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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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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 없는 신냉전, 중립 재조명이 필요한 게 아니다

영역 넓히는 데만 동원된 남북한의 중립국 논리, 평화 담론으로 확장한다면
등록 2025-11-27 17:54 수정 2025-12-04 15:39


 

“중립국.”

한국전쟁 포로 이명준은 어느 쪽으로 가겠느냐는 북한군 장교의 질문에 고집스레 이 한마디를 외친다. 이어 그는 다른 천막에서 포로들을 회유하고 있을 남한 설득자 앞에서도 똑같이 말하는 상상을 하며 마음껏 웃음을 터뜨린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다. 남한의 대학생이었으나 북한의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한 이명준이 끝내 선택한 곳이 중립국이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남북한 모두에서 냉전을 회의하며 평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김도민의 ‘냉전의 진영 너머로’(역사비평사 펴냄, 2025)는 중립이 비단 지식인의 몽상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냉전의 한가운데서도 남한과 북한은 중립국에 적잖은 관심을 보였다. 다만 그 현실은 이명준의 바람과는 조금 달랐다. 남북한 정권 모두 중립국을 나아가야 할 목표가 아닌, 권력을 강화하고 상대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비록 해방과 동시에 분단되며 냉전의 최전선에 놓였을지언정, 남북한이 처음부터 중립과 무관했던 것은 아니었다. 중립의 의미가 전쟁 중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소극적 중립에서, 전쟁 자체를 비판하며 평화를 추구하는 적극적 중립으로 변화한 계기 역시 한국전쟁이었으니 말이다. ‘광장’이 보여주듯 한국전쟁기 정전협정의 원활한 진행을 감시하고 포로를 관리 및 송환한 주체도 중립국들로 구성된 감독위원회와 송환위원회였다. 그럼에도 1955년 반둥회의에 남북한 모두 초청받지 못하는 등 한반도는 중립과 멀어 보였다.

상황이 달라진 건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였다. 식민지배에서 해방된 아프리카의 신생 독립국이 국제연합(유엔)에 속속 가입했기 때문이다. 남북한은 때로 식민지배의 아픔을 호소하고 때론 경제발전의 성과를 내세우며 이들 비동맹 중립국을 포섭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접어들며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갈등으로 비동맹운동 자체가 동력을 잃었기에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역설적으로 남북한 모두 중립국과의 수교에 발 벗고 나선 시기는, 냉전의 규정력이 약해지고 데탕트(해빙) 분위기가 무르익은 1970년대였다. 남한은 미국과, 북한은 소련 및 중국과 관계가 악화하며 ‘자주’와 ‘주체’를 모색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를 통해 두 나라가 냉전 질서의 무기력한 수용자가 아닌, 적극적인 행위자였다고 힘줘 말한다. 하지만 남북한의 적극성은 어디까지나 국제사회에서 상대방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만 발휘됐다. 가령 1965년 알제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 소련을 초청하자는 인도의 요청에 남한은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소련 초청에 반대하는 북한, 그 뒤의 중국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북한이 적극적인 ‘뿔럭불가담’(비동맹) 운동에 나섰던 것 역시 중립국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엔 총회에서 이뤄질 ‘표 대결’에서 남한을 이기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남북한의 중립국 외교는 각자의 진영을 확고히 사수하며, 그 너머에 있는 중립국들을 자기편으로 포섭하기 위한 공작에 가까웠다. 넘나들 진영 자체가 사라지며 사실상 모든 나라가 중립국이 된 이른바 ‘신냉전’의 시대엔 이와는 다른 감각이 요구된다. 그 점에서 책의 말미에 지은이가 새삼스레 소환한, 한반도 평화 담론의 계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약 없는 신냉전을 견디기 위해 필요한 건 중립이나 자주에 대한 재조명이 아니다. 근대 이후 한반도에서 논의된 다양한 평화‘들’을 들여다볼 때, 우리는 비로소 이명준의 고민과 공명할 수 있다.

 

유찬근 대학원생

*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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