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아버지는 말이 없었습니다. ‘생활 한국어(!)’ 외에는 당최 말이 없었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했을 때에나 뭐라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담장 밖 이야기를 했습니다. 6남매였지만 집은 항상 절집처럼 고요했습니다. 그렇게 자라서인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아버지의 말’이 몇 안 됩니다. 이를테면, “니 코가 왼쪽으로 삐뚤어졌다.”
아버지가 ‘저를 보고’ ‘저에 대해서’ 한 최초의 발언입니다. 목수였던 아버지는 일 마치고 돌아오면 작은 백열등을 켜고 돋보기를 쓰고 톱 손질을 했습니다. 저는 줄로 톱날을 가는 소리가 좋아 곁에서 새우잠이 들곤 했습니다. 문득 스르륵스르륵 소리가 안 들려 눈을 떴더니, 아버지가 얼굴을 디밀어 심각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그때 저 말씀을 하시더군요. “니 코가 왼쪽으로 삐뚤어졌다.” 아홉 살 아이는 그 말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제가 이 무심한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하는 건 ‘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아들 관찰’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상관없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았다’는 걸로 족했죠. 그날부터 아버지의 무심함 뒷면에 속 깊은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는 ‘아름다운 착각’을 하게 되더군요. 저 기억의 힘 때문인지 비록 제 코는 여전히 삐뚤지만, 아주 삐뚤게 살지는 않게 됐습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냐고요? 아버지 자랑하려고요! 하하. 아닙니다. ‘시간’과 ‘기억’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저는 위의 이야기를 이렇게 줄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고 있는 내 얼굴을 보고 코가 왼쪽으로 삐뚤어졌다고 말했다.’ 만약 저 에피소드로 공책 석 장 분량으로 쓰라고 하면 그 또한 쓸 수 있을 듯합니다.
선진적인 운동 지도 방법 중에 ‘제약 주도 접근법’이란 게 있더군요. 선수들이 같은 동작을 수없이 반복해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라, 시시때때로 바뀌는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감각과 능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이죠. 축구를 예로 든다면, 경기장 크기와 모양을 바꾸거나 선수 숫자를 바꿔 변화된 조건 속에서 선수 스스로 해법을 찾아나가도록 연습하는 방식입니다. 경기장 크기를 반으로 줄이기도 하고, 경기장에 동그라미를 그려 원 안에서만 경기를 하게 합니다. 11명씩 하는 경기를 3대 3, 4대 4 또는 3대 5 등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약을 주면 선수가 기존에 습관적으로 하던 움직임이 달라지게 됩니다. 공을 다룰 기회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촘촘한 거리에서 상대 선수를 제칠지 동료 선수에게 패스할지 직접 슛을 할지 빨리 판단해야 합니다. 공의 속도도 달라지고 공을 다루는 기술도 섬세해집니다. 원 안에서 공을 주고받는 것도 생소할 것입니다.
글쓰기에도 이런 제약 주도 접근법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저의 경우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자, 글 쓰러 왔으니 글을 써봅시다” 하고는 칠판에 ‘눈뜨고 10분간’이라고 씁니다. 아침에 눈뜨고 10분 동안 뭘 했는지 써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조건을 답니다. 글 쓰는 시간은 10분, 분량은 공책 1쪽 꽉 채우기. 10분 동안 공책 한 쪽을 채우려면 꽤 빨리 써야 할 거라 겁을 줍니다. 학생들은 집중해서 씁니다. ‘눈뜨자마자 머리맡에 있는 휴대전화 메시지를 읽고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볼일 보고 세수하고 옷 입고… 어쩌고저쩌고.’ 일부러 알람 장치가 있는 시계를 갖고 가서 교탁 위에 올려놓습니다. “띠디디띠디디” 소리가 나면 무조건 멈춰야 합니다. 그러곤 다 함께 자신이 쓴 글을 소리 내어 끝까지 읽으라고 합니다. 꿍얼꿍얼 시끌시끌 읽습니다.
지금부터가 진짜입니다. 칠판을 지웁니다. 다시 씁니다. ‘눈뜨고 1분간’. 조건은 같습니다. 글 쓰는 시간 10분, 분량은 공책 1쪽 꽉 채우기! 학생들은 기가 막혀 합니다. 눈뜨고 10분 동안도 한 일이 별로 없어 쓰기 어려웠는데(10분이면 비몽사몽 계속 침대에 누워 있었을 테니까요), 1분간이라니. 황당해하는 학생들의 눈빛을 모른 체하고 ‘시작!’을 외칩니다.
이때부터 학생들은 기억을 떠올리는 습관적인 패턴에서 벗어납니다. 기억을 떠올리는 습관적 패턴은 사건(했던 일)만 줄줄이 나열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약이 주어지니 ‘했던 일’만 쓸 수 없습니다. 했던 일만 쓰다가는 반 줄도 다 못 채울 테니까요. ‘그때 한 일이 뭐였지?’라는 생각에서 그 상황을 총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1분 동안의 일을 1쪽 분량으로 쓰라는 제약이 주어진 다음에야, 이불 밖으로 삐져나간 발가락, 읽다가 잠들어 구겨져버린 책, 베개와 이불에서 풍겨나오는 냄새, 전신주에 앉아 지저귀는 참새들, 거실에서 들리는 엄마 아빠의 말소리,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잡념 같은 게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1분 동안 나의 내부와 주변에선 엄청나게 많은 움직임과 고요와 동요가 뒤엉켜 있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성석제의 소설 <내 인생의 마지막 4.5초>는 도로 난간에서 추락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4.5초를 30여 쪽 분량으로 늘려놨더군요).
무도의 달인들은 시간을 다르게 쓴다는 느낌을 줍니다. 시간을 조금씩 늘린다고나 할까요? 저의 스승님은 이걸 능수능란하게 합니다. 합기도(아이키도)가 좋은 점은 고단자와 초급자도 선을 긋지 않고 함께 수련한다는 것입니다. 초보인 저도 고단자들과 수시로 응대하면서 서로 던지고 던져집니다. 그때마다 제 스승님의 시간과 나의 시간이 다르다는 느낌을 강하게 갖습니다. 그분은 매 순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매 순간을 완벽함으로 채웁니다. 지금 현재의 움직임 안에 앞선 동작의 동력이 빠짐없이 담기고, 이후에 이어지는 동작도 예비돼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시간이 여전히 그림자로 남아 있고 미래의 시간마저 당겨 쓴다는 느낌? 반면 초보자는 끝(목표)에만 신경 씁니다. 상대를 던졌는가, 못 던졌는가? 던지면 성공, 못 던지면 실패. 시작한 지 5년밖에 안 된 저도 오직 마지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과정을 생략해버립니다. 그래서 저의 시간의 길이와 스승의 시간의 길이가 다릅니다. 초보자는 시작과 끝이라는 두 지점밖에는 없지만, 달인은 시작과 끝 사이의 모든 과정이 ‘점점점, 선선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 마디에 4분음표가 4개 들어 있는 곡과 32분음표가 32개 들어 있는 곡의 차이랄까요. 4분음표 곡은 초심자도 어찌어찌 연주하겠지만 32분음표 곡은 포기하고 말 겁니다. 능숙한 연주자는 두 곡 모두 거뜬히 연주합니다. 여기서 ‘능숙하다’는 말은 32개의 음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소리를 낸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다는 겁니다. 32개의 음 중에서 ‘허투루’ 건너뛰는 게 없습니다.
‘무적의 글쓰기’는 시간을 허투루 건너뛰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든 과거를 낱낱이 떠올리기 위해 최면술이라도 써야 할까요? 아닙니다. 일단 기억나는 대로 쓰기 시작하면 됩니다. 물론 기억나는 대로 쓴다고 다 그럴듯한 글이 되는 건 아닙니다. 어떤 일에 대한 기억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글감 자체보다는 그 구체적 기억에 담긴 보편적 진실이 있다면 독자는 공감하게 될 겁니다.
무도의 초보자가 할 일은 엉성하고 불완전한 동작이더라도 계속 도장에 얼굴을 디밀어 구르고 던져져야 하듯, 글쓰기의 도약은 반복에서 옵니다. 기억도 한순간에 짠 하고 모든 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어떤 놀이를 하면서 놀았나요? 반찬가게처럼 한 번에 여러 개가 동시에 떠오르나요? 단 하나의 놀이가 떠오르기만 하면 됩니다. ‘자치기’가 떠오르기만 했다면(아, 너무 구식인가요?), 그다음에 다른 놀이가 줄줄이 떠오릅니다. 구슬치기, 홀짝, 다방구, 말뚝박기, 오징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공기놀이, 윳놀이, 화투(이건 아닌가?). 요즘에는 퍼즐, 블록, 보드게임 등등등.
기억이 뜨문뜨문 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기억과 기억 사이, 사건과 사건 사이를 어떻게 절묘하게 이어 붙이느냐, 그 사이사이를 어떤 의미들로 채우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시간을 늘리는 일은 기억의 가짓수를 늘리는 게 아닙니다. 하나의 기억일지라도 그 기억의 두께를 두껍게 한다는 뜻입니다. 각각의 기억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입체적으로 설명해 기억에 질감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놀이를 예로 들면, 놀이 자체만이 아니라 함께 놀았던 아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 탄식, 약오름, 즐거움 따위의 감정과 의미를 함께 떠올리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의 기억에 대한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는 글을 쓰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을 줄이는 데 익숙합니다. 기억을 요약하는 것이죠. 시간을 늘리는 게 어렵습니다. 더 많은 걸 떠올려야 하니까요. 기억나는 만큼만 쓰지 않고 기억 너머를 더듬어 복원하는 일이니 어찌 쉽사리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 제약을 주고 의식적으로 그런 방식의 글쓰기를 거듭해야 조금씩 익힐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태도와 해석과 연결되는 ‘시점(視點)’에 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독자 글>
지난번 글감은 ‘나를 소개하는 글’이었습니다. 열한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일곱 분은 전속 필진이십니다(도희, 지은, 숙연, 혜욱, 선옥, 정미, 정선님). 희정, 미희, 제시카, 한뼘책빵님은 새 필진입니다(독자 필진과 따로 밥이라도 먹어야겠어요).
이번에는 조건을 달았었는데요, 1천 자 분량을 지켜보시라고. 네 분만 900~1100자 사이에서 썼고, 다른 분은 분량을 훌쩍 넘기거나 모자라게 썼더군요. 분량을 지정하는 건 그 틀 안에서 자기 글을 다듬어보라는 뜻이니 되도록 지키려 애쓰시길 바랍니다. 초고를 썼는데 분량을 많이 초과했다면, 좋은 기회입니다. 늘리는 것보다 줄일 때 글쓰기 실력이 늘더군요. 군더더기 표현을 다듬을 수 있고, 쓸모없는 문장은 날려버리는 쾌감(아픔?)을 맛볼 수 있으니까요. 글 다듬기는 대부분 지우기입니다.
나를 소개하는 글을 통해 자신을 소개하는 여러 ‘방식’을 엿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다양하더군요. 자신의 일대기를 쓰기도 하고, 일이나 건강 등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 자신과 연결된 물건(모니터, 쪽지), 책이나 여행 등의 관심사 또는 취미, 자신의 모습, 자신을 알리는 개념이나 호칭, 별명(생활수련인, 기린) 등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양합니다.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알릴지, 또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나의 독특함을 알릴지 계속 생각해보면 좋겠어요.
한마디만 보탠다면, 모든 글은 길이나 주제와 상관없이 하나의 완결된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할 말을 남김없이 담았는지, 덜 담지는 않았는지, 글의 일관성을 떨어뜨리는 요소가 덧붙어 있지는 않은지를 검토해야 합니다. 하나의 글 속에 가급적 하나의 이야기만 담으려 애써보세요. 나의 모든 걸 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결된 글을 쓰려면 ‘작고 구체적인 것’을 쓰려고 해야 합니다. 글에는 내가 갖고 있는 수많은 진실 중 ‘딱 하나’의 진실만 담기면 충분합니다. 다른 진실은 다른 글로 또 쓰면 되니까요.
<여러분의 글을 보내주세요>
다음 글감으로 글을 보내주기 바랍니다. 이른바 감상문입니다. 무엇인가를 보고 거기에서 얻은 감흥을 글로 쓰는 것인데, 어떤 종류든 좋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내 글을 통해 아직 그 작품을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 그 작품을 보고 싶게 만들지를 고민하면서 써보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도 분량을 지켜주세요.
주제: 감상문(내가 본 책, 영화, 드라마, 그림, 사진, 또는 내가 들은 음악 등)
분량: 1000자 정도
마감: 2023년 4월23일 자정
보낼 곳: ha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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