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 강민경 지음, 푸른역사 펴냄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그간 쌓여온 편견이 너무 강해 도무지 새로움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시대를 만날 때가 있다. 한국사에서는 1910년대가 그렇다. 한반도가 일본의 완전한 식민 지배에 놓인 첫 10년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이유가 없지 않다. “무단통치” 혹은 “헌병경찰통치”라는 표현이 잘 보여주듯 이 시기 일제의 통치를 떠받친 건 압도적인 폭력이었다. 1919년 3·1이라는 거대한 해방의 움직임이 일기 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별다른 투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제외하면 조선어 신문도 발행할 수 없었기에 언론과 문화라는 우회로조차 난망했다.
다만 한반도의 1910년대는 고요했을지언정 아무 일도 없었던 시기는 아니었다. 망국의 백성으로든, 식민지의 신민으로든 어쨌거나 살아가야 했으므로. 강민경의 ‘나는 이완용의 글씨가 궁금했다’(푸른역사 펴냄, 2026)도 그런 ‘살아감’의 단면을 포착한 책이다. 지은이는 이완용의 붓글씨를 통해 식민지 조선의 서화계, 나아가 ‘전통의 근대’라는 자못 모순적인 풍경을 그려낸다. 나라를 팔아먹었으나 왕조의 마지막 충신이었고, “기계 같은 사람”이란 평을 들은 근대인이었으나 전통적 양반 의식을 버리지 못했으며, 일본에 빌붙어 출세했음에도 끝까지 일본어를 배우지 않았던 이 의뭉스러운 인물은 어째서 붓글씨에 그리도 정성과 열의를 보였는가?
오늘날의 막연한 환상과 달리 이완용의 글씨는 그다지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균형감과 안정감을 갖췄으나 깊이는 없는, 미술평론가 황정수의 말마따나 “뛰어난 기능을 지닌 빼어난 테크니션”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완용이 명필로 기억된 건 결국 그 권세 덕이었다. 그에게 붓글씨란 자신의 교양과 영향력을 과시하고, 일본인 유력자와 친교를 맺는 수단이었다. 이완용은 ‘일본의 괴벨스’ 도쿠토미 소호부터 경상남도 시골 소년들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가리지 않고 글씨를 써주었으며, 서화가들을 후원하고 네트워크를 조직했다. 1922년부턴 조선미술전람회 서부(書部) 심사위원을 맡아 조선에 온 일본인 서화가들과 우정을 쌓았다. 그는 그렇게 붓글씨를 통해 조용히, 그러나 바지런히 1910년대를 보냈다.
서화가 이완용의 1910년대는 한반도의 ‘전통’이 ‘근대’와 마주한 시기이기도 했다. 떳떳지 못한 재능이었던 서예는 비로소 제값을 받을 수 있는 예술이자 노동으로 인정받았다. 알음알음 전해지던 붓글씨는 공개적인 서화회와 전국적 유통망을 갖춘 언론을 통해 비로소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문화로 거듭났다. 전통적인 동아시아의 ‘한문 네트워크’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넓고 깊어졌다. 경성의 이완용이 중국 베이징의 김태석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은 그 증거 중 하나다. 김태석은 추사 김정희의 애제자 김석준에게 서화를 배운 전서와 전각의 명인으로, 일제가 ‘요시찰인’으로 감시한 인물이었다. 붓글씨가 매개한 ‘한문 네트워크’는 경성과 베이징, 친일과 반일을 넘나들었다.
다만 이완용의 성실한 붓글씨가 보여주는, 전통을 통해 근대와 공명한 수많은 움직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는 여전히 고민스럽다. 그 점에서 지은이가 직접 그린, 이완용의 거실 풍경을 묘사한 책의 표지는 퍽 의미심장하다. 석유 등잔과 문방사우가 놓여 있을 뿐 정작 주인은 자리를 비운 거실은, 지은이가 이완용과 식민지 조선을 마주하며 느낀 곤경의 한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간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최대한 걷어내고, 비움과 침묵으로 무언가를 보여주고 말하려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유찬근 대학원생
*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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