어 벌이는 추악한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천진난만하던 소녀들은 게릴라 전사로 변신하여 맹활약하는데, 이 소녀들이 겪는 전쟁과 모험담이 줄거리를 이룬다.
상상을 초월하는 변신… 꼬리를 문 환상
언뜻 보아 ‘소녀 삼국지’ 같겠거니 생각하면 오산인 것이, 가공의 ‘어린이 노예전쟁’은 등장인물의 수나 전투 범위가 상상을 초월한다. 각각의 전투장면에 대한 묘사만 해도 수백쪽에 이르고, 전쟁 참여국도 여럿이어서 전선이 무척 복잡하게 전개된다. 지상전과 해상전은 물론, 잠수함이 동원되어 수중전까지 펼쳐진다. 게다가 헨리 다거 자신이 종군기자로 글 속에 직접 등장하여 전쟁터에서 보고서를 보내기도 하는데, 그는 11년에 걸쳐 집필에 매달렸으리라 추정된다. 정식 문학수업을 받지 못했기에 문장은 다소 거칠고 문법이 엉망이지만, 언어의 리드미컬한 반복과 다채로운 신조어 사용이 독특하다.
무엇보다 가 주목받는 것은 자유연상에 따른 서술과 정교한 시각적 환상에 의한 묘사 때문이다. 그는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모든 시간을 집필에 쏟아부었고, 오랜 시간 여기에 매달리다 보니 자신이 작품의 일부가 되었다. 작품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애당초 단순한 소녀들의 모험기를 쓰고자 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창작 과정에서 자신이 만든 이야기에 스스로 지배되어 거대한 환상의 세계를 끊임없이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아웃사이더 아티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창작물을 세상에 발표하겠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은 없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원과 정신박약아 수용시설에서 자랐고, 사회에 나가서도 그의 타고난 천재성과는 무관하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밑바닥 생활을 했다. 현실 세상에서 억눌렸던 그의 감성과 재능이, 밤이 되면 비현실의 세계 속에서 아무런 제한도 없이 펼쳐져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었다.
장대한 전쟁서사시 에는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그 중에서도 ‘노마 캐서린의 대학살’은 압권이다. 그의 일기를 보면 어느 날 무엇을 잃어버린 사소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는 신에게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달라고 기도한다. 결국 찾지 못하자 마침내 그는 분노에 휩싸였고, 신에게 중대한 사태가 있으리라 일기 속에서 경고한다. 작품 속에서 그의 경고는 실현되어 ‘비현실의 왕국’에서 가공할 유혈사태가 벌어진다. 악의 무리 그랜델리니아 군인들이 소녀들을 사냥하듯이 잡아 학살을 일으켰다. 독실한 신자였던 그는 불현듯 내면에 잠재했던 신에 대한 분노를 표출했고 이는 찢겨진 소녀들의 육체를 통하여 구현된다. 미술사에서 가장 잔혹하며 가장 과격한 장면이라 일컬어지는 ‘사체(死體)의 도상학’은 이렇게 탄생했다.
정말로 도상학이란 무엇인가
전쟁은 끝나고 ‘비현실의 왕국’에는 평화가 와서 세상은 낙원이 된다. 어쩌면 그가 그토록 평생 꿈꾸던 세상,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인지 모른다. 끝으로, 연재를 하면서 ‘도상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도상학은 언어가 잡아내지 못하는 인간의 추상적인 사념(思念)을 읽어내어 감추어진 진실을 밝혀낸다. 그러나 그 진실은 ‘비현실적 낙원’이어서 언제나 아득하기만 하다.
김장호 | 도상학연구가 alhaji@hanmail.net
참고문헌
John M. MacGregor,
*www.artbrut.ch에 가면 아웃사이더 아트에 관한 자료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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