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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 톡톡 튄다, 따뜻하다…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윤성호

[22WRITERS]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의 윤성호 작가 인터뷰
세 개의 열쇳말: 함께 쓰기·아이러니·탈혐오
등록 2023-03-14 07:47 수정 2023-03-15 00:11
윤성호 작가 겸 감독이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포즈를 취했다.

윤성호 작가 겸 감독이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포즈를 취했다.

독립영화를 챙겨보지 않더라도 ‘윤성호’의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듯하다. 2021년 공개된 12부작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이하 <이상청>)가 초창기 웨이브 신규 유료 가입자 수를 끌어올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정치를 소재로 한 블랙코미디 <이상청>은 같은 해 <씨네21> 선정 ‘올해의 시리즈(한국)’ 1위에 꼽혔고 제58회 백상예술대상 4개 부문(작품상, 감독상, 극본상,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어딘가 삐딱해 보이지만 재기발랄함을 잃지 않고, 보는 이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현실을 능수능란하게 풍자하는 능력, 딱히 도덕적이거나 교조적이지 않은데 다른 작품에서 잘 비추지 않던 이들의 이야기를 끄집어오는 기술,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식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유머와 반전. 윤성호 감독 작품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감독’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그는 자신이 연출한 작품 대부분을 따로 또 함께 쓴 작가다. 작품을 거듭하며 스스로도 ‘스토리텔러’, 즉 ‘이야기꾼’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정체화했다. 최근에는 여러 작가와 세 개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신인 작가들과 함께할 땐 몇 발짝 앞서가는 ‘척후병’이자 이들의 능력을 한데 모아 다듬는 ‘에디터’로서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수십 편의 작품을 만들어내면서 ‘스토리텔러’ 윤성호의 색깔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2월24일 윤성호를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만났다. 그를 설명하는 세 가지 키워드(함께 쓰기, 아이러니, 혐오와 거리두기)를 소개한다.

영화 <은하해방전선>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은하해방전선> 스틸컷. 인디스토리 제공

1. 함께 쓰기-크리에이터 송편

윤성호는 함께 쓴다. 정확히는 2012년 MBC에브리원에서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를 9부작으로 제작하면서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혼자 밤에 글 쓰는 것”이란 윤성호에게 공동창작은 더 많이, 더 오래 쓰기 위한 방편이다. “사실 <은하해방전선>을 찍기 전까진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없어요. 약간의 계획, 메모, 충동적인 카메라워킹 이런 거로 뚝딱뚝딱 만들었어요. 요새 리얼리티 예능처럼 찍었어요. <은하해방전선>도 사실 이전에 했던 것들, 장면들을 하나의 서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찢어 붙이기’ 한 거예요.”

하지만 매번 뚝딱거리며 단편만 찍을 순 없었다. 긴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시나리오가 좋았던 작가들에게 연락해서 “대본 한번 같이 써보실래요” 물었다. “겁나서 몇 분씩 끌어들이면서 처음 공동 작가 시스템을 만든 거죠.” 이렇게 일하다보니 “요즘엔 작가라는 정체성이 더 강해졌다”. 언제부턴가 동료를 생각하면 작가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삐뚤빼뚤해도 맛깔나는 영리함

그가 함께하는 공동창작 ‘크루’는 ‘시트콤협동조합’이란 이름에서 ‘크리에이터 송편’으로 바꿔 지속되고 있다. 시트콤협동조합 이름으로 민주노총이 제작 지원한 5부작 단편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를 만들고나니, 무언가 ‘운동’을 하는 곳인 줄 알고 자꾸만 연락이 왔단다. 마땅히 줄여 부르기도 어려운 이름이었다. 고민 끝에 ‘송편’으로 바꿨다. 함께 작업해온 아내 송현주 작가·감독의 별명이 송편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다 함께 극본을 만들어내는 공정이 ‘송편을 빚는 일’과 꼭 들어맞기도 했기 때문이다.

“송편 속에 뭘 넣을지를 함께 얘기하고 각자 송편을 빚는 거예요. 각자 개성에 따라 좀 삐뚤빼뚤 빚을 수도 있지만 점차 서로 실력도 비슷해질 거고 먹는 사람도 크게 불만족스럽지 않을 거예요. 또 1년 내내 원고를 붙들고 있기보다는 짧은 기간에 만들어내는 걸 추구하거든요. 추석 연휴라는 한정된 기간에 송편을 빠르게 만들어 풍성하게 해먹는 것처럼요.”

그가 지향하는 크리에이터 송편의 색깔은 이렇다. “재밌고 개성 있어, 그러면서도 혐오적인 요소를 잘 걷어내, 정치적으로 올바르면서도 절대 계몽적이지 않아, 맛깔나는 개그를 잘하고 따뜻한 결말이 있어, 이런 점이 송편의 표준값이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공동창작의 또 다른 장점은 자신이 굳이 ‘선봉장’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면서도 각자 장점을 살리며 조율할 수 있다는 거다. “대안적인 얘기를 빨리 생산하자, 윤성호라는 이름에 연연하지 말자 싶었어요. 윤성호라는 이름에 지레 선입견을 가지는 이도 있을 거고요. 또 여성 서사를 쓰는데 중년 남성이 끼면 ‘쉰내 난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 저와 함께하는 크리에이티브한 멤버들은 대부분 여성인데 제가 꼭 선봉장이 될 필요는 없어요. 이타적이어서가 아니에요. 저도 이해타산이 빠른데 오래가고 싶고, 이쪽 여성에 할 얘기가 많아서 그렇죠.” 송편 멤버가 늘 고정적인 건 아니다. 그는 “제가 함께하고 싶은 창작, 동료의 기운을 뭉뚱그리는 호명 정도로 생각해달라”고 덧붙였다.

윤성호 감독이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포즈를 취했다.

윤성호 감독이 한겨레신문사 사옥에서 포즈를 취했다.

대기업 직원 ㄱ: 남미랜다, 또 남미랜다 진짜. 사장님 인종차별 국적차별 진짜 별거 다 하시네, 오늘외주회사 직원 ㄴ: 하 참나, 이러다 남미 된다는 말 누가 처음에 썼는데 (중략) 사람들이 남미 가는 건 좋아하면서 남미 되는 건 또 싫어하거든 ㄱ: 그게 아이러니거든ㄴ: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줘야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아예 싸울 생각을 안 먹도록.<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 번외편 -‘두근두근 외주용역' 중
2. 아이러니

“만약 타락하고 몰락한 목사가 있어요. 이 목사가 법정에서 스스로를 변호해야 할 일이 생긴 거예요. 근데 그게 참회하는, 진짜 멋진 설교가 되는 거예요. 재밌는 아이러니죠.” 그는 인터뷰 도중에도 몇 번이고 ‘아이러니’란 말을 반복했다. 언제부턴가 자신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아이러니로 정리했다고 했다.

‘모순’이란 한자어만으로는 어감을 정확히 전달하기 어렵다. 그가 말하는 아이러니는 “예상과는 다른, 기대했던 것과 다른” 면을 말한다. “이럴 거라고 예단했는데 사실관계가 다르다거나 전망과는 반대되는 다른 일이 발생하거나 하는 일을 ‘아이러니하다’고 해요. 아이러니란 키워드를 붙들고 있는 건, 이야기 속에서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튀어나왔을 때 웃음이 터져나오는 것이 “모두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해서다.

“이야기꾼은 무엇을 위해 봉사하고 어떤 가치에 복무해야 하는 걸까? 정말 솔직하게, 우린 뭐에 복무하지? 라고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결국 재미를 위해, 재밌으려고 하는 거예요. 특정한 가치를 위해 지사적으로 이야기하려면 사회운동을 하거나 기자가 됐겠죠. 예를 들어 ‘아동 혐오는 나쁘다’라고 얘기하는 게 아니라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재미를 주는 이야기를 하면서 비슷한 감각을 공유하고 우리 삶이 좀더 풍성하고 입체적이 되기 바랄 뿐인 거죠.”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스틸컷, 웨이브 제공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스틸컷, 웨이브 제공

비틀어서 공감하는 재미

물론 ‘재미’를 정의하거나 풀어내는 방식은 각자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절대적인 답이 없다고 퉁치기만 할 순 없었어요. 적어도 저한테는 기준이 하나 있어야겠는 거예요. 대본이 잘 안 풀릴 때마다 (그걸 풀어주는) 열쇠가 필요하잖아요. 이건 (창작하는) 각자가 말을 개발해야 하는 것 같아요. 누군가에겐 ‘엣지’와 같은 단어일 수도 있고요.”

그래서 그는 대본을 쓰다가, 회의하다가 “도무지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쓰고 있는지 모를 때”면 자문한다. “충분히 아이러니한가?” 이렇게 말이다. 함께 극본 작업을 하는 현장에서 숙의하고 창의적인 지점을 뽑아내야 할 때 아이러니는 만병통치약 같은 해결책이 돼주기도 한다. “사람들이 ‘혐관’(혐오하는 관계) 서사를 ‘맛집’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등장인물이 서로 혐오하다가 결국에는 친해지니까 더 재밌는 거죠. 그래서 이야기를 만들 때도 자꾸 물어요. 예를 들어 주인공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이야기가 있다, 그럼 부산에서 내릴 때 어떻게 해야 또는 어떤 풍경을 마주해야 제일 아이러니하겠냐고.”

“정은씨 하는 짓거리 보면 완전 한남인데 한남! 완전 지가 한남이면서 뭐가 이렇게 잘났어!”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중

3. 혐오와 거리두기

윤성호 감독 작품의 강점은 혐오적인 시선을 영리하게 덜어내면서도 동시에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살아온 환경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다. 그는 2022년 평창국제평화영화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출출한 여자>(2013년)부터 제가 만든 걸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 여성들 얘기를 한 다음부터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느낌? (…) <출출한 여자>부터 시작된,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캐릭터엔 애정이 가요. 그럼 그걸 남자로 해도 되는데 왜 여자로 하느냐 (…) 남성들과 교류가 없는 건 아닌데,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다 여자였던 것 같아요.” (인터뷰집 <두근두근 윤성호> 중)

그럼에도 창작자가 혐오적인 요소에 늘 예민하게 촉수를 세워두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윤성호만의 원칙이 따로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두 가지 면에서 주의하고 있다”고 답했다. 하나는 “혐오의 언어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이유로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를 진공 또는 무균의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건 잘못됐다”고도 생각한다.

“멸균 상태의 대본을 쓰기 위해, 예를 들어 욕을 안 먹으려고 남자주인공을 무해한 존재, 칭찬받을 말만 하는 존재로 만드는 건 재미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치사하고 비겁하지 않겠어요. 예를 들어 현실에서는 누가 매력이 없더라도 어떤 가치를 위해 지지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픽션은 재밌어야 해요. 어떤 한계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바뀌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넘어서기도 하고 어떤 갈림길에서 선택하는 순간이 긴장감 있게 보이고 그 과정이 우습거나 슬프거나 하면 재밌잖아요.”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영화 <도약선생> 스틸컷, 영화사 조제 제공

영화 <도약선생> 스틸컷, 영화사 조제 제공

긍정하진 않으나 인정할 수 있는

“다시 말하면, 현실에서 혐오의 어휘에 동조한다거나 그 맥락에서 우리가 만든 드라마가 혐오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하지 않도록 애써요. 우리가 그런 정서를 10년, 20년씩 빨리 업데이트할 순 없어도 2년이라도 먼저 쫓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를 멸균이나 무균의 상태로 만드는 건 진짜 창작의 태도는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지지하는 사람들이 ‘무오류’가 아니고 한계와 결핍이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긍정하지는 말되 인정하고 포함하고 가자고 하죠. 우리는 그 아이러니들을 보려고 하는 거죠. 예를 들어 여성 서사를 끌고온 <이상청>의 이정은 장관도 속을 보니 ‘참 구렁이 같네? 아이러니하네?’ 이런 게 저는 중요해요.”

원칙은 뚜렷하지만 적용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창작 과정에서 늘 조심스럽게 저울질한다.

“(어떤 작품은) 남자들이 못나고 못되게 구는 걸 확대 재생산했을 뿐이란 생각이 드는 것도 있고 반대로 저게 정말 좋은 다양성의 서사냐, 단지 욕을 안 먹는 캐릭터들을 배치한 것뿐이란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어요. 제 것도 그럴 수 있어서 항상 조심조심해요. 지금 쓰는 드라마도 (인물이) 다 한계도, 핸디캡도, 문제도 있고 악한 면도 있는데 그러면서 성장도 해요. 성장에도 한계가 있고요. (감수성을) 업데이트한 것 같지만 안 된 것 같고 그러다 또 나중에는 누구보다 의로운 행동을 할 수도 있고요. 이런 이야기를 많이 고민하고 있어요.”

글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사진 박승화 선임기자·백종헌 <씨네21> 기자
윤성호 감독이 여러 메모를 저장하고 분류해둔 ‘구글 독스’ 갈무리 화면. 윤성호 제공

윤성호 감독이 여러 메모를 저장하고 분류해둔 ‘구글 독스’ 갈무리 화면. 윤성호 제공

윤성호의 영감 ‘Funny’

주로 관찰하면서 영감을 얻는다. “사방에서 다 영감을 얻어요.” 보고 들은 건 메모로 남긴다. 구글 드라이브를 적극 활용하는데, 메모를 차곡차곡 쌓아두고 분류한다. “다종다기하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건 습벽처럼 정리해두는 메모 폴더들 때문인 것 같아요.”
그의 메모 목록을 슬쩍 들여다보면 작품별로 회의록과 리서치 자료가 꼼꼼하게 정리돼 있다. 이런 자료는 함께 작업하는 이들과 공유해둔다. 평소 얻은 영감을 쌓아두는 일종의 ‘곳간’도 있다. 이 곳간은 “서랍으로 다 구분해놓는 방식”으로 정리한다. 서랍에는 ‘Funny’(재밌는)란 단어가 공통으로 들어가는데 ‘Funny Character’ ‘Funny Idea’ ‘Funny Item’ ‘Funny Scene’ 이런 식으로 분류가 꽤 세심하다. 심지어 아무런 내용이 없어도 재밌는 제목 아이디어만 적은 폴더 ‘Funny Title’도 있다.
“어떤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거기서부터 어떤 타래를 붙여나가는 방식으로 일하는 게 아니라 뭐가 생각날 때마다, 아무 뜬금없는 얘기라도 써놔요. 오늘도 (인터뷰하면서) 몇 가지 뜬금없는 얘기를 했잖아요. 그러면 집에 가는 길에 버스나 지하철에서 한 번 정리해서 쓴 다음 폴더에다가 분류해놓는 거죠. 예를 들어 ‘이거는 어쩌면 <이상청> 시즌2에 써먹을 수 있겠다’ ‘이 말은 지금 쓰는 <제4차사랑혁명>(가제)에 써먹을 수 있겠다’ 판단하고 각각에 해당하는 폴더에 넣어놓는 거죠. 길가의 돌멩이도 어쩌면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식으로 정리해두는 그런 강박이 좀 생겼달까요.”(웃음)
처음부터 이렇게 꼼꼼하게 정리하는 습관을 들여놓은 건 아니다. “30대 중반까지는 전혀 정리를 안 하고 그때그때 충동적으로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더 많은 걸 하고 싶어지다보니 정리하게 되더라고요. 또 이렇게 분류하지 않고 메모장 하나에 모든 걸 다 넣어서 200페이지를 넘어간 적도 있었어요. 근데 모아두기만 하니 그냥 ‘쓰레기장’이더라고요. 쓰레기장을 정리한 뒤에야 이게 굉장한 ‘곳간’이다 싶었죠.”
윤성호는 ‘감독’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그는 자신이 연출한 작품 대부분을 따로 또 함께 쓴 작가다.

윤성호는 ‘감독’으로 더 잘 알려졌지만 그는 자신이 연출한 작품 대부분을 따로 또 함께 쓴 작가다.

에필로그

그는 쉼 없이 말했다. (본인은 스스로 “뇌가 입에 달렸나봐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냥 수다를 떠는 것이 아니다. 말하면서 끊임없이 이야기가 펼쳐지고 그 안에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식이다. (그래서인지 유려한 답변 도중에 말을 끊고 질문을 던지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예시를 하나 들면 그 예시가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흘렀다. “기자님 이거 재밌어요? 어떨 것 같아요?” 종종 의견을 묻기도 했다. 인터뷰이와 짐짓 거리두기를 해야 하건만, 고백하자면 그의 모든 아이디어에 낄낄거렸다. “이건 구상 중인 아이디어인데 절대 기사에 쓰시면 안 돼요!”라고 신신당부한 아이디어를 말해줄 땐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트렸다.(이 지면에 밝히지 못해 애석할 따름이다. 반드시 언젠가 작품으로 탄생해 나오길!)

계속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깨달았다. 사실 그의 진짜 강점은 유머러스함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윤성호 감독은 농구, 특히 여자 농구를 좋아하는데 ‘언더독’(이길 확률이 적은 팀)인 하나원큐를 자꾸 응원하게 된다고 했다. 이기는 팀보다 열세인 팀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 이런 것에 어렸을 때부터 왠지 끌렸다고. “강자보다 약자 편에 선다는 식으로 포장하는 건 아니고요. 주변에서 아이돌이 인기 있으면 인디음악 좋아하고, 인디음악이 인기 있으면 아이돌을 좋아하는? 약간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대단한 신념이 아니라고 거듭 말했지만, 너도나도 ‘힘 있는 쪽이 우리 편’ ‘이기는 것이 곧 정의’라 생각하고 남과 다른 목소리를 내기 주저하는 나라에서 구태여 번번이 지는 쪽에 눈길을 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 모두 안다. 그 다른 시선이 녹아든 작품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품목록

쉴 새 없이 쓰고 만든다. 2001년 대학생 때 첫 단편영화 <삼천포 가는 길>을 만든 뒤 21년 동안 20편의 단편, 3편의 장편, 15편의 드라마를 만들었다. 웹드라마라 불리는 형식의 시작에도 윤성호 감독이 있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2010년), <출출한 여자>(2013년, 2016년), <출중한 여자>(2014년), <대세는 백합>(2015년) 등을 쓰고 만들었다. 요즘엔 다양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을 섭렵하고 있다. 웨이브 오리지널 드라마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2021년)를 썼고, 티빙(TVING) 오리지널 콘텐츠 <미지의 세계 시즌투에피원>(2022년) 등을 만들었다. 일부 작품에는 ‘크리에이터’로 참여했다. ‘크리에이터’의 뜻을 물으니 “주요 등장인물과 시공간 배경 설정, 서사의 주제와 중심 사건, 줄거리와 결말 등 드라마의 근간을 짜는 역할을 통해 기획 콘셉트를 제시하고 스토리의 전체 맥락을 조성하는 자”라는 설명이 돌아왔다. 아래는 주요 작품.

드라마

<미지의 세계 시즌투에피원>(연출·공동각본, 티빙, 2022년)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연출·공동각본, 웨이브, 2021년)

<제발 그 남자 만나지 마요>(크리에이터, MBC에브리원, 2020년)

<탑매니지먼트>(공동연출·각색, 웹드라마, 2018년)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크리에이터, 웹드라마, 2018년)

<아이돌 권한대행>(공동연출·공동각본, 네이버TV, 2017년)

<게임회사 여직원들>(공동연출·각색, 네이버TV, 2016년)

<출출한 여자 시즌2>(공동연출, 네이버TV, 2016년)

<대세는 백합>(공동연출, 네이버TV, 2015년)

<출중한 여자>(공동연출·공동각본, 네이버TV, 2014년)

<썸남썸녀>(연출·공동각본, 웹드라마, 2014년)

<출출한 여자 시즌1>(공동연출, 네이버TV, 2013년)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각본·연출, 웹드라마, 2010년, 2012년 MBC에브리원에서 추가 제작)

영화·다큐멘터리

<말이야 바른 말이지>(공동연출·공동각본, 2022년)

<도약선생>(공동각본·연출, 2011년)

<은하해방전선>(각본·연출, 2007년)

<우익청년 윤성호>(연출, 2004년)

<삼천포 가는 길>(각본·연출, 2001년)

한겨레21 1454호 표지. 서점에서 판매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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