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 미래의 역사가들은 아주 최근까지 인류가 지극히 예외적인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기록할지도 모른다. 자유무역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믿음 말이다. 한때 이 믿음은 망상이 아닌 사실처럼 보이기도 했다. 세계는 경쟁과 분업을 통해 번영했고, 무역으로 얽힌 이해관계는 전쟁을 막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억제했다. 물론 믿음은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 미국은 관세를 무기로 동맹국을 후려치고,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선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유무역이 만든 ‘긴 여름’의 끝을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무역이 만드는 세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이슈트반 혼트의 ‘상업사회의 정치사상’(김민철 옮김, 오월의봄 펴냄, 2025)은 18세기의 위대한 정치사상가 애덤 스미스와 장 자크 루소를 통해 ‘상업사회’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흔히 스미스는 경쟁과 이기심의 예찬자로,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자 외친 반문명주의자로 여겨진다. 혼트의 분석은 다르다. 상업사회의 이론가인 두 사람은 물론 차이점도 많지만, 그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스미스와 루소의 상업사회론은 근대 정치사상의 아버지, 토머스 홉스에서 출발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유명한 그는 인간의 사회성은 자연적이지 않다고, 사회란 인위적인 노력을 거쳐 만들어진다고 여겼다. 스미스와 루소 모두 인간이 날 때부터 사회적이지 않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홉스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걸었다. 홉스는 사회성 없는 인간들이 통합을 유지할 방법은 강력한 국가의 권위라 보았다. 반면 스미스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의 욕망을 조정함으로써, 루소는 명예와 자존심을 추구함으로써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업사회란 이처럼 선천적인 사회성, 혹은 국가라는 리바이어던 대신 효용과 자존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일컫는다. 물론 그런 만큼 상업사회의 토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스미스와 루소는 상업사회의 가장 큰 적으로 사치를 지목했다. 물론 그 해결책은 달랐다. 루소는 노동과 명예에 기초한 작고 위계적인 공동체를 꿈꿨다. 정직한 노동에서 발현되는 덕성이 상업사회의 부패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반면 스미스는 국제무역과 명예를 연결함으로써 과도한 경쟁을 통제하고자 했다. 무역으로 발생하는 나라 간의 경쟁을 막을 수 없다면, 이를 최대한 명예롭고 신사적으로 벌이자는 것이었다.
혼트는 이를 두고 루소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법칙을 고안한 경제학자였다면, 스미스는 과거를 면밀히 검토해 현실적인 해결책을 내놓은 역사학자였다고 평가했다. 다만 그것이 경제학적이든 역사학적이든 루소와 스미스의 처방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루소의 ‘노동과 명예의 공화국’은 자신이 나고 자란 스위스 제네바처럼 작은 도시국가에서나 통했지, 프랑스나 폴란드 같은 대국들의 대안이 될 수는 없었다. 스미스의 경우 국제무역에서 ‘명예로운 경쟁’이 통하지 않을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의 대표작 ‘국부론’이 인류가 아닌 국가의 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스미스와 루소의 ‘실패’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타고난 사회성도 국가도 아닌 효용과 자존심으로 움직이지만, 바로 이로 인해 만성적인 사치와 경쟁, 부패와 전쟁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업사회 자체의 불안함은 아닐까? 어쩌면 이들의 진단은 자유무역의 좋았던 옛 시절이란 한낱 백일몽에 불과했다는, 과거로부터 날아온 음울한 예언일지도 모른다.
유찬근 대학원생
*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8/53_17651431283233_20251207502130.jpg)
[단독] 통일교 ‘민주당 정치인 15명 지원’ 정황…특검은 수사 안 했다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종묘 앞 재개발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종묘 앞 재개발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7/17650888462901_20251207501368.jpg)
[단독] ‘김건희 후원’ 희림건축, 종묘 앞 재개발 520억 수의계약 팀에 포함

뜨끈한 온천욕 뒤 막국수 한 그릇, 인생은 아름다워
![서울광장 십자가 트리의 기괴함 [한승훈 칼럼] 서울광장 십자가 트리의 기괴함 [한승훈 칼럼]](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8/53_17651455921757_20251208500094.jpg)
서울광장 십자가 트리의 기괴함 [한승훈 칼럼]

“관람객 겁나”…‘국중박’ 600만 시대, 공무직 노동자는 한숨

이 대통령, ‘정원오 서울시장’ 밀어주기?…“잘하기는 잘 해, 저는 명함도 못 내”
![쿠팡, 갈팡질팡 [그림판] 쿠팡, 갈팡질팡 [그림판]](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7/53_17651042890397_20251207502012.jpg)
쿠팡, 갈팡질팡 [그림판]
![이 대통령 지지율 54.9%…민주 44% 국힘 37% [리얼미터] 이 대통령 지지율 54.9%…민주 44% 국힘 37% [리얼미터]](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08/53_17651505356622_20251208500225.jpg)
이 대통령 지지율 54.9%…민주 44% 국힘 37% [리얼미터]

‘윤어게인’ 숨기고 충북대 총학생회장 당선…아직 ‘반탄’이냐 물었더니

“중국은 잠재적 파트너, 유럽은 문명 소멸”…미, 이익 중심 고립주의 공식화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 [단독] 세운4구역 고층 빌딩 설계, 희림 등과 520억원 수의계약](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resize/test/child/2025/1205/53_17648924633017_17648924515568_2025120450403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