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성의 제국’, 윌리엄 C. 커비 지음, 임현정 옮김, 빨간소금 펴냄, 2026년
대학이 위기라고들 한다. 이른바 ‘진보적인’ 교수들 사이에서도 20년 가까이 동결된 등록금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서울의 ‘명문’ 대학들은 외국의 생산성 좋은 연구자를 ‘학술용병’으로 고용해 자교에 이름만 걸어놓고 유명 저널에 논문을 싣게 하다 망신을 치렀다. 이재명 정부가 야심 차게 내건 ‘서울대 10개 만들기’ 프로젝트는 사실상 거점국립대 3곳을 선발해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는 대신 수도권 사립대 수준의 경쟁을 강제하는 사업으로 전락했다.
윌리엄 커비의 ‘지성의 제국’(임현정 옮김, 빨간소금 펴냄, 2026)은 얼핏 대학이 마주한 위기와는 상관없는 ‘속 편한’ 얘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성의 제국이라니, 이제 대학은 더 이상 학문의 전당일 수 없지 않은가? 지은이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 19세기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시작한, 연구와 교육을 아우르는 ‘연구중심대학’의 이상은 20세기 미국은 물론 21세기 중국에서도 포기된 적이 없었다. 이는 전문적인 연구소와도, 교양 교육 중심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와도 구별되는 대학만의 정체성이다.
다만 대학이 대학다워야 한다는 원칙론으로는 아름다운 이상을 지켜갈 수 없었다. 연구중심대학의 정체성은 교수와 학생, 이사회와 지역사회 사이의 복잡한 역학관계 속에 숱한 갈등과 조정, 타협을 거쳐 시대에 맞게 바뀌었다. 미국과 중국의 대학에서 여러 보직을 맡아 사업을 추진해본 경험이 있는 ‘행정가형’ 학자인 지은이의 강점이 여기서 발휘된다. 이상 자체보다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여러 조건, 그 가운데 대학의 선택에 주목하는 것이다.
베를린대학에서 미국 하버드대학, 중국 칭화대학까지 연구중심대학이 놓인 환경은 어쩌면 크게 다르지 않다. 총장과 실무진이 안정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지만 교수와 학생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한다. 정부 지원이 없다면 예산을 충당할 수 없지만 동시에 정부와 너무 가까워지거나 이에 종속되면 안 된다. 각 대학의 선택은 저마다 달랐다. 미국 남부 듀크대학은 적극적인 학제 간 연구를 추구함으로써 동부 ‘아이비리그’에 대한 오랜 열등감에서 벗어났다. 중국 난징대학은 중화민국 시절의 지적 유산을 활용해 공산당과 밀착한 베이징의 명문 대학들과 차별성을 확보했다.
물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 하버드대학은 외부의 ‘스타’ 교수들을 영입함으로써 국제적인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이는 우수한 내부 인재를 길러낼 역량을 떨어뜨렸다. 반면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의 교수진은 대학에 대한 충성도가 강했고 동료애 넘치는 공동체 문화를 유지했으나 바로 그 이유로 폐쇄성이 커지고 신규 교수 채용이 어려워졌다. 탈냉전 이후 베를린자유대학의 도약은 무려 15년간 사무총장을 한 페터 랑게의 강력한 리더십 덕분이었다. 다만 이는 교수와 학생의 평등한 공동체라는 건학이념에서의 이탈이기도 했다.
중요한 건 어쨌거나 이들은 시대와 환경에 맞게 연구중심대학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분투했다는 점이다. 해제를 쓴 이종식이 다른 어떤 기관도 대체할 수 없는 대학만의 본질을 구성원 스스로 논의하고 결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도 그래서일 터다. 대학은 연구와 교육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대한 기여, 이윤 창출 등 때로는 상반되는 여러 목표를 수행한다. 재단, 교강사, 학생, 실무진 등 대학을 이루는 다양한 주체는 그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고, 어떤 대가를 감수할 것인가? 이른바 ‘대학의 위기’ 앞에서 진정 던져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유찬근 대학원생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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