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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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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준 신뢰와 사랑에 응답하는 것

‘몸에 상처를 내는’ 정형 행동을 하는 녀석의 행복을 고민하며 옆을 지킬 작정이다
등록 2023-01-25 20:31 수정 2023-01-26 09:43
사랑이가 그루밍을 하다가 피부에 상처를 내기 시작하면, 그 부위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몸에 플라스틱 깔때기를 씌운다.

사랑이가 그루밍을 하다가 피부에 상처를 내기 시작하면, 그 부위가 악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몸에 플라스틱 깔때기를 씌운다.




*제1441호 ‘날개 잃은 천사가 내게로 왔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2997), 제1444호 ‘너와 사랑을 나누는 아침을 기다려’(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53150/)에서 이어집니다.

사랑이는 파우더깃이 발달한 유황앵무이다. 파우더깃을 아래위 부리로 문지르면 깃이 부서져 고운 가루가 된다. 유황앵무는 이 가루와 함께 꽁지 기름샘에서 분비되는 기름을 부리에 묻혀 다른 깃을 다듬는다. 다듬으면서 깃 사이의 이물을 제거하고 깃 모양을 매끄럽게 유지한다. 비행 능력을 최상으로 유지하는 것이 생존에 직결된 새에게 그루밍(깃 고르기)은 자연스러운 일상활동이다.

사랑이가 태어나서 처음 그루밍을 했을 때를 상상해본다. 부리로 파우더깃을 씹고 부수며 고운 가루를 혓바닥으로 문질렀을 어린 유황앵무의 표정은 어땠을까. 하지만 사랑이의 편안한 그루밍을 상상해보려 해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 현실에선 볼 수 없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랑이의 그루밍은 안락함과 거리가 멀다. 몸 구석구석에 상처가 나 있고 흰 깃털에는 종종 붉은 피가 묻어 있다. 깃을 고르다가 사랑이가 처음 피부에 상처를 냈을 때는 언제였을까? 몸에 상처를 만들고 통증을 느끼는 것은 어쩌다가 사랑이가 멈추지 못하는 놀이가 돼버렸을까?

사람 손 탄 앵무새에겐 흔한 문제 행동

사랑이를 처음 봤을 때 녀석의 흰 깃털에는 군데군데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다. 투명한 플라스틱 깔때기를 목에 뒤집어쓰고 있어 날개를 펴지 못했다. 실습하던 병원 선생님은 넥칼라를 쓰지 않으면 몸을 물어뜯어 상처를 낼 거라고 말했다. 앵무새 서적에서 읽은 새의 깃털 뽑기에 대한 내용이 생각났다. 깃털 뽑기는 사람 손에 길러지는 중대형 앵무새에겐 꽤 흔하다고 알려진 문제 행동이다.

다양한 활동을 보장하지 못하는 단조로운 사육 환경, 소통할 수 있는 가까운 동종의 존재가 없는 고립된 생활에서 앵무새는 자주 자기의 깃털을 뽑는 것으로 내면의 황폐함을 보여준다. 사랑이의 자해 행동은 깃털 뽑기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 행동이었다. 피부와 근육을 물어뜯다가 내부 장기까지 손상돼 감염이 심각하게 진행되면 사망으로 이어진다. 동물원의 콘크리트 사육장 안에서 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사자,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사육장 벽에 머리를 계속 부딪치는 코끼리의 정형 행동과 비슷할 것이다.

수의대 여름방학 실습을 하던 병원에서 사랑이를 처음 만났을 때 이미 사랑이는 왼쪽 날개 절단 수술을 마친 상태였다. 길에서 날개가 부러진 상태로 행인에게 구조된 새였다. 병원에서는 수술 이후 오랫동안 이 앵무새를 임시보호 중이었다. 몇 차례의 날개 절단 수술과 좁은 입원장 생활은 이 앵무새의 기억과 성격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이 새는 병원 사람들에게 스스로 마음을 닫아버렸다. 청소하거나 밥을 주려고 새장 문을 여는 간호사 선생님들의 팔과 얼굴을 사납게 공격했다. 아마 녀석의 자해가 시작된 것은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고통과 무기력 속에서 자기 몸에 상처 내기 시작했을 앵무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불안함에 몸부림친 18살 내가 보였다

실습하던 병원 일과를 마치고 퇴근길 버스를 탔다. 버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까마득한 옛날 기억이 떠올랐다. 고3 때의 기억이었다. 지독하게 불행한데 내가 처한 상황 중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함이 나를 압도했을 시절이다. 미래를 위해 공부에만 집중해야 함을 알았지만 그것이 매일의 불안함을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멀리 있는 미래는 손에 잡히지 않았기에 당장의 1분 1초를 버티게 해줄 것을 찾았다.

당시 나에게 그것은 비누였다. 입시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 나는 좋아하는 향의 비누를 챙겨 손수건에 싸서 가방에 넣고 다녔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의 적막이 숨 막힐 때, 의지하던 친구와 이유도 모른 채 멀어질 때, 좋아하던 가수의 부고를 라디오에서 접할 때 나는 가방에 든 비누를 만지작거렸다. 비누를 꺼내 들어 코에 대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강렬한 불안감이 휘몰아칠 때는 제일 좋아하는 비누를 갈아 고운 가루로 만들어 몰래 조금씩 먹기도 했다. 혓바닥 위에서 미끌거리는 느낌이 구역질을 유발하면 화장실로 뛰어가 토하기도 했다. 모두 게워내고 나면 머리가 더 맑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강한 비누 향이 뇌를 가득 채우는 것 같을 때는 모의고사 점수도 불안함과 외로움도 잠깐 잊을 수 있었다.

자기 피부를 정신없이 물어뜯어 피를 흘리는 앵무새의 모습에, 불안함을 버티기 위해 몸부림치던 18살의 내가 겹쳐 보였다. 자해하는 이 앵무새도, 비누 거품을 삼키고 토하던 나도 매일매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 않으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던 행동으로 내 일상을 버텨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결국 어느 순간 삶이 다른 국면으로 이동했음을 알게 됐다. 그리고 다른 국면으로 이동하는 순간에 늘 나를 믿고 기다려준 중요한 타인이 있었다.

사랑이도 그랬을까? 한쪽 날개 절단 수술이 끝났고 봉합한 피부도 다 아물었지만 어린 유황앵무의 마음속 병은 점점 깊어졌던 것 같다. 어느 날 어두운 입원장 안에서 평소처럼 깃털을 고르다가 우연히 피부에 상처를 냈을 것이고, 처음 경험한 통증은 강렬했을 것이다. 따갑고 쓰라리고 욱신거리는 감각은 무료한 일상에서 유일하게 생생한 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부리로 피부를 뜯고 피를 내는 이 행위에 몰두하면서 녀석은 점점 더 고립된 내면의 동굴로 숨어버린 것 같았다. 사랑이의 삶을 다른 국면으로 이동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내 옆에 있어준 것처럼, 나도 사랑이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그 앵무새를 입양해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다. 행동풍부화를 위한 장난감과 놀이를 개발하고, 사랑이가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충분하도록 일과를 조정한다. 사랑이의 자해는 많이 줄었지만 같이 산 지 10년이 훌쩍 넘는 지금도 사랑이는 종종 자기 몸에 상처를 낸다. 추운 날씨 때문에 산책을 못하고 햇볕 쬐는 시간이 줄어드는 요즘 같은 계절에 자해는 더 심해진다. 그럴 때는 내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다.

야생조류는 거래돼선 안 되는 존재

지난주 출근길에 멧비둘기가 전봇대 위에서 여유롭게 그루밍 하는 모습이 보여 걸음을 멈췄다. 넋 놓고 멧비둘기를 바라봤다. 멧비둘기의 흉근은 탄탄했고 온몸의 깃은 매끈해 보였다. 텃새인 멧비둘기의 모습은 완벽하게 멋지고 아름다웠다. 동시에 우리 집에 있는 사랑이가 생각나 눈물이 났다. 날개 절단 이후 비행하지 못한 사랑이의 빈약한 흉근, 종종 피 묻은 부리, 부스스한 사랑이의 깃털이 떠올랐다. 순간 마음으로 깊이 깨달았다. 야생조류는 사람의 필요에 따라 상품으로 거래돼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말이다. 지능이 높아 사람과 소통이 가능하고 생김새가 ‘이국적’이라는 것은 사람이 앵무새를 소유해도 될 이유가 될 수 없다.

조류학자 조안나 버거가 저서 <나를 소유한 앵무새>에서 말했듯이 사람들이 앵무새를 소유한다는 것은 사람의 착각이다. 집 안의 새장으로 앵무새를 데려온다 해도, 앵무새는 뼛속까지 자기 삶의 터전인 ‘야생’에 속해 있다. 그 사실을 나는 사랑이와 함께 살면서 알게 됐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야생조류로 살았어야 할, 날지 못하는 듀컵코카투의 행복은 나에게 앞으로도 평생 도달할 수 없는 목표이다. 하지만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나는 녀석의 행복을 고민하며 옆을 지킬 작정이다. 사랑이가 나에게 준 신뢰와 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내 몫이다.

글·사진 허은주 수의사·<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저자

*시골 작은 동물병원 수의사로 일하면서 만난 동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람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동물의 우정에 사람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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