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욕구와 판타지가 창조한 ‘영혼 없는 육체’… 황폐한 도심의 오아시스 구실도
작가 최윤은 얼마 전 이란 신작을 발표했다. 이 특이한 책이름에 대하여 “백화점이나 의상실의 쇼윈도 내부에 한껏 치장을 하고 있는 마네킹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처해 있는 실존적 상황을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마네킹에 입혀진 화사한 의상들이 쇼핑이라는 실존적 행위에 의해 하나 둘씩 고객들의 의상으로 번져나가는 일련의 과정이 디스플레이가 조장하는 거짓욕망의 드라마이며, 인공적인 것이 자연스러움이나 실존을 대체하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기를 우화적으로 그리고 있다”(평론가 김경수)는 설명을 한다.
소비대중의 기호반영
현대사회의 끝없는 소비욕구를 상징하는 단어가 된 마네킹은, 원래 살아 있는 인형을 뜻하며 형체만을 가진 영혼 없는 인간을 가리켰다. 근대에 이르러 마네킹은 일종의 상업조각으로서 상점이나 백화점 등의 매장을 장식하여 매출을 올리는 기능을 한다.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기 위한 매개체인 마네킹은 소비대중의 기호를 잘 반영한다. 주로 여성이 소재로 등장하는데 각 시대마다 선호하는 여성의 얼굴이나 체형이 무엇인지 엿보게 해준다. 게다가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체형까지 제시하는데 ‘스포츠 마네킹’이 그러하다. 높아만 가는 스포츠 열기에 따라 스포츠용품 매장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처음에는 일반 마네킹을 매장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숙녀복이나 신사복을 입던 남녀 마네킹에 운동복으로 갈아입혀서 내놓았던 것이다. 어색함을 뒤늦게 깨달은 업체에서는 새로이 ‘스포츠 마네킹’의 제작을 의뢰했고, 현역 운동선수를 모델로 하여 근육질 마네킹을 완성했다.
아무리 기량이 뛰어난 화가라도 모델이 필요하듯이 마네킹 제작도 상상에만 의존하진 못한다. 좋은 모델을 찾으면 마네킹 제작의 절반이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마네킹 모델로 직업 모델만 쓰이지는 않고 마네킹이 나타내고자 하는 분야에 적합한 모델을 찾는다. 굳이 살아 있는 모델은 아니더라도 잡지나 책 등에서도 자료를 모아서 구성을 하기도 한다. 이를 바탕으로 유토(油土·굳지 않는 유성점토)로 미니어처를 만들어 포즈나 체형을 만들기 시작한다.
마네킹 만들기는 인체의 아름다움과 매력을 형상화한다는 의미로 본다면 인체조각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마네킹은 아름다운 몸 그대로 전시하는 경우가 드물다. 옷을 입히거나 특정한 장식을 하여 전시한다. 옷은 몸을 가리기도 하고 몸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마네킹은 패션을 표현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생명이 없는 플라스틱 몸체이건만 마네킹에도 하나의 개성, 좀 과장돼 말하자면 인격을 지녀서 살아 있는 인간과 교류를 한다는 것. 마네킹의 수려한 자태에 매혹당하여 인간 이상의 애정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유명한 마네킹 애호가였다. 여행 때에도 커다란 트렁크에 자신이 사랑하는 마네킹을 넣고 다닌다는 좀 변태스러운 사람도 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매장직원의 말에 의하면 왠지 끌리는 마네킹이 있다고 한다. 그런 마네킹은 담당직원과의 우정() 덕분에 명이 길어지기도 한다.
서울의 마네킹에는 ‘한국’이 없다
마네킹은 하이힐을 신지 않은 상태에서 키 176∼178cm, 가슴 83cm, 허리 58∼60cm, 엉덩이 88cm, 발 크기 23cm 등으로 제작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인간 모델을 오랜 시간 윈도 안에 세워놓는 일은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불가능하지만 마네킹이라면 가능하다. 마네킹은 어쩌면 인간이 그토록 가지고 싶어했던 불사(不死)와 불로(不老)의 구현체인지도 모른다.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마네킹은 국적불명이다. 오똑한 코, 새하얀 피부, 팔등신에 가까운 몸매. 그리고 얼굴은 서양인에 가깝지만 완전히 그렇지도 않다. 이는 말할 나위도 없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서양인에 대한 동경심, 아니 콤플렉스 탓일 것이다. 단순한 마네킹 하나에서도 우리 문화와 우리 몸의 서구지향성을 읽는다.
마네킹의 역사에서 가장 큰 발전을 가져온 것은 인체를 그대로 떠서 만들 수 있는 ‘FCR기법’이다. 1970년대부터 개발되었는데 인간의 인체를 얼굴에서 발끝까지 그대로 재현하는 기술이다. 석고제작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모델이 통속에 들어가면 체온에 의해 굳어지는 액체를 쏟아부어 약 5분 만에 몸틀을 뜬다. ‘FCR기법’은 모델의 심줄까지 구현하는 마네팅의 극사실주의라 하겠다.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마네킹은 ‘형광 마네킹’이다. 상체만 있고, 얼굴과 팔이 뚝 잘려 있는 백화점 속옷매장에 있는 마네킹 말이다. 일본의 유명 속옷회사 와코루에서 1961년에 개발한 것으로, 투명한 수지를 사용하여 뽀얀 마네킹 몸을 만들고 안에 형광등을 설치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백화점에 가서 그것을 발견한 나는 도저히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사춘기 시절 내내 길거리에서 화사한 속옷을 걸친 그 마네킹을 발견하면 제대로 눈을 들고 쳐다보지도 못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지금도 그 앞에 서면 묘한 감정의 격류가 흐른다.
파리 프렝탕 백화점의 아트 디렉터였던 천재적인 마네킹 제작자 장 피엘 다루나는 “길 가는 사람들의 눈을 순식간에 사로잡아 ‘강간’해버리는 강한 이미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마네킹의 정지된 아름다움에 도취하곤 한다. 비록 그것이 조작된 것이고, 물신화의 상징이며, 의도된 것이지만 황폐한 도심을 떠도는 우리의 외로운 영혼은 비로소 머물 곳을 찾는다.
참고자료
가케다 마코토, , 쇼분샤 2002
김장호 ㅣ도상학연구가 alha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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