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과대학 본과 2학년 1학기 시험 기간이었다. 눈을 뜨니 창밖이 환했다. 정신 차리고 시계를 보니 아침 8시50분. 시험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10분이다. 잠들어 있던 뇌에 찬물이 끼얹혔고 관자놀이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새벽 5시로 맞춰놓은 알람을 끄고 잤을 것이다. 전속력으로 뛰어도 자취방에서 강의실까지 15분이 걸리니 시험시간을 맞추기 힘들다.
침대 밖으로 나오려고 오른발을 바닥에 디디면서 몸이 기우뚱,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날카로운 통증이 오른발에 느껴졌다. 발등과 발목이 꽤 부어 있었다. 어렴풋이 새벽의 상황이 떠올랐다. 새벽에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났던 것 같다. 쥐가 났는지 오른발에 감각이 없었는데, 그 발로 바닥을 디디다가 그대로 뒹굴었다. 발에 둔탁한 통증이 있었지만 쏟아지는 졸음에 그대로 잠들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큰길까지 나가서 택시를 타자는 생각이 들었다. 자취방에서 큰길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3분. 하지만 깨금발로 걸어 나오니 15분이 걸렸다. 오른 다리에 조금이라도 체중을 실으면 보복처럼 생생한 통증이 왔다. 택시를 타고 수의대 건물 앞에서 내렸다. 시험장은 3층이었고 당시 수의대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왼쪽 어깨와 팔로 난간을 감싸 안아 잡고 왼쪽 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오른쪽 발바닥에 힘을 주면 악 소리가 날 만큼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왼쪽 다리에도 과부하가 걸려 2층까지 가는 데 3~4분이 걸렸다. 시계를 보니 오전 9시25분. 3층을 눈앞에 두고 계단에 주저앉았다. 계단은 높고 끝은 아득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 해?” 돌아보니 같이 수업을 듣는 H였다. 학교에서 늘 여유 있어 보였던 동급생이다. “시험인데 너 이제 와?” “응. 이제라도 들어가야지.” 숨을 몰아쉬면서도 가볍게 웃는 H의 얼굴을 보니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졌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근데 시험시간에 왜 나와서 놀고 있어?” 계단에 앉아 있는 나를 보고 말하는 H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섞였다. 그 말을 들으니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 다리 다쳐서 계단 올라가다가 쉬고 있었지.” 웃음은 상황의 무게를 약간 덜어준다. 모든 것이 조금 가볍게 느껴지면 다시 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H의 도움을 받아 강의실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9시30분,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니 종이 넘기는 소리, 볼펜 굴리는 소리만 들렸다. 시험지를 받아 보니 분명 어제 공부한 내용인데 답은 아리송했다. 아까 흘린 땀이 식어 오한이 났지만 괜찮다. 이 시험장 안에 앉은 것만으로 평온했다. 뇌를 최대치로 가동해 시험을 보고 마지막으로 시험장을 나왔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으니 발가락뼈가 부러졌다. 부러진 발을 억지로 딛고 다녔더니 발 상태는 엉망이었다.
당시 나는 내 발 상태만큼이나 엉망이었다. 새로 시작한 학교생활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다. 그곳에는 입학 전 내가 익숙했던 세계와 완전히 다른 원칙과 위계가 존재했다. 학교를 늦게 들어갔기에 동기 대부분은 나보다 열 살 이상 어렸다. 새로 부임한 교수님이 나와 동년배이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아도 나이 차이로 상대가 불편해할까봐 위축됐다. 새로운 관계에서는 상대가 편안해할 모습으로 나를 포장하려 했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불안함과 뭐든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턱끝까지 차 있었고 항상 나 자신이 못마땅했다.
가끔 예전 친구들이 몹시 그리웠다. 내가 나로 존재했던 곳. 공간을 떠난다는 건 모든 것을 떠나는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애틋했던 예전 친구들의 삶에 대해 모르는 것이 하나둘 늘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음속에 박제시킨 옛날을 자꾸 꺼내 봤다. 오래된 녹음테이프를 계속 돌려 듣듯이.
그런 나에게도 마음 붙일 사람과 기억이 생겼다. H는 그런 관계의 시작이었다. 발이 불편한 나를 데리러 종강 전까지 H는 집 앞에 차를 가지고 왔다. 건물 계단을 오르려면 정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지만 나는 호의를 거절했다. H는 의아해했다.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 자기가 그 일을 기꺼이 할 수 있는데 왜 고집을 피우냐고 물었다. 그 질문의 답을 찾다보니 누구에게도 신세 지기 싫다는 내 마음이 보였다. 내 기준을 놓아버리면 나라는 사람 자체를 포기하는 듯해 두려웠다. 새로운 행복보다 익숙한 불행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H 덕분에 나는 무사히 종강을 맞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을까? 학교에도 조금씩 마음을 붙였다. 도움을 주거나 받을 수 있는 관계, 서로를 걱정하는 선물 같은 우정도 생겼다. 뭇 생명에게 어떤 마음과 태도를 지녀야 할지, 어떤 수의사가 되고 싶은지에 대한 답은 내 질문을 경청해주는 상대가 생기니 더 잘 보였다. 나를 위축시켰던 타인의 시선이나 동급생들 사이의 소문, 지긋지긋한 자기검열에 의도적으로 무뎌졌다.
졸업 뒤, 어느 퇴근길에 H에게 전화했다. 오래 알고 믿어왔던 보호자가 노견을 키우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안락사를 요구한 날이었다. 기관허탈(기관지협착증)이 진행돼 자주 호흡이 곤란한 15살 요크셔테리어의 재입양은 쉽지 않을 것이다. 동물병원에서 보호자만 상처받는 것이 아니다. 수의사도 보호자에게 실망하고 상처받는다. 그날의 일을 설명하고 대화하는 중, H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 노견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는 걸 느꼈다. 그 걱정이 전달되면서 종일 가라앉았던 마음이 좀 괜찮아졌다.
결국 우리는 노견의 다른 입양처를 찾지 못했고, H가 입양 의사를 밝혀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새 가족을 만난 작은 강아지는 4년을 더 살다가 최근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뒤 H와 H의 가족은 나에게 말했다. 강아지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작은 녀석을 만나고 나서 알게 됐다고, 이 아이를 만나게 해줘 참 고맙다고 했다.
누군가는 한 생명을 포기하려 한다. 하지만 그 생명을 살리기 위해 끝까지 애쓰는 사람도 반드시 있다. H는 그런 수의사이고 내가 H의 벗이라는 것이 기뻤다. 멀리 있어도 그 벗을 생각하면서 나는 또 하루 살아갈 힘을 얻는다. 포기하지 않고 애쓸 마음이 생긴다.
허은주 수의사·<꽃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 저자
*시골 작은 동물병원 수의사로 일하면서 만난 동물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람 곁을 오랫동안 지켜온 동물의 우정에 사람은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3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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