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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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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와 노력, 김사부의 숨겨진 낭만

성공한 시리즈물 <낭만닥터 김사부>, 낭만의 울타리 안에서 모난 돌들은 마음껏 실수하고 아파하며 성장한다
등록 2023-06-09 16:23 수정 2023-06-12 11:51
‘낭만닥터’ 김사부(한석규). SBS 제공

‘낭만닥터’ 김사부(한석규). SBS 제공

지역 소도시에 있는 허름한 돌담병원에 ‘트리플 보드’(일반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전문의)를 소유한 은둔 고수가 있다고 한다. 그는 평소 허허실실 힘을 빼고 살지만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의사로서의 사명과 열정은 누구보다 충만하며, 항상 따뜻하고 인자한 미소를 보이지만 후배 의사들에게 독설과 호통을 날릴 때는 매섭다. 본명은 부용주이지만, 누가 “당신, 정체가 도대체 뭡니까?”라고 물으면 의사 가운에 새겨진 이름을 보여주며 “나? 닥터 김.사.부!”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 <낭만닥터 김사부> 속 김사부(한석규)는 그렇게 이상하고 낯선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시즌1(2016년)과 시즌2(2020년)를 거쳐 2023년 시즌3에 이르기까지 7년에 걸쳐 특유의 ‘낭만 세계관’을 바탕으로 돌담병원을 지키고 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은 왜 하필 ‘낭만닥터’일까? 7년 동안 총 세 개의 시즌이 방영될 정도로 성공한 시리즈물을 간단하게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몇 개의 단어를 통해 생각해보려 한다.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당연히) ‘낭만’일 것이다. 김사부는 틈만 나면 상대가 감동할 명언을 날리고 멋쩍은 듯 웃으며 말한다. “그것을 전문용어로 개멋 부린다고 그러지. 조금 더 고급진 용어로는 낭만이라고 하고.” 대체 그 낭만이 무엇이기에 ‘닥터 김사부’를 수식할까? 낭만이란 본디 현실에 없거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이상적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김사부가, 아니 이 드라마가 보여주려는 이상적 가치란 무엇일까? 낭만을 이해하려면 우선 ‘꼰대’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

시즌3에 특별 출연한 강동주(유연석). 시즌1에서 김사부의 제자였다. SBS 제공

시즌3에 특별 출연한 강동주(유연석). 시즌1에서 김사부의 제자였다. SBS 제공

김사부와 대립하는 차진만(이경영). SBS 제공

김사부와 대립하는 차진만(이경영). SBS 제공

왜 차진만은 사부가 되지 못했을까

이 드라마에서 낭만 못지않게 중요한 단어는 ‘꼰대’다. 시즌1의 강동주(유연석)도, 시즌2와 시즌3의 서우진(안효섭)과 장동화(이신영)도 초반에는 김사부의 말에 꼰대라고 반박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정말 김사부는 ‘낭만닥터’가 아니라 ‘꼰대닥터’일까?

한국 사회 구성원, 특히 젊은 연령대 기준으로 보면 김사부는 꼰대에 가깝다. 김사부도 그 사실을 애써 부인하지 않는다. 대신 정확하게 자기 입장을 전달할 뿐이다. “선생님은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꼰대질하는 건 다른 교수님들이랑 똑같”다는 장동화의 말에 김사부는 이렇게 일갈한다. “노력도 안 하는 주제에 세상 불공평하다고 떠드는 새끼들, 실력도 하나 없으면서 의사 가운 하나 걸쳐 입었다고 잘난 체하는 새끼들, 제 할 일도 제대로 안 하면서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새끼들 아주 그냥 대놓고 조지는 게 내 전공이거든.”

김사부의 이런 말은 후배 세대, 즉 젊은이를 향한 기성세대의 부정적 시선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시선은 김사부의 라이벌이자 외상센터장으로 부임한 차진만(이경영)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솔직히 난 너희 세대를 정말 이해 못하겠어. 뜨악할 정도로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해대는 녀석들이 책임질 때는 왜 그리 쉽게 무너지는 건지. 멘탈은 약해빠져가지고 뭐가 그렇게 까다롭고 요구사항들은 많은지. 노력도 안 하면서 성과는 바라고. 열심히도 안 하면서 뭐만 좀 시키면 힘들다고 아우성이고. 그래가지고 대체 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이 두 사람의 말만 놓고 본다면 <낭만닥터 김사부>는 꼰대적인 면이 많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게다가 김사부는 브이아이피(VIP) 환자에게 순서가 밀려 수술할 때를 놓쳐 아버지를 잃은 분노로 가득한 강동주와, 차진만의 폭언에 자살한 친구를 대신해 그에게 복수하려던 이선웅(이홍내)에게 “실력을 키워 더 나은 인간이 돼라”는 충고를 한다. 이는 자칫하면 ‘실력주의’의 늪에 빠질 수도 있는 가치관이다.

그러고 보면 김사부의 꼰대질이 통할 수 있는 이유도 그가 ‘트리플 보드’ 소유자로서 전설적인 실력을 갖춘 의사이기 때문 아닐까? 물론 그런 한계도 있지만 실력 면에서는 차진만도 김사부에 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왜 차진만은 ‘사부’가 되지 못하고 쓸쓸하게 퇴장해야 했을까?

환자를 돌보는 ‘돌담저스’ 의료진. (왼쪽 위부터)수간호사 오명심(진경), 병원장이자 GS(일반외과) 전문의 박민국(김주헌), 김사부(한석규). SBS 제공

환자를 돌보는 ‘돌담저스’ 의료진. (왼쪽 위부터)수간호사 오명심(진경), 병원장이자 GS(일반외과) 전문의 박민국(김주헌), 김사부(한석규). SBS 제공

‘모난 돌 프로젝트’를 아시나요?

김사부는 조금 다른 길을 걷는다. ‘너희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토로하는 차진만에게 서우진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는 게 달라졌고 무엇보다 살아가는 세상이 다릅니다. 가능성의 시대가 아니라 버텨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으니까요, 지금의 청춘들은. 사부님도 가끔은 터프하실 때가 있습니다. 어쩔 땐 욕도 하시고 마음에 안 드시면 소리도 지르시고요. 근데 어떤 상황에서도 저를 포기한 적이 없으셨어요. 어떤 상황에서도 제 편이 되어주셨고요. 저뿐만이 아니라 돌담에 있는 어느 누구한테나 마찬가지셨습니다.”

즉, ‘꼰대’와 ‘사부’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꼰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 들지 않고 자기 기준에 맞춰 평가하며 질타할 때, (김)사부는 “버텨야 하는” 후배 세대를 포기하지 않고 같은 편이 돼주고 그들을 책임진다는 것. 이런 분류가 타당할지 모르나 굳이 해보자면 김사부는 ‘좋은 꼰대’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좋은 꼰대 기준은 저마다 다르겠으나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조언이라도 기성세대의 말은 무조건 꼰대질로 보아 거부하고, 그런 분위기 속에 자신은 꼰대가 되기 싫어 필요한 말도 하지 않고 마땅히 져야 할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기성세대가 많아진 사회에서 이 드라마는 김사부를 통해 좋은 꼰대의 표본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를 이해하는 또 하나 중요한 단어는 ‘모난 돌’이다. 사실 김사부의 또 다른 정체성은 ‘모난 돌 컬렉터’다. 시즌1에서는 한석규와 주먹질까지 하는 ‘원조 모난 돌’ 강동주와 연인의 죽음으로 심각한 트라우마를 가진 윤서정(서현진), 시즌2에서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 의사가 됐지만 선배의 대리수술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왕따가 된 서우진과 수술 울렁증이 있는 차은재(이성경)와 장동화 등 거칠고 뾰족하고 상처 난 모난 돌들을 모아 누구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편이 되어 다듬고 성장시킨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의미하듯 모난 돌이란 부정적으로 쓰일 때가 많은데, 김사부는 다른 의미로 모난 돌을 해석한다. “모가 났다는 것은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는” 것이므로 “세상이랑 부딪치면서 자기 모양 찾아가는 걸 좋아”한다고. 김사부에게 모난 돌이란 정을 맞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다듬어져 자기 모양을 찾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시즌2에 이어 시즌3에도 출연한 제자 서우진(안효섭)을 살리려는 김사부의 모습. SBS 제공

시즌2에 이어 시즌3에도 출연한 제자 서우진(안효섭)을 살리려는 김사부의 모습. SBS 제공

서로의 모난 면을 다듬으며 성장

모난 돌은 또 다른 모난 돌을 다듬는 존재로 성장하기도 한다. 시즌3에서 갈등을 유발하는 인물, 장동화와 시즌2를 거쳐 눈부시게 성장한 서우진의 관계가 그렇다. 장동화는 선배인 서우진뿐 아니라 상사인 김사부에게도 공평하게 대드는 인물로 환자가 들어와도 ‘칼퇴’를 감행하고, 위급한 상황에도 몰래 게임을 하고, 의사로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지 못해 ‘장금쪽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서우진과 김사부를 통해 서서히 변화한다. 그런 장동화를 통해 서우진도 누군가의 ‘선배’로서 성장한다.

이 드라마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네 번째 단어는 ‘성장’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모난 돌을 젊은 의사들로 상상했지만, 모난 면이 꼭 젊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김사부라도, 실력과 권력을 가진 차진만이라도 모난 면은 있기 마련. 시즌1과 시즌2가 거대 병원의 원장이었다가 이사장으로 성장(?)한 도윤완(최진호)이라는 ‘악의 축’을 통해 생명을 살리는 의사로서의 사명을 바탕으로 선한 가치를 추구하는 돌담병원의 존재 의미를 부각했다면, 시즌3은 그보다 조금 더 현실적이고 복잡한 주제를 다룬다. 의사로서의 권위와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차진만과 생명을 향한 사명감과 희생을 중요하게 여기는 김사부를 대립하게 한 것. 이 대립 과정을 통해 김사부는 사명을 좇느라 의사가 소진되고 가족을 소홀히 해서 해체 위기에 빠졌다는 걸 간과했음을 깨닫는다. 또한 차진만은 의사의 권위와 명예를 앞세우느라 제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의사 ‘선생’이 아닌 의사 ‘사장’의 길을 걷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서로의 모난 면을 다듬게 된 것이다.

‘성장캐’는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맡는 중요한 캐릭터다. 처음에는 다소 모자라거나 비뚤어졌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성장하는 인물을 통해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을 발견한다. <낭만닥터 김사부>의 미덕은 젊은 의사뿐 아니라 ‘사부’로 불릴 법한 기성세대까지 모든 인물이 다듬어져 “자기 모양 찾아가는” 과정을 잘 담아낸 성장 서사라는 데 있다.

<낭만닥터 김사부 3> 포스터. SBS 제공

<낭만닥터 김사부 3> 포스터. SBS 제공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기다리고 가르치는

결국 <낭만닥터 김사부>가 말하는 낭만이란, 일차적으로는 자본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병원의 공적 역할과 환자를 대하는 의료인의 소명에 관한 것이겠으나 다른 의미의 낭만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고 기다리고 가르치는 인내와 노력을 말하는 김사부의 낭만은 성장이 ‘실력만능주의’로 대체되고, ‘성장캐’를 기다리기보다 가성비 높은 완성형 인간을 원하고, 작은 실수도 ‘민폐’로 취급하는 이해와 존중, 관용의 폭이 지극히 협소해진 사회에서 느긋하고 안전한 울타리 같은 역할을 한다. 그 울타리 안에서 모난 돌들은 마음껏 실수하고 아파하며 성장할 것이다. 어쩌면 성장을 기다리는 일이란, 이제는 현실 너머의 이상, 즉 낭만이 돼버린 것은 아닐까? 드라마는 끝나도 어디선가 ‘낭만닥터’ 같은 이들이 계속 존재해주길 바랄 뿐이다.

오수경 자유기고가·<드라마의 말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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