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오디세이’의 핵심 주제인 ‘제우스의 법’(낯선 손님을 환대해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의 관습)은 일종의 그리스식 황금률이다. 영화는 황금률 붕괴가 문명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유니버설픽쳐스 제공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황금률은 가장 보편적인 도덕 원칙으로 여겨졌다. 내가 바라는 대접을 다른 사람에게도 베푼다면, 적어도 서로를 함부로 해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실용적 지혜다.
이 오래된 황금률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적용하려면 쉽게 지나치는 조건 하나가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것과 당신이 원하는 것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전제,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당신도 소중하게 여긴다는 전제다. 내가 배고플 때 누군가 건넨 음식이 고마웠다면 나도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건넬 수 있다. 여기에는 ‘배고픔’이라는 공통의 기반이 있다.
하지만 내가 힘들 때 위로가 되었던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참견이나 모욕이 될 수 있다. 내가 예의라고 배운 행동이 다른 세대나 다른 문화의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다. 세대와 젠더, 생활방식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지는 오늘날에는 이런 어긋남이 자주 일어난다. 나와 당신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지 비슷할 때는 나를 기준으로 삼아도 선의가 무사히 상대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조차 서로 다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나의 다정함이 당신을 상처 입힐까’, 지카우치 유타 지음, 다다서재 펴냄, 2026년
일본 철학자 지카우치 유타의 ‘왜 나의 다정함이 당신을 상처 입힐까’(다다서재 펴냄, 2026년)는 바로 이 질문에 응답하는 책이다. 그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다르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내 선의는 때로 불편한 친절이나 정의의 강요가 되기 쉽고, 심하면 도덕의 폭주로 치달을 수도 있다. 다양성의 시대란 우리의 선의가 헛도는 시대다.
그렇다면 현대의 황금률도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지카우치는 이렇게 제안한다. “다양성의 시대인 현대의 황금률은 ‘타인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존중하라’가 되지 않을까요?” 전통적 황금률이 나를 출발점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렸다면, 새로운 황금률은 내가 상대를 재는 적절한 기준이 아닐 수 있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독립한 자식에게 먹을거리를 보내주는 일을 생각해보자. 먹을 것이 귀했던 시대에는 고향에서 보내온 김치 한 통이 좋은 선물이었고, 자연스러운 사랑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이제 필요한 음식은 언제든 주문할 수 있는 시대다. 사과 한 상자와 김치 몇 통이 자식에게는 보관하고 먹어치워야 하는 또 하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여기서 돌봄의 의미도 달라진다. 지카우치는 돌봄을 “타인에게 소중한 것을 함께 소중히 아끼는 행위”라고 정의한다. 내가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가 아니라 상대에게 무엇이 소중한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선물이라고 생각한 것이 상대에게는 짐이 되고, 위로라고 생각한 말이 참견으로 여겨진다면, 상대가 소중히 아끼는 것을 내가 오인했기 때문이다.
“나와 당신은 비슷하다”고 지레짐작할 때 다정함은 엇갈릴 수 있다. 오히려 “나와 당신은 서로 다른 존재다”라고 인정할 때 비로소 관계의 가능성이 열린다. 이 원칙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타인을 위한다는 것, 곧 이타의 의미도 달라진다.
지카우치는 “이타란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타인을 위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상대를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으로 바꾸려고 할 때가 많다. 건강을 위해, 성공을 위해, 행복을 위해 당신이 변해야 한다고 질책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이타가 내 기준보다 상대에게 소중한 것을 먼저 헤아리는 일이라면 방향은 거꾸로여야 한다. 변화해야 하는 것은 상대가 아니라 오히려 나, 그리고 내 기준일 수 있다.
지카우치의 주장을 한참 듣고 나면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어딘가 미진한 느낌이 남는다. 상대를 위해 내가 변해야 한다는 이타의 요청은 분명 아름답지만, 정말 언제나 그럴 수 있을까. 내가 더 귀를 기울이고, 내가 가진 도덕적 규범을 잠시 내려놓는다면 관계의 문제는 전부 해결될까. 혹시 누군가는 이미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해온 것은 아닐까.

‘동료에게 말 걸기’, 박동수 지음, 민음사 펴냄, 2025년
지카우치의 생각은 ‘동료에게 말 걸기’(민음사 펴냄, 2025년)라는 책을 쓰며 내가 생각했던 대화의 모습과도 얼마간 닮아 있다. 상대를 빠르게 판단하기보다 조금 더 오래 경청하고, 느린 대화를 통해 내가 변화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일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책을 내고 북토크를 다니면서 나는 이런 질문을 여러 번 받았다. “왜 항상 나만 소통하려고 애써야 할까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남편과 대화하는 어려움을 이야기해준 한 여성의 질문이 기억에 남아 있다. 자신도 어떻게든 남편의 말을 들으려고 애쓰지만, 돈을 벌어오는 남편과 자신의 위치가 같지 않다보니 갈등이 생길 때마다 결국 자신이 더 많이 이해하고 양보하는 쪽이 된다는 것이다. 상대가 내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필요하다면 내가 변화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여전히 옳다. 하지만 이미 계속 듣고 있던 사람에게 다시 한번 잘 들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 아무리 훌륭한 이타와 돌봄의 윤리라도 그것이 놓이는 사회적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효과를 내는 게 아닐까.
여성학자 정희진의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창비 펴냄, 2026년)를 덧붙여보자. 정희진은 지카우치와 비슷한 자리에서 출발하면서도 질문의 방향을 바꾼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소통은 무조건 바람직하다”라는 비현실적인 믿음이다. 우리는 갈등이 생기면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말이 통하지 않으면 더 잘 들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소통은 애초에 잘되기 힘든 일”이다. 서로 다른 몸과 사회적 위치, 권력관계 때문에 같은 말도 다르게 들린다. 그런데도 사회는 말이 통하지 않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계속 ‘소통하라’ ‘대화로 풀라’고 요구한다. 결국 대화와 합의의 요구 자체가 약자에게는 또 하나의 부담이자 스트레스가 되고, 소통 실패에 대한 책임마저 약자의 노력 부족으로 돌아간다.
완전한 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완벽한 이해를 이루겠다는 부담도 내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부당한 질문에는 침묵하고, 때로는 응답하지 않는 것이 낫다. 말 몇 마디로 해소되지 않는 차이 앞에서는 “파국에 이르지 않기 위해 어디까지 양보하고 멈출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정희진이 제안하는 이런 최소한의 소통법은 어쩌면 소통의 실패가 아니라 “소통의 환상을 걷어낸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품위 있는 생존 도구”가 될 수 있다.
정희진이 말하는 자기돌봄도 소통 가능성을 당연시하는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일에 가깝다. 말하고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책임을 더 많이 떠안는 쪽은 대개 더 약한 위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는 대화를 종료할 권리도 있다. “대화를 종료할 권리는 소통을 포기하겠다는 패배 선언이 아니라, 더 나은 소통의 지도를 그리기 위해 나의 영토를 지키는 가장 적극적인 주권 행위”다. 상대를 끝까지 이해하거나 설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때로는 거리를 두는 것이 오히려 자신을 잃지 않는 방법이다.
그렇다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각자 살자’는 식의 냉소는 아니다. 소통의 불가능성을 기본값으로 받아들여야 가끔 찾아오는 작은 이해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고,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득하지 못한 채로도 함께 살아갈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화의 목적은 합의도 맞대응도 아닌 제3의 목소리를 모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정희진 지음, 창비 펴냄, 2026년
“왜 항상 나만 소통하려고 애써야 할까요?”라는 질문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어쩌면 ‘항상’일지도 모른다.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때로는 내가 변해야 하고, 내가 먼저 들어야 한다. 그래야 자기중심성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이 ‘항상’ 더 약한 위치에 놓인 사람의 몫으로만 남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소통의 어려움이 아니다. 소통의 조건, 그 아래에 있는 권력관계를 다시 물어야 할 때다.
이렇듯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서로의 논의에서 빠져 있던 질문을 보충한다. 지카우치는 선의가 헛도는 시대에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상대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정희진은 소통이 무조건 좋다고 여기는 시대에 이렇게 다시 묻는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소통하기 위해 지금 누가 더 많이 애쓰고 있는가? 첫 번째 질문이 없다면 우리는 자신의 선의를 강요하거나 상대를 계몽하려 들게 된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이 없다면 이타와 소통의 윤리조차 약자에게만 계속 양보하고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말이 될 수 있다.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만큼이나, 그 존중의 비용이 누구에게 부과되는지를 함께 살피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그렇다면 지카우치가 말했던 현대의 황금률을 한 번 더 고쳐 써볼 수 있겠다. 타인이 소중히 여기는 것을 존중하라. 그러나 그 존중을 위해 누가 계속 비용을 치르는지도 함께 질문하라. 당신에게 소중한 것을 내 기준으로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 동시에 당신을 이해하기 위해 나 자신만을 끝없이 바꾸지 않는 것. 선의와 소통에 지친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대화의 현실적 윤리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지키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박동수 사월의책 편집장·철학책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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