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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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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린 시추가 날 몰라보는 게 나아요…해준 게 없어요”

15살 시추 보호자는 반려견의 죽음이 다가오자 지난날의 후회가 밀려왔다
등록 2023-05-19 07:41 수정 2023-05-25 15:27
유아차에 탄 시추 한 쌍의 모습. REUTERS

유아차에 탄 시추 한 쌍의 모습. REUTERS

출근하니 누군가 병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출근 시간 30분 전부터 병원 앞에서 기다렸다고 말하는 그의 품에 축 늘어진 개가 안겨 있었다. 15살 시추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 눈 주변부터 귀밑까지 퉁퉁 부었고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피고름으로 담요가 젖은 게 보였다. 차트를 보니 오래전에 귓병을 진료하러 한 번 내원한 환자였다. 이후 2년 만에 병원에 온 것이었다.

산소방에 들어가 수액을 맞히면서 검사를 진행했다. 혈액검사 결과 염증 수치가 높았고 탈수도 극심했다. 확인하니 피고름은 왼쪽 귀밑 피부에 뚫린 구멍과 턱밑 림프샘에서 흘러나왔다. 외이염이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전신 염증 상태로 진행된 것 같았다. 이렇게 심해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그동안 모르셨냐고 보호자에게 물으니 최근 반려견이 기운은 없어졌지만 밥은 잘 먹어서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았다고 했다.

눈은 퉁퉁 붓고 가느다란 숨만 내쉬던 녀석

오늘 녀석을 보니 아예 몸을 가누지 못해 급하게 병원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치료하면 살 수는 있냐고 묻는 보호자의 목소리는 떨렸고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그는 연신 손으로 눈을 문질렀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 오랫동안 신경을 못 썼다는 말은 한숨으로 끝났다.

보호자는 병원에 녀석을 맡기고 출근했고, 우리는 입원장에서 시추에게 필요한 수액과 주사를 주면서 체온을 체크했다. 왼쪽 눈은 아래위 눈꺼풀이 부풀어 올라 강제로 닫혔고, 반쯤 열린 초점 없는 오른쪽 눈은 깜빡이지 않았다. 가느다란 숨을 쉴 때 얕게 올라갔다 내려가는 흉곽의 움직임만이 녀석의 생존을 알려줬다.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왼쪽 귀를 만지면 녀석은 계속 얼굴을 털며 괴로워했다. 눈 앞에 생생한 고통이 있는데 그 백만분의 일조차 내가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고통은 혼자 통과해야만 하는 긴 터널이다.

입원 사흘째 아침, 병원에 간호사 선생님들의 기분 좋은 목소리로 가득했다. 시추가 처음 고개를 들고 물을 마신 것이다. 죽은 듯이 누워만 있던 녀석이 입원장에서 처음 앞다리를 바닥에 딛고 일어났다. 입원장 앞에 가서 보니, 부어서 굳게 감겨 있던 눈꺼풀의 부기가 조금 빠져 아래위 눈꺼풀 사이로 눈동자가 드러났다. 녀석의 이름을 부르니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사흘 전 이곳에 왔을 때가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다행이다. 우선 큰 고비는 넘긴 것이다.

다음날에는 귀밑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고름도 눈에 띄게 줄었고, 조금이지만 밥도 먹었다. 주사를 맞히려 발을 만지면 싫다고 발을 빼기도 했고, 귀를 닦아주려 손대면 하지 말라고 으르렁하기도 했다. 퇴원해도 되겠다는 전화를 받자마자 보호자는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보호자는 시추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비비면서 반가워했지만, 시추는 조금 귀찮다는 듯이 보호자의 얼굴을 앞발로 밀어냈다. 피곤하니 그만하고 어서 집에 가자고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병원 밖을 나서는 보호자 품에 안긴 시추의 표정은 편안했다.

인지능력 떨어지니 밤에 집 안을 서성이다 부딪혀

퇴원 뒤 통원하면서 보호자와 녀석의 상태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달쯤 지나자, 귀와 얼굴의 부기는 호전되고 식욕도 좋아졌지만 걱정되는 점도 많았다. 유선에 크고 작은 종양이 여럿 있었고, 초음파 영상으로 간과 비장에 종양이 확인됐다. 수술로 제거하는 게 좋을지, 먼저 조직검사와 전이검사를 해야 할지 고민됐다.

그런데 보호자는 종양이 아닌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시추가 밤에 잠을 안 자고 계속 서성인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물으니, 벌써 1~2년 전부터 밤에 집 안 곳곳을 서성였다고 했다. 이번에 아파서 병원에 다녀온 뒤 그 증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새벽에 물을 마시려고 부엌에 불을 켜면, 싱크대와 벽 사이를 우두커니 보고 서 있는 녀석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최근 밤에 이유 없이 낑낑대거나 벽 쪽을 보고 짖기도 했는데, 그런 일은 같이 살면서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추정컨대 시추는 1~2년 전부터 인지능력장애, 이른바 치매가 서서히 진행된 것 같았다. 치매와 더불어 노화로 인한 전신 활력 저하, 종양, 심각한 외이염, 탈수 등이 시추의 상태를 바닥까지 내려가게 해서 병원에 오게 된 것 같았다. 처치와 약물의 도움으로 염증 상태가 해소되고 탈수는 교정돼 활력이 좋아지면서 녀석에게 진행되던 치매 증상이 더 또렷이 드러난 듯했다.

집 안 곳곳에 부딪혔는지 녀석의 얼굴과 코에 상처가 보였다. 우선 집 안을 안전한 환경으로 만드는 것이 시급했다. 부딪혀서 다칠 수 있는 모서리에는 안전패드를 설치하고, 높은 곳에서 떨어질 만한 물건도 다 치워야 한다. 규칙적이고 가벼운 운동을 시키고 일조량을 늘려야 하는데, 그래야 수면의 질도 높아지고 수면 형태도 개선된다. 먹는 사료량과 음수량도 꼼꼼히 체크해야 탈수와 영양불균형을 예방할 수 있다. 이런저런 관리 방법을 안내하고 인지능력 개선 약물을 처방했다.

몇 주 뒤 병원에 온 보호자의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시추의 상태를 물으니 나쁜 소식도, 좋은 소식도 있었다. 좋은 소식은 약을 먹고 밤에 서성대는 것이 많이 나아졌고, 환경 개선 뒤 부딪혀 다치는 일도 많이 줄었다고 했다. 나쁜 소식은 이제 녀석이 가족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고 했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가족을 보고 알아보지 못해 짖고 무서워하거나 으르렁하는 일이 늘었다는 것이다.

가족이 죽어간다는 사실 깨달으며 달라지는 삶

“보호자를 못 알아본다고 하셨는데 괜찮으세요?” 하고 물으니, 보호자는 “저를 몰라보는 게 더 나아요. 제가 뭐 해준 게 없거든요. 일한다고 애 혼자서만 지내게 하고 방치한 시간이 길어서 미안하죠. 절 기억 못하는 게 나아요”라고 대답했다. 출퇴근 전후로 그동안 못해준 짧은 산책도 하면서 녀석과 함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늘리려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코끝이 찡했다.

15살 시추의 삶은 천천히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애틋한 한 생명이 죽어간다는 깨달음은 지금 그 보호자의 삶을 변화시킨다. 매일 똑같은 하루가 아니라 새로운 하루하루를 살게 한다. 이 노견이 세상을 떠나기 전 함께했던 몇 번의 산책은 보호자의 이후 삶을 버티게 해줄 소중한 기억이 될 것이다.

내 옆의 소중한 누군가가 그리고 나도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모든 생명의 운명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동물병원에서 만나는 개와 고양이의 수명은 사람보다 훨씬 짧기에 나는 더 자주 죽음에 대해 환기한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나를 더 또렷이 보게 한다. 나에게 동물병원은 그런 삶의 비밀을 엿보게 해주는 곳이다.

허은주 수의사·<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저자
*시골 작은 동물병원 수의사로 일하면서 만난 동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람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동물의 우정에 사람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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