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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그냥 다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먹는 존재><족하> 들개이빨

[21WRITERS 들개이빨①] 세상을 직설적으로 씹고 뜯고 맛보다
등록 2024-05-18 05:41 수정 2024-05-22 13:45
2024년 5월3일 서울 자택에서 만난 들개이빨 작가. 김진수 기자

2024년 5월3일 서울 자택에서 만난 들개이빨 작가. 김진수 기자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인기 웹툰 <먹는 존재>의 작가 들개이빨(필명·본명 유아영) 작업 책상은 독특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병실 침대용 책상을 쓴다. 유 작가는 “시간 때문에” 혹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가 제일 집중이 잘돼서” 이런 방식을 택했다. 책상 한편의 거울도 작가 스타일을 보여준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표정을 관찰해 그림을 그린다. 주인공 대부분이 자기 자신을 캐릭터화한 인물이라서다. 대표작 <먹는 존재> 속 주인공 ‘유양’도, 연재 중인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 속 주인공 ‘들빨개빨’도 작가와의 싱크로율이 높다. 침대 맞은편 책꽂이에는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좋아하는 캐릭터 ‘유양’처럼 <수학의 정석>이 꽂혀 있었다.

신림동에서 면발 뽑은 고시생

—자신을 모티프로 한 만화 <먹는 존재>에 나오는 것처럼 법대생이었다. 고시 준비하던 법대생이 왜 웹툰 작가가 됐나.

“만화가가 된다고 하면 좋아하는 부모님은 잘 없다. 제가 어릴 땐 5월이면 ‘사회악’이라며 만화책을 불태우는 연례행사까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권위적 직업을 가져야겠다’였다. ‘일단 판사가 된 다음 만화를 그리면 아무도 뭐라고 안 하겠지?’ 근데 내가 그걸 간과했다. 내가 공부를 무지하게 하기 싫어 했단 거.(웃음) 대학 입시는 죽을힘을 다해 어떻게 했는데, 고시 공부 양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 신림동에 고시 공부하러 들어가서 밀가루로 면발 뽑고 딴짓했다. 신림은 완전 좋았다. 그러니까 공부 안 하기에 정말 좋았다.”

—수학 문제를 푸는 유양처럼 책꽂이에 진짜 <수학의 정석>이 꽂혀 있다.

“아버지가 수학자라고 해야 하나, 수학을 전공하셨고 아무래도 영향을 받았다. 학창 시절 수학을 좋아했다. 모든 과목 중에 정답으로 가는 과정이 가장 명쾌해서 재미있는 모험 같았다. 예를 들면 국사는 ‘내가 공부를 안 했다’ 그러면 그냥 다 틀리는 거지만, 수학은 한번 궤도에 올려놓으면 ‘자전거 타기’처럼 문제를 풀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점이 좋았다. 뭔가 엄청나게 복잡한 일들이 널려 있는데 딱히 그 일에 뛰어들어 해결할 에너지는 없을 때, 그럴 때 수학 문제를 풀게 되는 거 같다.”

2024년 5월3일 서울 자택에서 만난 들개이빨 작가. 김진수 기자

2024년 5월3일 서울 자택에서 만난 들개이빨 작가. 김진수 기자


—서울에서 태어난 줄 알았는데 에세이집 <나의 먹이>(콜라주 펴냄)를 보니 부모님이 시골에서 채소를 보내주시더라. 어디에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나.

“서울 구로구에서 태어나 구로, 안양, 강동 등에서 살았다. 부모님은 강원도로 귀촌해서 채소를 종종 보내주신다. 나도 불러주는 데가 없으면 언제라도 다른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요새는 농사일도 가끔 돕는다. 시래기 말리는 일이나 사과 따는 일 같은 거. 어릴 때 나는 그냥 정말 음침한 학생이었다.(웃음) 되게 내성적이고 집 밖에 나가는 거 싫어하고. 또래 집단이 아무래도 날 좀 싫어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교우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야 하지? 생각하면서 초등학교 3~4학년 때까지 힘들어했다.”

—어린 시절 왜 창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친구들하고 얘기할 때면 이상하게 같은 사건이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이 남들보다 큰 느낌이었고 그게 괴로웠다. 왜냐하면 내가 느끼는 감정에 아무도 공감을 안 해주니까. 그걸 일기에 많이 썼고, 내가 쓴 걸 남한테 공감시키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좀 뭐랄까. ‘남을 공감시키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걸 그냥 무의식중에 느꼈다. 막연하게 박완서 같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막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형태는 만화였다. 늘 생각난 건 만화 칸. 글은 정말 글의 형태로 떠오르지 않나. ‘이런 문장을 쓰고 싶다’라는. 그런데 장면, 장면이 떠오를 때가 많았고 넘겨보는 페이지 느낌으로 생각날 때도 많았다.”

웹툰 <먹는 존재> 속 한 장면. 들개이빨 제공

웹툰 <먹는 존재> 속 한 장면. 들개이빨 제공


‘먹는 이야기’로 위장한 ‘인생 이야기’

들개이빨의 만화 <먹는 존재>는 ‘가벼운’ 음식 이야기로 위장한 ‘무거운’ 인생 이야기다. 읽을 때의 느낌과 읽고 나서의 느낌이 다르다. 거친 욕설과 19금 유머가 난무하는 코미디에 깔깔 웃으며 페이지를 넘기지만, 다 읽고 난 뒤엔 어딘지 찜찜한 대사를 수차례 곱씹게 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가족이 뜨끈한 닭볶음탕을 나눠 먹는 밥상에서 아버지가 밥맛 뚝 떨어지는 소릴 한다. “고기가 그렇게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 그게 세상 비극의 본질인 거야. 조물주가 애초부터 남을 안 잡아먹고 살 수 있게끔 생물을 만들었으면 다 해결되는 것을, 굳이 남의 살을 탐하게 만들어놓고 탐욕을 부리면 벌을 주네 지옥에 떨어트리네.” 어머니 인상은 구겨졌고, 불쾌해진 아들은 아버지와 언성을 높여 싸운다. 그때 세 사람은 양념이 쏙 배어든 감자를 밥에 쓱 비벼 한술 뜨는데, 뜨거운 김이 나오는 감자는 탄성이 나오게 맛있다. 고성은 저절로 사그라지고, 맛있는 걸 먹자니 자리에 없는 딸(누나) 유양이 생각난다. ‘결혼도 안 하고 처박혀 있길 좋아한다’는 유양에 대한 밥상머리 뒷담화는 사랑이자 속박이다.

 

—음식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뭔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먹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가 많았다. 먹는 걸 되게 좋아했고, 또 어릴 땐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이었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상황이 됐건 늘 ‘먹을 것’에 사로잡혀 있더라. ‘언젠가 먹는 만화를 그리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매끄럽게 사회에 적응하길 거부하는 유양은 음식에서 위안받는다. 실제 작가님이 방송사 일 등 회사를 그만둔 것이 <먹는 존재> 에피소드의 시작이라고 보면 되나.

“사람들과 있는 게 내겐 되게 기 빨리는 일이었다. 방송사에서 일할 때도 사실 따지고 보면 좋은 분들을 만났다. 그런데도 그 공간 자체가 고통스럽고 출근할 때 그냥 눈물이 쏟아지는 거다. 보통 방송 작가들이 ‘방송 일이 너무 힘들긴 한데 엔딩크레디트에 내 이름이 올라갈 때 시름이 싹 잊힌다’고 한다. 나는 전혀 잊히지 않았다. 그러면 계속 이 일을 할 의미가 없지 않나 싶었다.”

—‘여성·음식·비건’이란 주제의식이 작품을 관통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문화와 불화하는 여성이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묘사되는데, 이 여성(유양)은 ‘먹이 피라미드’에서 자기 위치보다 아래에 있는 굴을 보며 연민을 느끼고 술을 강권하는 사장을 향해 결국 굴을 던졌다. 주제의식을 먼저 정해놓고 이야기를 구상하나.

“내가 의도한 연결은 아니었다. 요즘 친구 중에 비건을 선언한 친구가 많았기 때문에 그게 그냥 내 작업에 반영됐던 것뿐이다. 다른 웹툰 작가들도 그런지 궁금한데, 주제의식을 갖고 작품을 그리는 사람이 오히려 소수이지 않을까. 평소에 ‘재밌는 게 최우선’이라 생각하며 그린다. 일단은 읽어서 재밌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좋은 영향이 있으면 좋겠지만 선한 의도라는 게 반드시 선한 결과로 이어지진 않으니까. 오락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작업물에 메시지가 녹아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아버지가 한 육식에 대한 말도 실제 모습을 담았나.

“아버지께서 실제로 하신 말이다. ‘인간이 남의 육체를 녹일 수 있는 위를 다 하나씩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끔찍한 게 아니냐. 세상 자체가 지옥이다.’(웃음) 이런 말씀을 잘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좀 비교육적이었단 생각도 드는데 이런 취지였다. ‘이 세상은 너무 고통스러울 거고 너는 그걸 잘 알아야 한다. 공부 열심히 해라.’”

웹툰 <먹는 존재> 속 한 장면. 들개이빨 제공

웹툰 <먹는 존재> 속 한 장면. 들개이빨 제공


사회와 불화하는, 어딘지 삐딱한 여자

—유양과 ‘겉보기에’ 정반대 모습을 한 예리(매일 화장하고, 무례한 농담에도 잘 웃어주며, 보수적인 한국 결혼 문화에 적응하는 인물)도 주변 사람을 그린 건지 궁금하다.

“그렇다. 대신 실존 인물을 많이 조합해 특정할 수 없게 노력했다. 예리는 친구 중 가장 얌전한 친구들의 평균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여성은 사회생활에서 때로 유양이 되기도, 때로 예리가 되기도 한다. 이들의 너무 다른 외양을 보면 ‘나다운 게 뭘까’ 혹은 ‘여성스럽다는 건 뭘까’ 고민하게 된다.

“내게도 계속 어려운 지점이다. 나는 여자들이 그냥 다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여자들도 그렇고, 일단 나부터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한때 나는 이 모든 고민의 해답이 페미니즘에 모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페미니즘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여자의 삶을 제약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의 자아검열 축이 된다는 느낌. 약간 거리를 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늘 거리를 조절해가면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점인 거 같다.”

—주인공 유양은 ‘내가 여성이니까 내가 그냥 여성적인 거’라고 외친다.

“그렇다. 유양은 기본적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캐릭터인데 그것도 사실 어떤 모순점이 있다. 여성으로서 보여주는 태도가 사회 억압의 결과물일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흔히 말하는 ‘여성스럽게 입는 것’이 일종의 사회적 압박 때문에 그렇게 입는가, 내가 좋아서 그렇게 입는가. 그건 기본적으로 분간할 수 없는 문제다. 이 부분에 대한 내 생각이 첨예하진 않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남의 일에 대해서는 ‘그냥 남이 알아서’ 하는 게 가장 적당하지 않을까.”

—<먹는 존재> 이후 나온 작품 <족하>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가족문화를 다루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고 무엇을 봤을 때 표현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나.

“<족하>는 조카가 생겨서 시작한 만화다. 한 집안에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다. 내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읽다보면 어떤 맥이 보일 거다. 가족 내에서 누군가를 돌보고 수발드는 역할을 여자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혹은 어쩔 수 없이) 떠안는 모습을 볼 때, 특히 결혼하면 그 역할이 한층 더 무거워지는 모습을 볼 때 가부장제의 강력함을 느낀다. 그 틀에서 벗어나 다르게 살고 싶다는 욕구를 나 스스로 느끼거나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여자들과 분노의 대화를 나눌 때, 이 순간을 만화로 그리고 싶다는 충동을 크게 느낀다.”

웹툰 <족하> 속 한 장면. 들개이빨 제공

웹툰 <족하> 속 한 장면. 들개이빨 제공


—연재 중인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부내죽)에선 ‘위악의 시대에 비건과 페미니즘이란 두 개의 모래주머니를 찬 여자뮤지션’을 내세웠다. 왜 위악의 시대라고 했나.

“온라인상에서 남을 해치는 말이 한창 많이 오간다. 그런 말이 더 눈에 띄고 조회수에 유리하니까. 자극적인 말이 넘치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이나 ‘비거니즘’을 주장한다는 건 어쨌든 ‘굉장히 험한 세상이라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거다. 이 두 이야기는 ‘너만 그렇게 잘났냐’ 식의 공격을 받기 참 쉽다. 그래서 이 둘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별(여자뮤지션)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걱정을 그렸다.”

◆ <먹는 존재> <족하>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 들개이빨 작가 인터뷰는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여자들이 그냥 다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5520.html) ◆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팁박스-<먹는 존재> 작가는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음식 이야기로 유명해진 작가는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할까.

“진짜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요즘은 빵인 것 같다. 스트레스가 아주 심할 때는 뭐랄까, 몸에 나쁜 크림이 잔뜩 들어간 빵, 달달한 빵 이런 게 아주 먹고 싶다. 엄마가 해주시는 음식 중에는 감자탕을 좋아했다. 돼지뼈를 사다가 푹 끓인 음식인데, 내가 집에서 해보니까 그게 쉬워서 해주셨던 것 같기도 하다.”

—혼자 작업하면서 가장 자주 해 먹는 음식은 뭔가.

“오이를 많이 먹는다. 그냥 먹는다. 아무 조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주로 먹어서 무, 오이, 토마토를 즐겨 먹는 편이다. 두부도 정말 자주 먹는다. 두부도 거의 생으로 먹는다. 요리할 기력이 없다.”

—앞으로 작품에 또 음식이 나올까.

“음식 얘기는 아무래도 계속하게 될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노년의 식탁’으로 또 그릴 것 같다. 아까 내가 잠깐 외출했는데 어떤 할머니가 옆 사람에게 ‘야 85살 되면 안 외로운 사람이 있는 줄 아냐’ 그렇게 꽥 소리를 지르는 거다. 그 장면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그냥 늘 외로운가보다.”

작품 목록-여자들의 매콤한 세계

<먹는 존재> 2013년 12월~2016년 4월 레진코믹스에 연재. 2014년 ‘오늘의 우리만화상’ 수상. 2015년 안영미 주연 웹드라마로 제작. 문학동네 출판.
사장에게 굴을 던져 백수가 되고, 마성의 추남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유양의 방황기.

<족하> 여성생활미디어 핀치에 연재. 위즈덤하우스 출판.
비혼주의자 고모의 조카 관찰기.

<홍녀> 2018년 1월∼2022년 3월 코미코에 연재.
수컷 생물을 재활용하는 초능력을 가진 중년 여성 이야기.

<나의 먹이> 2022년 3월 콜라주 펴냄.
들개이빨 작가의 에세이집.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뮤지션> 2023년 5월∼현재 카카오웹툰에 연재. 2023년 ‘올해의 양성평등문화상-신진여성문화인상’ 수상.
남자와 10년째 연애하던 만화가가 우연히 만난 여성 뮤지션에게 반하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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