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애 예능 프로그램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에서 연애를 해본 적 없는 출연자들. 재윤(맨 왼쪽)은 호감 가는 이성이 옆에 있지만 홀로 열심히 롤러스케이트만 탔다. 넷플릭스 제공
연애를 드라마로 배운 내게 드라마가 잘 조성된 테마파크라면, ‘연애 예능 프로그램’(연프)은 세렝게티 같았다. 숙련된 연기자가 정해진 대본에 따라 연애하는 드라마에 비해 날것의 매력이 충만한 세계였다. 물론 제작진의 설계와 편집이 개입된 가공된 실제이지만, 이 안에 살아 있는 날것의 감정은 ‘연프’의 핵심 매력이다. 연프의 또 다른 매력은 드라마와 닮았다는 점이다. ‘리얼’이라는 이름 아래 일반인이 출연하지만,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그리고 반전 등의 서사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출연자도 주인공, 서브남, 여주, 빌런, 메기 등 고유하고도 다양한 캐릭터성을 지닌다. 연프의 이런 양면성은 우리를 더욱 몰입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는 기존의 연애 예능 프로그램과는 다른 관점으로 모태솔로를 바라보며 그들의 성장을 조명한다. 넷플릭스 제공
연프에 대한 관심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비슷한 포맷이 반복된 탓에 지겨워졌고, 연애보다는 홍보 활동이나 ‘셀럽’이 되는 일에 더 관심 있어 보이는 출연자가 나오면 마음이 짜게 식는다. 그럼에도 (욕하며) 계속 보는 이유는, 뜻밖에도 거울치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사회 실험’으로 불리는 ‘나는 솔로’(이엔에이(ENA) 방영)를 보며 거울치료를 할 때가 많다. 살면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유형의 출연자가 하는 말과 행동에 몸서리치면서도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리고, 대리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미성숙한 출연자를 보다보면 ‘웃지 마, 네 이야기야!’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특히 연애뿐 아니라 관계맺기와 사회생활에 한없이 서툰 모태솔로 특집은 그 거울치료 효과를 최대한 느끼게 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개인적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닐 듯하다. 연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출연자들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지만, 결국 연프는 우리 자신의 연애관과 관계맺기 방식을 되돌아보게 하고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지를 질문하게 한다. 최근 화제가 된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넷플릭스 방영, 이하 ‘모태솔로지만’)가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프로그램은 기존 연프와는 다른 관점으로 모태솔로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모태솔로지만’은 지원자 4천 명 중 20대 200명을 심층 면접한 끝에 출연자 12명을 구성했다. 첫 회부터 이들은 ‘연애하고 싶다’는 욕망뿐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싶다는 절실함과 진정성을 드러내며 시선을 끌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이들의 예측 불가능성이다. 제작진이 “보법이 다른 게 아니라 보법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연애 서사에 익숙한 시청자조차 쉽게 흐름을 짐작할 수 없는 이들의 행동은 연프의 관성에 지친 ‘고인 물’들을 환호하게 했다. 도대체 어느 연프가 데이트 실패 직후 매운탕에 공기밥까지 야무지게 먹는 ‘먹방’을, 아무 ‘썸’도 없이 각자 롤러스케이트만 타는 장면을, 좋아하는 상대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풀숲으로 슬라이딩하는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다. 하지만 출연자들의 진정성과 의외성만으로는 이렇게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서사가 대중에 설득력 있게 다가가도록 한 제작진의 영리한 감각과 출연자를 대하는 방식이 남달랐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는 기존의 연애 예능 프로그램과는 다른 관점으로 모태솔로를 바라보며 그들의 성장을 조명한다. 넷플릭스 제공
‘모태솔로지만'은 그간 나온 연프를 성실하게 학습한 뒤 내놓은 진화된 버전이 아닐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썸메이커스’다. ‘모태솔로지만’은 대중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중계하던 연프 속 패널들의 역할을 확장했다. 이은지·강한나·서인국·카더가든으로 구성된 4명의 썸메이커스는 출연자 12명을 3명씩 맡아 사전에 만나 직접 코칭했다. 이 밖에도 제작진은 6주 동안 출연자들에게 운동, 심리상담, 스피치 훈련 등을 제공해 출연자들이 신체적·심리적·사회적으로 변화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사전 작업 덕분에 썸메이커스는 단순한 중계자가 아닌 ‘우리 아이'(실제로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온다)를 걱정하고 변호하고 응원한다. 그 감정선은 대중에도 그대로 전이돼 우리도 출연자들을 ‘당사자’의 심정으로 봤다가 동생이나 조카, 자녀를 보는 마음으로 보게 된다. 즉, ‘모태솔로지만’은 출연자들이 연애 능력 향상뿐 아니라 총체적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촉진함과 동시에 패널과 대중도 적극적으로 그들의 변화 과정에 참여하게 한다.

카더가든·서인국·이은지·강한나(왼쪽 위부터 시계방향)로 구성된 4명의 썸메이커스는 출연자 12명을 3명씩 나눠 맡고 사전에 만나 직접 코칭을 했다. 넷플릭스 제공
이런 관점의 변화는 사소하지만 중요하다. 앞서 소개한 ‘나는 솔로' 모태솔로 특집과 비교해보자. ‘나는 솔로'가 모태솔로를 보는 관점은 ‘모자란 사람'이다. 출연자들의 부족한 면을 부각해 놀림의 광장에 세워 구경꾼을 모으듯 연출하고 편집한다. 그래서 출연자들은 “저러니 여태 솔로지”라며 놀려도 되는 대상이나 대중이 분노를 표출해도 되는 대상이 되곤 한다. 이런 관점은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으면 하자가 있거나 비정상 상태로 외롭고 불행하다는 사회적 편견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이에 비해 ‘모태솔로지만'이 모태솔로를 보는 관점은 ‘서툰 사람'이다. “다른 연애 프로그램 ‘솔로지옥’이든 뭐든 간에 거기 나오는 출연자분들은 비유를 하자면 도자기다. 그런데 우리는 도자기가 아니라 지점토다. 20대 초반, 중반, 이제 후반을 달려가고 있는데 20대 초반에 아니면 10대 때 했어야 될 것들을 저는 못한 거잖아요. 내가 뭘 좋아하고 어떤 연애를 추구해야 하고 어떤 사람을 원하고 방향성을 찾아서 나가기만 해도 그것만으로도 된 거”라는 민홍의 말이 출연자를 대하는 이 프로그램의 기본적 시선이다. 즉, 사회 실험 대상이 아니라 지점토에서 도자기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인간으로 본 것이다.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출연진이 처음 만나는 장면. 연애에 서툰 이들이 출연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의 전개로 연애 예능 프로그램 ‘고인 물’들을 환호하게 했다. 넷플릭스 제공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말이 ‘성장’이다. 이 성장은 세속적 성장의 의미보다는 ‘가능성’에 방점이 찍힌다. 이 프로그램에서 성장 서사의 중심축은 재윤이다. 썸메이커스들은 “남들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다’ 이런 말을 하곤 하는데 사실 전 오래전부터 근거 없는 수치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라는 말을 상대방 눈도 못 마주치며 하던 재윤이 성장하고 있음을 자주 언급하며 뿌듯해한다. 의대 진학을 위해 공부만 하느라 연애하지 않았던 현규도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연애가 어려운 것임을 아프게 깨달은 이도의 눈물도, “난 너야!”라는 여명의 용감한 고백도 실패가 아닌 경험으로 해석된다. 그렇기에 “너무 한 편의 성장 드라마다”라는 썸메이커스 강한나의 말은 이 프로그램을 가장 정확하게 정리한 말이다. ‘나는 솔로’ 모태솔로 특집이 ‘사회 실험’이라면, ‘모태솔로지만’은 ‘인간 성장담’인 것이다.
그 성장이 러브라인 연결에 성공하는 결말로 이어지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것을 이 프로그램은 섬세하게 보여준다. “짝을 못 찾아도 나 자신을 찾았으면 됐지, 뭐”라는 썸메이커스 이은지의 말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연애는 인간을 성장하게 하는 계기 중 하나이지, 필수 조건이 아님을 상기시키는 말이다. “부모나 자식은 하늘에 맡겨서 태어나는 거잖아. 근데 남자만큼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잖아. 아니면 그냥 아닌 거야. 단순히 연애하고 싶다고 네가 갖고 있는 그 모양을 절단 내면서 네모를 만들고 연애를 하진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민홍의 말도 마찬가지다. 연애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발견하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며 지키는 것임을 이 프로그램은 모태솔로 12명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다만 이런 성장 서사에도 아쉬운 지점이 있다. 9화에서 ‘1박2일 데이트’를 꼭 해야 했는지 비판적 의문이 남는다. 이 장면은 그간의 ‘성장 서사’가 쌓아온 섬세한 감정의 결을 단순한 자극으로 덮을 위험이 있다. 출연자 개인의 변화와 관계의 성숙을 보여주기보다는, 기존 연프의 관습처럼 극적인 이벤트를 통해 서사를 마무리하려 했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이 구축한 성장담으로서의 연프라는 방향성과는 어긋난다. 다 떠나서 촬영 이후 ‘현생’을 살아야 하는 정목과 지연에게 좋은 일이었을까?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에도 아쉬운 지점은 있다. ‘1박2일 데이트’를 꼭 해야 했는지 비판적 의문이 남는다. 넷플릭스 제공

‘모태솔로지만 연애는 하고 싶어’ 메인 포스터. 넷플릭스 제공
연애를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여기지 않는 세대, 혼인율이 하락하는 시대에 연프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가고 있다.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를 실패나 결핍으로 간주하지 않고, 개인의 발견과 성장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고정된 성역할에서도 벗어나기를 시도하는 중이다. ‘모태솔로지만'은 이런 변화의 맨 앞에 선 프로그램이다. 이제 연애는 인생의 필수 관문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양식 중 하나가 됐고, 사랑은 목표가 아니라 성장의 계기가 됐다. 짝을 찾는 것보다 나를 이해하고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진 시대에 연프도 더는 ‘연애만’ 하지 않는다. ‘짝짓기' 서사에서 ‘성장' 서사로 변화하고 있다. 앞으로의 연프들은 어떻게 변화할까? 출연자를 구경거리로 소비하지 않고 사랑의 의미를 전달한다면, 연애에 실패하는 이야기가 아닌 성장하는 인간상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의 뚝딱거림과 서툰 용기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연프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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