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때부터 보기 시작했으니 웹툰을 본 지도 10년이 다 됐다. 이런 오타쿠 기질을 활용해 웹툰과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소개하는 칼럼도 쓰고 있으니 ‘웹툰’이라는 매체에 대한 내 사랑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 기억에 남는 수작을 꼽자면 수도 없다. 그러나 최근 3년간 가장 몰입하며 좋아했던 작품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정년이>를 윗줄에 둘 것이다.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대사,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 <정년이>가 가진 서사는 나를 비롯한 많은 독자에게 놀라움과 희망을 선사했다. 목포장터에서 조개를 팔던 소녀 정년이가 뛰어난 여성국극 배우가 되기까지 성장을 그린 웹툰 <정년이>는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으며 드라마 제작까지 진행 중이다.
2024년 3월15일, 오래된 목욕탕을 개조해 만들었다는 서울 지하철 7호선 상도역 근처의 한 카페에서 서이레 작가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 내내 차분하고 명확한 태도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주었다.
서이레 작가는 2015년 데뷔 당시부터 전적으로 ‘글 담당’ 웹툰 작가로 활동했다. 글과 그림을 한 작가가 맡아서 하는 것이 대부분이던 때, 그의 시도는 드물고 새로운 것이었다.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해 꾸준히 소설을 써온 그는 대학교 3학년쯤 됐을 때 ‘돈을 벌 수 있나?’라는 위기감 때문에 직업적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보다 산업적인 수업을 찾아 듣던 그는 ‘웹소설’, 나아가 그림작가와 협업하는 ‘웹툰’이라는 매체에 닿게 됐다. ‘체면을 차려야 한다’ ‘단정해야 한다’는 느낌을 주었던 소설과 달리 웹툰에서는 좀더 자유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편견’ 또한 그를 웹툰 작가의 길로 이끌었다.
이제는 한 작품에 글작가와 그림작가가 따로 존재하며 각자의 역할을 맡아 하는 방식이 드물지 않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여전히 고유하고 독보적이다. 특히나 데뷔할 즈음만 해도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들은 연재 플랫폼에서 반려당하는 일이 잦았다. 남성 캐릭터를 주연으로 내세운 작품보다 준비를 더 철저히, 잘해야만 바늘귀처럼 좁은 연재의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그로 하여금 연재 전 준비에 심혈을 기울이게 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완성한 뒤 시놉시스와 트리트먼트(시나리오의 축약본)를 그림작가와 공유하고, 그 과정에서 충분한 수정과 합의를 거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웹툰을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그가 대본 작업을 하면 그림작가가 대본을 바탕으로 콘티 작업과 그림 작업을 진행한다. 글작가 가운데 연출 욕심이 많아 콘티 작업까지 맡는 사람이 많은 것에 비해, 명확한 선을 그어두고 ‘그림작가의 역할’이라고 정한 부분을 침범하지 않는 편이다. 그는 “저는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이라 연출에는 거의 손을 안 대요. 저보다 (그림작가가) 훨씬 잘할 거라 생각해요. 전적으로 맡기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요한 발화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소녀행>에 나오는 ‘혜’와 ‘영비’부터 의 ‘설경’, <라나>의 ‘라나’, <정년이>의 ‘정년’까지 여성들은 모두 자신의 삶에 주체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내가 그에게 ‘여성의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를 묻자, 그는 새삼스럽다는 듯 ‘타고난 것 같다’고 말했다. 초등학교에서 처음 여자중학교에 간 뒤 학급 임원을 모두 여자가 맡는 것을 보고 충격받은 이후 여고, 여대를 나온 그는 쭉 그런 세계에 있었다. “여자 캐릭터들이 제게는 이상하거나 특별한 게 아니에요. 너무 당연한 거예요. 특별히 ‘이렇게 기획해야지’라기보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인 것 같아요.” 그의 캐릭터들은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아무나 그가 만드는 등장인물들을 만들어낼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그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을 구성하는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시대와 숙명처럼 주어진 역할에 반항한다.
그의 데뷔작인 의 주인공 설경은 개인사업자들의 ‘사람을 위한’ 화장품을 판매하는 멀티스토어 회사를 차린다. 그는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주변을 신경 쓰는 정의로운 캐릭터다. 설경의 주변인들은 그런 설경을 답답해하며 ‘왜 저러고 사냐’고 한다. 그러나 서이레 작가는 설경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어릴 때 제가 좀 그랬던 것 같아요. 스무 살, 스물한 살 때 저는 되게 도덕적인 사람이었거든요. ‘왜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베풀지 않을까?’에 화가 많았고.” 그는 똑바른 잣대를 세상에 들이대며 화를 냈다. ‘그럴 거면 왜 중고등학교 때 도덕을 가르치고 윤리를 가르치지?’ 많은 사람은 자본주의 논리로 잔인함을 숨기려 한다. 그러나 사실 자연은 약육강식이 아니다. ‘자본주의로만 사회가 굴러갔다면 이렇게 많은 부를 누릴 수 있을까?’ 그가 품었던 의문이다. “저는 자본주의의 이타성을 설경을 통해 말하고 싶었어요. 자본주의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라면, 인간다운 자본주의를 말해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설경은 위기를 맞는다. ‘VOE’는 여러 화장품을 입점하는 데서 난관에 봉착하고, 투자자를 유치하지 못한다. 전국에 냈던 여러 지점을 철수하게 된다. “실패하죠, 결국은.” 그는 VOE 연재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잘될 것 같지 않았어요. 잘되면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때는.” 그의 세계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설경은 좌절하고, 무너진다. 그럼에도 다시 일어난다. “그래도 걔는 다시 그런 일을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작은 회사를 시작하고.”
이처럼 현실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선보이는가 하면, 한국 무속과 설화 ‘원천강 오늘이’를 모티브로 한 세계관의 <소녀행>, 에스에프(SF) 세계관의 <라나>, 1960년대 여성국극을 무대로 하는 <정년이>까지, 서이레 작가의 작품들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는 어떻게 이렇듯 폭넓고 다양한 장르의 세계를 주유할 수 있었을까. 그는 그 방법으로 ‘대책 없음’을 꼽았다. “겁이 없죠. (웃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장르에 상관없이 일단 하고 봐요. 그때그때 꽂히는 것을 하는 편이에요.”
신채윤 <노랑클로버> 저자
◆<정년이> <라나> 글작가 서이레 인터뷰가 다음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
‘마리아는 메시아를 낳고 싶었을까’ 도발적 질문 던지는 서이레의 세계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47.html
서이레 작가는 <정년이> 속에서 자신과 가장 닮은 인물로 ‘도앵’을 꼽았다. 도앵은 가세가 기운 집안에서 똑똑하게 태어나 엘리트로 성장하는 캐릭터다. ‘아버지의 딸’로서의 자아가 강한 탓에 자신 안의 여성혐오가 스스로를 괴롭게 한다. “막 대학생활을 할 때의 저랑 많이 닮았다고 느꼈어요.” 그는 자신이 살아온 과거의 모습들을 쪼개 독창적이면서도 공감을 이끌어내는 인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만들어낸 등장인물 하나하나를 인간적으로 대한다. 처음 정년이를 기획할 때도 등장인물에 대한 고민을 하다 고민 속 인물이 자신의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때, ‘인물이 됐다’고 느꼈다. “정년이가 옆에 앉아 있는 걸 내가 상상할 수 있네. 그러면 된 것 같아.”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는 인물은 스스로 움직이기도 한다. “얘가 알아서 도망가요. 제가 가고 싶은 길이 있는데 이 길대로 안 가고 자기가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거예요.” 특히 <정년이>의 ‘주란’은 완벽을 추구하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갖지 못하는 인물 ‘영서’와 짝을 이뤄 남역과 여역을 연기하게 된다. “원래는 주란이가 영서랑 엮일 일이 없는 캐릭터였어요. 그런데 얘가 갑자기 영서랑 붙어버렸어요. 그때 ‘주란이가 가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자’ 마음먹고 그에 따라 이야기를 조정했어요.”
2015년 다음웹툰 연재(현재 네이버웹툰 서비스 중). 유리천장에 부딪혀온 ‘ 설경 ’ 과 ‘ 겨운 ’ 이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화장품 멀티스토어 ‘VOE’ 를 일궈나가는 이야기 .
< 소녀행 > 2017년 다음웹툰 연재(현재 네이버웹툰 서비스 중). 저주받은 소녀 ‘ 혜 ’ 가 저주를 풀고 유일한 친구 ‘ 영비 ’ 를 구하러 떠나는 여정 .
< 라나 > 2018년 네이버웹툰 연재. 사이보그와 로봇만이 존재하는 시대 , 사이보그가 된 ‘ 요한 ’ 과 마지막 남은 인간 ‘ 라나 ’ 가 세상을 지배하는 ‘ 나함교 ’ 에 맞서 그들의 세계를 지키는 이야기 .
< 정년이 > 2019∼2022년 네이버웹툰 연재. 1950 년대 , 목포 소녀 ‘ 정년이 ’ 가 뛰어난 여성국극 배우가 되기까지 성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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