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테니스를 쳤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용기를 내기 어려우니, 새로운 결심을 하려거든 몸을 움직여 머리를 비워야 한다. 덜 녹은 눈을 긁어낸 인조잔디 위에서 겨울 햇살 받으며 몇 시간 뛰고 나니 2023년의 묵은 긴장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고서 성당에 갔다가 엄청나게 졸고 말았지만.
어릴 때 아빠가 다니던 테니스장에 자주 놀러 갔다. 나뭇잎 밥상을 차리다가 공을 줍고, 심판석에 올라가거나 아저씨들이 나눠주는 고로쇠물을 마셨다. 그때 쥐어본 테니스 라켓은 너무나 무거웠지만 언젠가 나도 코트 안에 서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잊고 있던 열망을 깨워준 건 바로 김연경 선수였다. 2021년 도쿄올림픽에서 그가 이끌던 여자배구팀의 기막힌 승부에 감화했다. 그간 경험한 요가, 수영, 필라테스처럼 재활훈련에 가까운 운동 말고 승패가 분명한 스포츠에 도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쉽게 실력이 늘지 않는 운동이란 건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떤 날에는 수차례 반복한 기본자세도 잘되지 않아 크게 좌절했다. 꾸준히 연습해도 실력이 극적으로 늘진 않았다. 다만 그 시간 동안 나에 대한 이해가 늘었다. 서브를 처음 배우던 날, 너무 좋아서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른바 ‘트로피 자세’라고 하는 선수들의 멋진 서브 폼을 떠올리며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토스부터가 난관이었다. 공을 든 팔을 직선으로 뻗어 천천히 올려야 하는데 ‘우와, 나 서브한다’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들뜨면 무엇도 되지 않았다. 경기 중에는 공이 날아올 때마다 혼잣말로 “침착하게”를 속삭여야만 실수하지 않고 공을 칠 수 있었다.
난 내가 꽤 차분한 성격이라 믿고 있었다. 위기 상황을 마주할 때 침착해지고, 긴장감 속에서 순발력을 발휘하는 일이 많았으니까. 그런데 착각이었다. 테니스를 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성질이 급한지 깨닫는다. “공 보면 흥분하는 강아지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티 난다는 걸 알고서 무척 창피했다.
적은 힘으로 공을 멀리 보내려면 라켓면 정중앙에 공을 맞혀야 한다. 그러려면 몸을 측면으로 완전히 돌려 공을 끝까지 봐야 한다. 이때 ‘앞을 보려는 마음’이 나를 방해한다. 공을 치기도 전에 네트 너머로 날아갈 공의 궤적과 상대의 반응을 보고 싶어 마음이 급해지고 공을 흘겨보게 된다. 이 역시 일할 때 장점도 단점도 되던 내 성향과 닮았다. 목표를 이룬 모습을 떠올리면 추진력을 발휘하기에 좋다. 그러나 시선이 자꾸 몸을 앞질러가면 자세가 망가지고 공이 빗맞듯, 지금 해야 할 일의 디테일을 놓치기 쉽다.
내게 필요한 훈련은 눈앞의 공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필두로 한 ‘도파민 자극제’들이 우리의 인지 자원을 호시탐탐 노리는 세상에서, 테니스는 ‘도둑맞은 집중력’을 되찾도록 도와준다. 빠르게 흘러가는 게임이 명상적 효과를 준다는 게 신비롭다. 온갖 잡생각(해야 할 일, 잘하고 싶은 마음, 늘지 않는 실력과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체력 걱정, 복식 파트너에게 미안한 마음, 상대팀에 대한 두려움 등)이 사라지고 정말 집중한다고 느낄 때면 공의 움직임이 보인다. 슬로모션이 걸린 듯 ‘임팩트 타이밍’이 보인다.
올해는 예측 불가능한 구질로 날아오는 인생의 공들을 제대로 응시하며, 순간의 집중력을 놓지 않고 집요하고 끈질기게 공을 쫓는 태도로 살고 싶다. 매해 몸과 마음을 단련해서 테니스도 꾸준히 할 수 있길 바란다. 구력 몇십 년에 이르는, 최적화되고 우아한 동작으로 여유롭게 게임하는 어르신들처럼 말이다.
김주온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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