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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담화는 북-일 관계 개선으로 이어질까

“랍치 문제”로 북-일 관계 파탄이라는 ‘패배’를 복기한 <북일 교섭 30년>
등록 2024-02-23 20:53 수정 2024-03-01 11:35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 부부장.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일본이 (중략) 관계 개선의 새 출로를 열어나갈 정치적 결단을 내린다면 두 나라가 얼마든지 새로운 미래를 함께 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2024년 2월15일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부장이 내놓은 담화가 심상치 않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견해임을 분명히 했지만,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평양 방문 가능성까지 열어둔 ‘전향적인’ 담화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전날 한국이 북한의 오랜 ‘형제국’ 쿠바와 수교를 발표한 데 따른 견제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기시다 총리의 노림수라고 보기도 한다. 보수 진영에선 한·미·일 삼각공조가 어그러질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그 동기가 어떻건, 전문가들은 김여정 담화가 실제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으로 이어지리라 보지 않는다. 북한이 “핵, 미싸일 문제”와 더불어 거론하지 말라고 요구한 “랍치 문제” 때문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비판적 지식인’ 와다 하루키가 쓰고, 한-일 관계 전문가인 길윤형 <한겨레> 논설위원이 번역한 <북일 교섭 30년>은 바로 이 “랍치 문제”로 북-일 수교가 좌절된 과정을 아프게 보여준다.

어느 때보다 북-일 관계 정상화 가능성이 높았던 2002년, 김정일은 평양을 찾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그간 일부 사람이 제기해오던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며 일본 사회가 받은 충격은 상황을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이끌었다. 오랜 세월 한반도에 대해 ‘가해자’로서 죄의식을 가졌던 적잖은 일본인은 납치 문제로 인해 처음으로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게 됐고, 이는 거대한 민족주의적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그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당시 관방장관이던 아베 신조였다.

북일국교촉진국민협회 사무국장으로 22년간 활동해온 ‘당사자’이기도 한 와다는 때로 냉정히, 때로 격정적으로 북-일 관계의 파탄이라는 ‘패배’를 복기한다. 고이즈미가 김정일과 회담한 뒤 기자회견에서 납치 문제가 아닌 평양 방문의 성과부터 말해야 했다거나, 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억류된 일본인 생존자 5명을 일시 귀국시킨 조처를 “어리석은 방책”이라며 비판하는 대목은 ‘현실적 이상주의자’ 와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동북아 평화의 집’이라는 높은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타협은 어쩔 수 없고, 때로는 ‘정략적인’ 자세도 필요하다. 아마 와다의 생각은 이러할 것이다.


인상적인 점은 이런 와다의 면모가, 막상 한국과 관련해서는 그리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그는 문재인 정부가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연달아 성사시키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열어젖히려 노력한 과정을 무척 높게 평가한다. 반대로 아베 신조 총리는 이 새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고 오히려 훼방만 놓으려 한 반동적인 정치인으로 묘사된다.

‘현실적 이상주의’라는 와다의 기준에서 보자면, 문재인 정부 역시 아베가 어떻게든 이 흐름에 참여하게끔 설득하고 타협했어야 하지 않을까? 책에 잘 나와 있듯이, 일본은 한국과 북한 어느 쪽도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일본과 북한의 관계 역시 나라 대 나라의 문제, 정확히는 자국 안보뿐 아니라 동북아 평화 역시 심각하게 위협하는 나라의 문제로 여겨진다. 어쩌면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남북 문제가 ‘민족문제’인 동시에 ‘국제문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오로지 미국의 동의만 구하면 된다고 여겼던 데서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유찬근 대학원생

*역사책 달리기: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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