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으로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자기 이익에만 골몰하는 개인이 되면 안 된다는 건 잘 알겠다. 문제는 국민이다. 아무리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논의를 나눈들 시민사회는 어디까지나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다. 개인과 달리 시민과 국민을 구별하기 녹록지 않은 이유다. 요컨대 시민이란 ‘민족’이나 ‘국민’의 경계 안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이를 뛰어넘는 공공성을 추구해야만 하는, 퍽 모순적인 목표를 가진 존재인 셈이다.
일본사학회와 경향신문사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주최한 같은 이름의 강연을 엮은 ‘일본사 시민강좌’는 그 점에서 뜻깊게 다가온다. 같은 ‘시민강좌’라도 그 대상이 ‘일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냥 멀어질 수도, 가까워질 수도 없는 ‘난감한 이웃’ 일본에 대해 ‘한국’ 시민은 무엇을 알고 있어야 하며 또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여덟 명의 연구자는 일제의 한국 침탈사나 역사왜곡처럼 한국인이 좋아할 법한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일본의 역사를 쉽게, 그러나 자세하고 정교하게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일본에 대한 ‘관심’은 많지만 정작 ‘이해’는 부족하고, 그렇기에 불필요한 ‘오해’가 끊이지 않고 발생하기 때문이다.
가령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는 ‘천황’ 호칭을 살펴보자. 우리는 일본이 자국 군주를 천황이라 부르는 게 한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내려다보는 오만한 태도에서 비롯했다 여긴다. 하물며 중국 황제도 하늘의 아들인 ‘천자’를 자처했는데, 하늘의 황제라는 호칭이 괘씸하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일본 고중세사 연구자 김현경에 따르면 천황이란 호칭은 유사 이래 쭉 사용되지도, 처음부터 하늘의 황제라는 의미를 담지도 않았다. 4~5세기께까지만 해도 일본 군주는 중국 황제에겐 ‘왜왕’(倭王)을 자처했고, 내부적으로는 ‘대왕’으로 불렸다.
상황이 달라진 건 7세기에 접어들면서다. 자기네 군주를 중국 황제와 동급에 두려는 마음에서였는지 ‘천자’ 등의 호칭이 쓰이기 시작하더니, ‘왜황’(倭皇)과 같은 과도기적 호칭도 튀어나왔다. 677년께부터는 우리가 아는 천황 호칭이 등장하지만, 그 의미는 지금과 같지 않았다. 과거 일본에서 천황은 ‘스메라미코토’로 읽었는데, ‘스메라’는 신성하다 혹은 다스리다라는 뜻이며 ‘미코토’는 신 또는 귀인이란 뜻이다. 도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일컫는 ‘진인’(眞人)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그나마 일본 안에서조차 천황 호칭은 널리 쓰이지 않았다. 천황이 은퇴하고 기거하는 장소인 원(院)이 은퇴한 천황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됐다. 9~10세기 이후에는 중국풍의 시호를 바치지도 않았다. 중국풍 시호와 천황 호칭이 다시 등장한 건 근대에 접어든 1841년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나 조선은 ‘황’(皇)이니 ‘칙’(勅)이니 하는 말이 불경스럽다며 일본 쪽 국서를 거부했지만, 정작 일본에서도 이는 굉장히 낯선 말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천황이라는 호칭조차 그 내력을 따지고 들어가면 결코 간단하지 않다. 김현경을 비롯한 연구자들은 단순히 이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사료와 주장들을 검토하며 신중하고 정교하게 논리를 풀어간다. 사실에 기초한 열린 사고야말로 시민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라는 이야기로 읽힌다. 모처럼 일본에 비교적 온건한 역사 인식을 가진 총리가 취임한 지금, 한국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책이다.
유찬근 대학원생
* 유찬근의 역사책 달리기는 달리기가 취미인 대학원생의 역사책 리뷰.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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